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듭난 생명에 대하여

조회 수 4247 추천 수 2 2008.09.24 21:54:26
<아래의 글은 '질문과대답' 메뉴 137번으로 올라온 peace님의 질문 "거듭난 생명에 대하여"에 대한
정용섭 목사의 대답을 시간이 지나서 미처 읽지 못한 분들을 위해서 끌어온 것이다.
그 질문과 대답, 그리고 대글을 조금 더 자세하게 읽고싶은 분은 그쪽을 참고하실 것.>

거듭난 생명에 대하여

피스 님, 안녕하세요? 진지하고 시의적절한 질문을 주셨습니다. 핵심적으로는 두 가지군요. 하나, 정 목사는 과거 완료적 구원에 대해서 냉소적이다. 둘, 예수 영접을 통한 거듭남의 체험과 삶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거듭난 생명’에 대한 설명을 원하셨습니다.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조금 망설여집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피스님의 생각이 일정한 패턴을 형성하고 있어서 다른 패턴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위 패러다임 쉬프트의 문제가 여기 걸려 있다는 겁니다. 제가 지금 피스 님만을 대상으로 글을 쓰는 게 아니라 일반 다비안들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 자질구레하게 설명하는 걸 이해해주세요.
피스 님의 기독교 이해와 저의 기독교 이해가 근본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접근 방법에서는 크게 다르다는 겁니다. 어쩌면 근본에 대해서도 크게 다를지도 모르지요. 동일한 우주를 보면서도 천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듯이 동일한 기독교 신앙을 접하면서도 크게 다를 수 있습니다. 제가 어제 <긍정의 힘>을 쓴 오스틴의 설교를 우연하게 기독교 티브이에서 보았습니다. 처음으로 본 겁니다. 저는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건 복음이 아니라 종교적 처세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구원 통치와 그 섭리와 그 신비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감사의 삶을 살면 모든 게 잘된다는 이데올로기를 전하더군요.
이처럼 같은 기독교 신앙의 틀 안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지요. 이런 건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서로 다른 생각을 전했습니다. 지난 2천년 기독교 역사도 그렇고, 지금도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이나 박옥수 목사의 구원론에서 볼 수 있듯이 무늬만 비슷하지 실질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길었습니다. 오해는 마세요. 피스 님의 신앙이 틀렸다는 뜻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틀렸다기보다는 다를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옳겠군요.
피스 님이 거듭남, 예수 영접, 구원의 확실성 등등을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거듭남의 생명에 대해서 강조하셨어요. 그런데요, 그 거듭남이라는 문제는 기독교 신앙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이게 문제인 거지요. 피스 님은 가장 중요하다고 보신 바로 그 주제가 실제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말입니다. 박옥수 목사 계통의 사람들이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지요? 아마 박옥수 목사께서 그런 제목으로 책도 쓴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다시 말씀드리지만 조직신학에서 거듭남의 문제는 거의 취급하지 않습니다. 중생(Regeneration)이 거듭남(born again)과 비슷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양자 모두 신학에서는 중심 개념이 결코 아닙니다. 칭의가 중심 개념이지요. 거듭남과 칭의가 간접적으로는 연결되지만 직접적으로는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칭의가 상수라고 한다면 거듭남은 변수인 거지요. 만약 칭의에 의한 결과로서의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피스 님의 생각은 칭의와의 연관보다는 거듭남의 확신, 구원의 확신, 등등, 이런 것에 포커스를 맞춘 거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정 목사가 거듭남의 삶을 강조하지 않는 거 같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 설교를 견인해가는 동력 중의 하나가 바로 칭의거든요. “여러분은 자기 업적의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예수의 의가 여러분에게 전가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설교했다면 그것은 곧 거듭남에 대해서 설교한 겁니다. 그런데 피스 님에게는 저의 설교가 완료된 구원과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완료된 구원과 종말론적 구원, 즉 ‘이미’와 ‘아직 아님’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논의에 더 집중하려면 거듭남, 중생에 한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피스 님에게 저의 설교가 거듭남과 거리가 먼 것처럼 들린 이유는 바로 피스 님과 저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패러다임이 다르다는 데에 있습니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표현에 주목해 주세요.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이걸 말하려면 세계 교회사를, 특히 종교개혁 뒤 세대의 정통주의 이후로 유럽에서 전개된 각성신학과 경건주의, 청교도, 그리고 미국에서 전개된 부흥운동을 좀 검토해야 합니다. 그걸 다 검토하기는 힘드니까 축약적으로만 말씀드릴께요.
예수 영접, 거듭남, 사죄의 확신, 구원의 확신, 새로운 삶 등등은 바로 위에서 언급된 그런 운동에서 강조된 것들입니다. 그게 18,19세기 유럽과 조금 뒤로 미국에서 크게 부각된 이유는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화와 연관됩니다. 그러니까 개신교회가 다시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교회의 전통과 신조 중심으로 돌아가서 영적 다이나믹을 잃어버렸다고 보고 그것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벌어진 겁니다. 그들은 교회와는 거리를 두고 개인들이 직접 성령과 소통하고, 회개하고, 깨끗하게 사는 삶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신학도 사라지고, 예전도 사라지고, 신조도 사라지고, 오직 지금 여기서 경험하는 영적 충만만 강조된 거지요. 결국 “탕자의 비유” 유와 같은 설교가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대학교 학부 다닐 때 빌리 그레함 목사에게서 그런 설교, 정말 신물 나게 들었습니다.
