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론과 무신론

조회 수 4762 추천 수 73 2004.07.01 15:12:14


유신론과 무신론  



유신론과 무신론 논쟁은 초등학생들부터 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될 수 있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이런 주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또는 우리는 왜 사는가 하는 질문처럼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아직 그 대답이 명증하게는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자신의 신앙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선교적 사명을 위해서도 역시 이런 질문과 논쟁에 들어가야만 한다. 만약 이런 근본문제를 '무조건' 믿음의 차원에서 간단히 해결하거나 골치 아픈 것은 건드리리 않겠다는 생각으로 회피한다면 하나님을 이 세상의 창조자로 믿는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먼 행동이다.

도대체 하나님(神)은 있는가? 아니면 유한하고 허무한 자기 실존을 절대화해보려는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에 불과한 것일까? 고난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민중의 의식을 잠재우는 아편인가? 신은 죽었나? 이런 많은 무신론적 도전 앞에서 기독교는 여러 차원에서 신 존재를 증명하려고 시도한 바 있다. 물론 안셀름이나 아퀴나스 같은 사람들의 증명 방식은 기독교의 신론에 대한 근대의 본격적인 비판이 있기 전에 제시되었다. 예컨대 토마스 아퀴나스의 다섯 가지 존재 증명 중에서 첫 번째로 제시된 운동 개념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감각적으로 이 세상의 사물이 운동에 의해서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운동이라는 것은 그 운동을 일으키는 원인에 의해서 야기된다. 이런 논리를 따라가면 결국 최초의 운동을 야기한 존재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곧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즉 하나님은 부동(不動)의 동자(unmoved mover)로서 이 세상의 모든 운동의 단초라 할 수 있다. 이런 논리가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현대인의 모든 궁금증을 해결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운동으로 존재한다면 결국 하나님도 운동으로 존재해야만 하는데, 그가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도 역시 다른 힘에 의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임마누엘 칸트는 초감각적인 하나님을 순수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최고 존재자 개념은 여러 면에서 매우 유익한 이념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전히 이념뿐이기 때문에 그것만 가지고는 존재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의 인식을 확장시킬 능력이 전혀 없다." 대신 실천 이성의 차원에서만 하나님이 요청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도덕적 요청으로서의 하나님이라는 칸트의 신 존재 증명은 일반인들을 만족시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도 역시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인간의 도덕적 동기의 근거라기보다는 훨씬 심원한 존재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신이 없다는 주장도 역시 그 토대는 매우, 훨씬 더 부실하다. 쉽게 말해서, 감각적으로 확인되지 않는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 세상을 몰라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들의 의식에서나 인정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기체, 액체, 고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 사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파도 있고 광선도 있다. 때로는 그것이 입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파동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양자의 세계에 들어가면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은 경우에 따라서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만약 우리가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존재한다고 주장한다면 이 세상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의 사물이 얼마나 깊은 존재론적 특성을 갖고 있는지 우리가 모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우리 인식의 방향에 따라서 가변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아직 세상의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실체를 알지 못하며, 따라서 신이 없다는 주장도 역시 확인된 것은 결코 아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의 중간쯤 되는 입장은 범신론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유일신,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부정하지만 만물에 신성이 내재한다는 차원에서는 인정한다. 이런 범신론적인 착상은 노장 사상이나 불교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의 창조론에서 볼 때 이런 만유재신론을 무조건 백안시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자연의 관계를 창조자와 피조물로 구분하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신과 자연의 동일시는 곧 무신론과 다른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유신론이나 무신론이 아직은 증명될 수 없는 논리라고 한다면, 지금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존재문제와 연관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자연과학자들이 과학의 성질을 파악해나가듯 기독교인들이 해야할 일은 하나님의 존재 방식인 계시의 세계를 부단하게 해명해나가는 작업이다. 이는 다만 하나님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려는 우리의 호교론적 노력일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론적 특성에 상응하는 우리의 신앙적 태도이기도 하다. 아무리 자연과학이 발달했고 앞으로 발달한다고 하더라도 자연과학의 세계가 우리에게 여전히 숨겨져 있듯이 하나님의 존재도 역시 우리에게 숨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를 인식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인식론적 노력만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규명해낼 수 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은폐의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시기 때문에 그 은폐와 계시의 변증법적 긴장을 파악하고 있기만 하다면 우리는 조금씩 하나님의 존재 안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8.12 15:54:09

유신론(有神論)과 무신론(無神論)?
하나님은 역사앞에 침묵하고 계시기에 없다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침묵하고 계시는 듯 하지만, 살아 운동하시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운동(運動)속에 부동(不動)이라는 장자의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알수 있을것 같다.
처절한 역사 앞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불의 앞에 참을 수없는 분노 진리의 하나님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 유신론과 무신론 [1] 2004-07-01 4762
19 하나님은 말씀하시는가? [2] 2004-07-01 5419
18 예수의 메시아 인식 2004-07-01 4849
17 하나님과 도(道) [1] 2004-07-01 4610
16 예수의 메시아 인식 [1] 2004-07-01 5861
15 하나님의 인격성 [1] 2004-07-01 7944
14 종말론적 공동체 [1] 2004-07-01 5590
13 무죄한 자의 고난 [5] 2004-07-01 5184
12 타종교 [2] 2004-07-01 7186
11 부활 [2] 2004-07-01 5820
10 신학과 영성 [2] 2004-06-30 4980
9 성서주석과 성서해석 [3] 2004-06-30 5462
8 신학자 2004-06-30 4523
7 과학과 신학 2004-06-30 5031
6 하나님의 은폐성 2004-06-30 5537
5 혁명, 개혁, 개량 [1] 2004-06-30 5336
4 업적의(義) [3] 2004-06-30 5244
3 하나님의 자기계시 [2] 2004-06-30 7097
2 역사와 종말 [1] 2004-06-30 5757
1 구원은 소유인가 존재인가? [5] 2004-06-14 8952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