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해석(2)

조회 수 3495 추천 수 1 2008.10.11 21:44:27
성서와 해석(2)

마틴 루터의 ‘오직 성서!’라는 명제는 교황 절대주의에 대한 반작용이지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성서 문자주의에 대한 신학적 토대가 결코 아니다. 루터가 이미 야고보를 지푸라기 같은 성서라고 언급했다는 사실에 루터의 성서관이 그렇게 일방적이지 않다는 게 분명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야고보서가 비록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이 별로 중요하게 다루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지푸라기 같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이다.
흔하게 말하듯이 로마 가톨릭은 교황이라는 절대주의가 이에 반해 개신교는 종이(성서)라는 절대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성서는 물론 절대적이다. 다만 문자로서가 아니라 그 안에 구원이 계시되었다는 그 사실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서를 절대적인 말씀으로 고수하려면 성서 안에서 계시 사건을 읽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계시는 해석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알려진다. 그렇다. 성서해석이 문제이다. 설교자는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지 그것을 규범화하는 윤리 선생이 아니다.
도대체 해석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을까? 지금 모든 설교자들이 스스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지 모르지만 그런 해석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들이 조훈현과 이창호의 대국 기보를 이해하지 못하듯, 이해한다고 해봐야 그저 흉내만 낼 뿐이듯 나를 포함한 설교자들은 대개 성서를 해석하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거나 표절만 할 뿐이다.
이런 사태에 놓여 있는 결정적인 문제는 우리가 주관주의적 사유방식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유하는 자기(코기토)가 절대적인 기준으로 작동하는 사람은 그런 인간의 주관적 사유 행위를 초월해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힘을 포착할 수 없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늘 자기라는 주관에 근거해서 남을 보고 있다는 말이다. 가부장적 패러다임에 묶여 있는 사람은 그것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없다. 이성애를 절대화한 사람은 동성애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반공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은 북한을 적대적으로만 바라본다. 성서를 해석할 때도 거의 이런 자기 주관성이 작용하기 때문에 성서는 우리에게서 소외당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성서를 통한 계시는 망각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의 절대적인 해석방법론은 아예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걸 찾으려는 사람은 결국 실패할 것이다. 어떻게 숲 속에 하나의 길만 있겠는가? 중요한 것은 자기가 그 길을 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계시의 길을 자기가 찾아야 하는 거지 다른 사람이 대신 보여줄 수는 없다.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는 우선 주관주의적 사유방식을 접어야 한다. 성령은 늘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에 따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게 일단 성서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초보인 셈이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서 주관주의를 극복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 말이 틀릴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주관주의를 극복한다는 표현이 틀릴 수는 있어도 계시의 초월성으로부터 인식과 사유와 해석이 발생한다는 것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예컨대 우리 딸들이  내가 말하는 어떤 세계를 이해하려면 자기들이 현재 갖고 있는 기존의 주관적 사유 틀을 포기해야만 한다. 만화책 보기만 즐겨하면서, ‘어머나’ 같은 노래에 심취하면서 종말론적 구원에 대해서, 혹은 소로우의 자연주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작은 일상에 어떤 생명이 힘이 개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하나님과 그의 통치와 예수의 재림을 말한다는 건 착각이며, 위선이다. 우리 딸들은 일단 들어야 한다. 듣되 먼저의 것을 끊임없이 깨야만 한다. 그 껍질을 깨지 않고 어떻게 새로운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이게 바로 바리새인과 예수님 사이에 놓여 있었던 거대한 심연이었다.
이게 도대체 성서 해석과 무슨 상관이 있는 말일까? 우리는 죽었다 깨도 성서의 계시를 완벽하게 해명할 수 없다. 다만 들을 수 있는 귀를 깨끗하게 하는 것만 필요하고, 그게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이다. 귀를 청소한 다음에 들리는 것은 듣고 그래도 들리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내버려 두어야 한다. 모든 음악가 모든 소리를 다 잡아낼 수는 없지 않는가?
성서가 말을 할 때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는 준비야말로 해석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혁명적인 변화가 없으면 이런 귀청소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토마스 쿤이 패러다임 쉬프트는 혁명이거나 아니면 불가능하다고 했다. 설교자가 어떻게 자기를 이렇게 혁명적으로 비워나갈 수 있을까? 오늘 내가 그걸 까지 말할 수는 없다. 나도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건 노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은 약장사가 아니라 해석자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더구나 해석이라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서 좀더 숙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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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10.12 00:21:41

무지막지하게 어렵게 번역한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더듬더듬 읽으면서
그가 말하는 패러다임 쉬프트와 혁명이
목사님이 말하는 신앙의 그것과
너무나 닮았다는 생각을 줄곳 했었습니다
기존 패러다임으로 풀 수 없는 이상 현상의 출현으로 인한
비축적적인 방법, 즉 혁명적 방법으로
과학이 변화한다는 해석은
'회개하라'의 메타노이아가
연상 될 수 밖에 없었구요
정상과학(기존과학)을 퍼즐로 비유하여
확실한 해답의 존재를 이미 알고
그 틀 안에서 규칙을 터득한다는 해석 앞에선
교회 강단에서, 도를 다 터득한 양
하나님을 다 알고 있는 양
설교하는 행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과학혁명의 구조]는
각계에 영향을 미친 세계관으로 인정 받았나 봅니다

이왕, 토마스 쿤 얘기로 시작했으니
그의 말을 신앙에 접목하여 끝을 맺어 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좀더
"알고 싶어하는 것을 향한 진화"대신
우리가 하나님을 이미
"알고 있다는 는 것으로 부터의 진화"가 먼저 이루어 져야
진정한 혁명이, 패러다임 쉬프트가 이루어 지는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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