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5)

조회 수 3785 추천 수 1 2008.09.14 15:01:31
선교(5)

우리는 앞에서 선교에 관한 에큐메니칼 입장과 복음주의 입장이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짚었다. 에큐메니칼은 사회선교적인 차원을 강조하고 복음주의는 개인선교 차원을 강조하지만 이 양측의 입장을 칼로 두부를 자르듯이 구분할 수는 없다. 에큐메니칼도 개인을 복음 안으로 부르는 일을 간과하지 않으며, 복음주의도 사회책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사람이 개인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사회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선교도 역시 이 두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선교의 대상을 이렇게 두 측면으로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선교의 내용이다. 개인이나 사회에 무엇을 전해야하는가? 가장 원론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며, 실천적으로는 사람들을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틀린 게 아니지만 그것이 완료된 대답은 아니다.
두 번째 문제부터 짚도록 하자. 불신자 초청 예배라든지 총동원 전도주일 같은 행사에서 나타나듯이 한국교회에서 선교(전도)는 사람들을 무조건 교회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위한 방법론이 많이 개발되어 있다. 할부 판매원들의 판매 방식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통용된다. 신자들끼리 경쟁도 시키고 선물공세도 펼친다. 이것이 모두 선교라는 이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야 복음을 들을 수 있다는 논리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논리가 교회의 본질을 뒤엎어버린다면 옳다고 보기 힘들다. 명분으로는 사람들의 영혼 구원이지만 실제로는 교회의 양적인 발전이 선교의 목표가 된 상태이다. 한국교회에 선교행태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세속적인지 여기서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다.
선교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라는 첫 문제를 짚자. 이 말은 원론적으로 옳다. 그러나 어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인지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은 산신령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마술적인 복을 내려주는 분으로 다가갈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고 있을까?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해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를 전하는 것인가?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가, 다른가? 이런 문제는 단지 선교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생활 전체에 연관되어 있다.
이런 문제가 선교와 무슨 상관이 있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선교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믿으라고 전하는 것이지 신학강의를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다. 옳은 말이다. 선교는 신학강의는 아니다. 그러나 신학이 뒷받침이 없으면 선교는 방향을 잃어버릴 때가 많다. 지난 수 세기 동안 서구 교회가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 지역에서 어떤 선교활동을 했는지 돌이켜 보라. 그들은 식민지를 정복해나가는 제국들과 같은 길을 갔다.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문화를 파괴하고 기독교 문화를 심는 것이 곧 선교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의 선교는 제국주의 모습을 그대로 빼박았다. 어떤 설교자들은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들 덕분에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한국이 이렇게 잘살게 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제국주의적 선교행태가 빚은 잘못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어느 사이에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나라이며, 우리도 미국을 뒤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필자는 조선에 복음을 전한 미국 선교사들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그들의 인격과 신앙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 전파를 위한 그들의 진정성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그들은 선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전혀 없이 무조건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으로 왔기 때문에 조선 사람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데 별로 성공적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들의 신앙을 그대로 전수받은 우리들이 사대주의, 분파주의, 근본주의, 성속이원 등에 빠지게 되었다. 오늘 해외로 나가는 우리의 선교사들이 120년 전 우리에게 와서 복음을 전하던 미국 선교사들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는 게 아닐는지.
선교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우리가 신학적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에는 어떻게 임해야 하는지 우리는 훨씬 진지하게 생각하고 성찰해야 한다. 단지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세우는 것만이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것보다 더 포괄적이다.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세우는 게 잘못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 이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선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면 그 필요에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나올 것이며, 그들의 상황에 따른 교회가 세워질 것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선교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 능력을 볼 줄 아는 게 바로 신학적 영성이 아니겠는가. 위르겐 몰트만의 책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에서(20,21쪽) 한 대목을 인용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겠다.

오늘날 교회의 신학적 이해는 기독교 공동체의 몰락 속에서 선교하는 교회로의 경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서 교회는 선교를 ‘소유’하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리스도의 선교가 교회를 구성한다는 것을 우리가 배워야 한다. 교회로부터 선교가 이해되는 게 아니라 선교로부터 교회가 이해되어야 한다. 세계의 지평 속에 있는 선교의 교회를 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교>의 지평에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밝아오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복음의 설교는 예수의 사명, 성령의 사명, 그리고 교회의 사명의 첫째이며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선교는 오고 있는 하나님의 현재에서 경제적 필요로부터 하나님께 버림받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예상태로부터의 인간해방에 봉사하는 모든 활동을 포함한다. 복음화는 선교이다. 그러나 선교는 단순한 복음화만이 아니다. 문제는 교회 자체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있다. 교회 자체의 영광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아들을 통한 아버지의 영광이 교회의 목적이다. 교회의 선교적 개념은 하나님의 보내심에서 세계로 열린 교회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역사에서 교회의 삼위일체적 이해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레벨:1]india

2008.11.08 16:24: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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