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인 사람

조회 수 7456 추천 수 1 2009.02.07 22:53:13
 

영적인 사람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 그래서 최소한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목소리까지 탁성으로 변한 사람이 영적인 사람일까? 그럴 수도 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영적인 호흡이니까 그런 호흡이 일상화한 사람이야말로 영적인 사람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그런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도가 무엇인가에 까지 우리의 질문을 넓혀가야 한다. 전문적으로 기도하는 사람들, 너무나 능숙한 기도꾼들, 심지어 남의 사생활까지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기도 빨(?)이 센 사람들을 기도의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거꾸로 굳이 따로 기도의 시간이 없다고 하더라도 늘 하나님과 영적인 소통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기도하는 사람일지 모른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형식 안에서 기도를 많이 한 사람을 무조건 영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어떤 영적인 열매를 맺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과연 영적인 열매라는 게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우리가 생각할 거리는 제법 많으니까 이 질문은 잠간 뒤로 미루고, 영적인 사람에 대한 논의로 좁혀서 생각을 밀고 나가자. 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전도 많이 하는 사람, 헌금 많이 하는 사람, 교양이 풍부한 사람, 그래서 교회에 덕을 끼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인가? 우리는 그걸 분간할 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에 누가 영적인 사람인지 단언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영적인 사람은 오직 영 자체이신 성령만이 분간할 수 있다. 사람은 매우 영특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남을 쉽게 속일 수 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다는 말이다.

누가 영적인 사람인가, 하는 질문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엇이 영적인 것인가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을 뿐이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당연히 영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영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면 영적인 사람을, 완전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구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 더 엄밀하게 말한다면 영적인 것에 대해서 질문하기 전에 영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해야 한다. 영적인 것은 영에 의해서 배출되고, 영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이 두 질문, 즉 영적인 것이 무엇인가와 영이 무엇인가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쪽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른 쪽의 설명이 필요하며, 한쪽을 설명으로 다른 쪽의 설명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문제의 핵심으로 직접 들어가지 않고 자꾸만 주변만 맴돌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영에 대해서 직접 무언가를 말할 수 있긴 하지만 내가 이렇게 주변에서 서성이듯이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과정이 곧 신학이며, 신앙적 인식이라는 사실을 전하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궁극적인 실체를 완벽하게 이해하거나 포착할 수는 없다. 다만 그쪽으로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는 게 최선이다. 그러니까 영이 무엇인지 직접 말할 수는 없고, 거기에 이르는 질문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가능하다면 합당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학문이 근본이다. 어떤 점에서 기독교 신앙도 이렇게 근본에 대해서 질문하는 태도이며 결단인지 모른다. 다시 우리의 길을 찾아서, 영이란 무엇이며, 영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까?

일반적으로 신학은 모든 길을 성서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영에 관한 질문도 성서로부터 시작하는 게 원칙이다. 만약 성서가 말하는 영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이에 관해 설명하는 많은 책이 있으니까 그걸 참조하면 된다.

하나님이 인간과 이 세계를 창조할 때 활동했던 영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영이 어떻게 활동했는지에 대해서 마찬가지이다.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성서 기자들은 영에 대해서 풍부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에 관한 설명은 내가 여기서 생략하겠다. 이 모든 성서의 보도를 아무리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결국 영을 아직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의 핵심이 있다. 성서의 영이 불확실하다는 게 아니라 이런 궁극적인 세계는 종말의 지평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는 뜻이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은 상태에서 그 종말에 가서야 완전히 드러나게 될 영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우리는 잠정적으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건 아니다.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와 인류가 발전시켜온 많은 진리론적 정보들이 있다. 가능한대로 그런 공부를 충실히 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역사를 뚫어볼 수 있는 통찰력도 필요할 것이다.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영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그런 공부에 철저하고, 오늘의 역사에서 활동하는 성령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적인 시각을 날카롭게 유지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이다. 대답이 아직 시원치는 못한 것 같다. 영적인 사람이란, 인류 과거 역사에 한정되지 않고 종말의 역사에까지 열려있는 그런 생명의 영을 향해서 영적인 촉수를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이 구약의 예언자들이었으며, 신약의 사도들과 성서기자들이었고, 기독교 역사에 등장했던 많은 신학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이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직 미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종교적 형식을 능란하게 수행하는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을 지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생명의 영, 진리의 영, 창조의 영, 정의와 평화의 영, 삼위일체의 영은 결코 그런 종교적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해야한다.

그렇다면 종교적 형식이 무의미하다는 걸까? 그럴 리가 있나. 종교 형식은 이 영의 활동을 담아내기 위한 최소한의 그릇이다. 이 말은 곧 영을 경험하기 위한 가장 정확하고 빠른 길의 하나는 곧 예배, 기도, 찬송, 성만찬 같은 종교 형식, 상징이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종교가 바르게 역할만 한다면 사람들에게 영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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