하나님과 도(道)

조회 수 4611 추천 수 126 2004.07.01 15:11:34


        하나님과 도(道)



종교 사이의 대화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극단으로 흐를만한 두 가지의 위험성이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화와 타협을 무조건 지고의 가치로 여김으로써 결국 각각의 종교가 담지하고 있는 참된 가치를 놓쳐버리는, 일종의 혼합주의가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종교 사이의 대화는 인정하되 여전히 배타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결국 종교의 본질을 왜곡시키는, 일종의 도그마티즘이 그것이다.

또한 종교 사이의 대화라는 것이 반드시 양측의 대표자들이 한 자리에 만나서 어떤 공동의 프로그램을 끌어가는 행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보다 우선적인 일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망으로 다른 종교를 바라볼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전망으로 자신의 종교를 바라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것은 상호 이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종교가 독단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종교적 특성을 진리론적 차원에서 심화시켜나가는 작업은 이렇게 열린 시각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이렇듯 자신들의 종교적 깊이를 꾸준히 열어 가는 이 작업은 단지 다른 종교와의 관계만이 아니라 철학이나 물리학, 사회학 등, 진리를 추구하는 주변의 모든 노력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발전한다. 나는 오늘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道)와 우리 기독교의 하나님이 어떤 시각에서 소통이 가능한지 잠시 생각해보겠다.

장자는 도에 깊이 들어간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은 이 세상의 인식체계로 담아낼 수 없는 그 어떤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도는 일종의 아득한 경험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신비'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도는 우리가 여기서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있음과 없음의 인식체계를 벗어나 있다. 도는 오히려 무(無)로서 유(有)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높이 보다는 깊이를, 밝음보다는 어둠을 모든 존재론적 토대로 여기는 사유방식이 바로 도에 담겨 있다. 이런 도의 세계가 어렴풋이 나마 우리의 인식에 담겨지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생각했던 삶의 질서를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흡사 어른이 된 사람이 어린아이의 소꿉놀이에서 떨어져 나오듯이 말이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어른이 된 다음에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소꿉놀이의 어린아이들에게 어른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이듯이 도의 인식에 들어간 사람은 결국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이 말은 곧 전혀 다른 정신세계를 경험한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칭찬하는 것들이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세상이 낮추어 보는 것에서 더 큰 진리를 찾는 세계이다. 그래서 '장자'에는 장애인, 백정과 수공업자로서 도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장자는 도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고 살든지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직업보다는 도가 리얼리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자기의 사회적 위치에 상관없이 오직 도에만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도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의 정신세계가 아득하다는, 그래서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야생화의 존재론적 깊이를 직관할 수 있다면 정신을 놓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현상 자체가 아득하니까 말이다. 예컨대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원소들이 어떤 생명의 원리에 의해서 이런 야생화를 피우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라. 그 야생화라는 생명 현상은 뒤로는 우주의 시작에 닿아있으며, 앞으로는 종말에 닿아있다. 이 세계는 도저히 우리가 파악해낼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부분과 전체의 결합으로 짜여있다.

그래서 성서는 이런 생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신비한 분으로 서술한다. 성서 기자들이 아무리 생각을 깊이 해도 역시 인간과 세계의 역사는 신비하다. 시편을 비롯해서 성서 기자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친 것은 단지 감상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을 드려야 할 분이지 다른 어떤 방식으로 논란을 벌일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은 이름도 없고 우리가 가시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다. 그를 이름으로 규정하면 그 순간에 하나님은 우상이 되며,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이런 하나님의 영에 심취된 사람들은 대개 정신을 놓고 살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높은 산에 올라갔을 때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듯이 우리의 모든 인식론을 뛰어넘는 그런 절대 존재인 하나님 앞에 서게된다면 당연히 정신을 잃을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술에 취한 듯 영에 취한 사도 공동체도 역시 이와 비슷하다.

물론 장자의 도는 우리가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하는 인격적인 하나님과 똑같지는 않다. 그러나 어떤 절대의 세계에 들어갔을 때 이 세상의 모든 가치 기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점에서는 사람들에게 비슷한 현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 스스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길'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으니까 기독교 신앙의 심화를 위해서 장자의 도를 인식론적 친구로 삼는다고 해서 그렇게 불신앙적이거나 불쾌한 일이 아니다.

                                                      <11월30일 정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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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8.12 15:33:57

도(道)?
말 그대로 길이다.
순례자가 가는 길이나, 만행하는 스님의 길이나 끊임없이 걸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오름과 내림의 반복속에 이루어진 길 속에 수 많은 형태로 만난 하나님은 영광과 찬양을 받으실 존귀하신 지존자 이심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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