이런 신앙과 영성이 미국에서 크게 성과를 냈습니다. 그런 신앙에 영향을 받은 미국선교사들이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피스 님이 이런 교회사, 또는 교리사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서 질문하신 게 아니라는 것은 잘 압니다. 저는 피스 님이 저의 설교와 신학, 그리고 다비아의 여러 글에서 영적 깨우침에 도움을 받았으면서도 바로 이 대목에서만은 왜 동의하기 어려운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 중입니다. 피스 님의 그런 전통에서 신앙훈련을 받았다는 걸 지적하는 거지요.
한국에서 부흥하는 교회는 거의 이런 영성 안에 있습니다. 막 나가는 교회도 그렇고, 조금 의식이 있는 교회도 그렇습니다. 그 유명한 ‘사랑의 교회’도 이런 전통에 갇혀(?)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그렇다는 것뿐이지 제가 그런 걸 재단할 자격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이런 전통에 젖은 분들의 신앙이 일정한 흐름을 이루게 되면 그것이 바로 신앙적 패러다임이 되는 겁니다. 거듭남의 체험을 강조하고, 구원의 확신을 강조하는 거지요. 어떻게 보면 아주 복고적이고 낭만적인 신앙이지요. 그런 분들은 지난날 예수 영접한 바로 그 감격으로 평생 신앙생활을 하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게 옳은 거 아니냐, 가장 중요한 거 아니냐, 하고 피스 님은 당연하게 생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답니다. 제가 지난 수년간 설교비평을 하면서 간접적으로 접한 설교자들의 가장 큰 전통은 청교도 신앙이더군요. 한국에서는 청교도가 거의 초기 사도들과 버금갈 정도의 권위를 확보하고 있어요. 그게 저로서는 어처구니없어 보인다는 겁니다. 유럽의 18,19세기에 일시적으로 필요로 했던,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볼 때 아주 일시적이었던 청교도 영성은 그렇게 건강한 게 아니랍니다.
이 문제는 그만 두구요. 거듭남의 문제로 다시 돌아갑니다. 피스 님이 동의하든 않든, 그 문제가 신학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요, 그것은 신학만이 아니라 성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피스 님은 거듭남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니고데모의 이야기와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바울의 진술이 그것인가요? 제 기억으로는 성서가 거듭남에 대해서 그렇게 많이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은 실제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성서와 신학과 기독교 역사는 거듭남이 아니라 거듭남의 증거라 할 수 있는 세례의 신비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리고 세례의 반복이라 할 성만찬을 말합니다. 이런 점에서 거듭남을 말하는 것보다는 세례와 성만찬을 말하는 게 훨씬 성서적이고, 기독교 역사적이고, 신학적이랍니다. 피스 님은 거듭난 순간과 그런 확신을 어떻게라도 확인할 수 있지 않느냐, 하고 말하셨어요. 정말 그럴까요? 그게 정말 그렇게 확실한 걸까요? 우리의 확신이라는 게 가장 현실적인 것(reality)일까요?
그런 경험은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의 감정’에 가깝습니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서 사랑을 경험한 어느 순간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곧 사랑 자체는 아니겠지요. 고운정미운정 다 드는, 늙은이가 되어서도 서로 의지하는 부부 사이에 참된 사람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요? 구원의 확신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랍니다. 그것보다는 구원의 현실(reality of ‘soteria')이 무엇인지를 아는 게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인간의 심리이지만 구원의 ‘현실’은 하나님의 행위이거든요.
오늘은 이만 하겠습니다. 아마 다비아 어딘가를 찾아보면 이런 주제로 쓴 글들이 숨어 있을 겁니다. 위의 제 글이 피스 님에게 도움이 될지 오히려 더 혼란스럽게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저로서는 한국의 가장 건전하고 지성적인 평신도에게, 그러나 일종의 신앙적 편식에 기울어진 분에게 나름으로 기독교의 중심을 설명하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신앙적 편식이라는 표현에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이건 한국 기독교인들의 숙명입니다. 만약 그렇게라도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다면 저는 아무 말 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뒤늦게 신앙적 패러다임을 완전히 뜯어고쳐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완전한 믿음은 없으니까요.
제가 글을 다 써놓고 다시 읽어보니 정확하지 못한 표현들이 눈에 뜨이네요. 그래도 내버려두겠습니다. 특히 피스 님이 생각한 거듭난 생명과 구원의 확신 같은 개념이 바울, 어거스틴, 루터의 그것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위의 내 이야기 중에서 상당 부분을 취소하거나 고쳐야겠습니다. 제가 내 글을 그냥 내버려두는 이유는 피스 님의 그 생각이 위 신앙의 영웅들에게 일어났던 것과는 다른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런지를 여기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하기는 어렵겠네요. 제 글의 오류를 변명하는 차원에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더 반복하겠습니다. 기독교 신학과 성서와 교회 역사에서 거듭남의 삶과 구원의 확신은 핵심적인 주제가 아닙니다.
피스 님이 지난 몇 달간 다비아의 글들을 읽어주시고, 저의 설교집과 판넨베르크의 설교집을 읽어주셨다니 뭐라 고마운 말씀을 드려야할지요. 앞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이 피스 님이 가시는 영적인 길에 늘 동행하시기를...

2008년 9월8일(월)
진량 대구성서아데미 연구실에서
정용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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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9.26 22:15:39

편식하면 건강에 안 좋다고 늘 아이들에게 말하면서도
참 편식을 많이 하는 제 자신을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어휘 중 하나가 "미래완료" 입니다. ㅎㅎ
오늘 새벽부터 비가 많이 오네요. 그러면 정말 가을이 되려나 봅니다.
좋은 밤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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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다미아니

2008.10.30 21:31:15

지금에서야 읽었습니다.

제 마음 속에서 정리가 안되던 생각들을 목사님께서 명쾌하게 잘 정리해 주셨네요.
늘 그렇지만,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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