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찬식

조회 수 4078 추천 수 3 2008.10.11 21:54:02
성찬식

샘터 교회가 시작된 지 벌써 2년 반이 지났다. 처음에 나, 집사람, 큰 딸, 권 선생, 이렇게 4명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 동안 몇 분들이 함께 참여했다가 이런저런 사정으로 흩어졌고, 지금은 작은 딸을 비롯해서 몇 분이 동참해서 8명이 예배드린다.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살배기 예은이와 네 달 된 예희까지 10명이다. 아주 작은 공동체지만 대구성서아카데미 연구실과 예배당을 겸해서 쓰고 있는 작은 아파트 거실에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그렇게 썰렁하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숫자는 적어도 예배 준비는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꼼꼼하게 해야 한다. 특히 설교 준비는 토요일 하루가 필요하다. 그냥 설교 요약문만 준비하고 대충 대화하는 식으로 설교를 끌어간다면 한 두 시간이면 준비가 되겠지만 자칫 몇 명 안 된다는 핑계로 설교에 소홀해지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을 채찍질한다는 의미로 설교문 자체를 완벽하게 작성하다보니 시간이 적잖이 들어간다. 평균 6시간 정도 소요된다. 내 경험으로 미루어보면 좀 더 성실하게 준비하려면 집중적으로 그 두 배 정도는 걸리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런 데 마냥 시간을 쓸 수도 없는 일이니 이런 정도로 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지금의 예배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교회를 시작하고 아직 한 번도 성찬식을 거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현재 예배를 드리고 있는 거실이 너무 협소해서 성찬식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기도 하고, 적은 인원수도 장애가 된다. 지난 2년여 동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하고 생각이 많았다. 시간이 가면 어떤 방법이 나오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만 하면서 지금까지 이렇게 지냈다. 그렇지만 아직 구체적인 대안은 없다. 물론 어떻게 해서라도 강행하면 할 수는 있겠지만 좀더 자연스러운 성찬식이 구상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내가 보기에 성찬식은 예배에 빠질 수 없는 순서다. 로마 가톨릭 교회처럼 화체설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성찬식이 없으면 예배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는 성찬식을 매우 중요한 예전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은 많은 개신교회에서도 성찬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옛날에는 일 년에 거의 형식으로 두세 번으로 끝났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한 달에 한번 정도는 성찬식을 곁들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은 것 같다.
왜 성찬식이 중요할까? 이 자리에서 성찬신학을 논할 생각은 없다. 기본적인 것만 한두 가지 생각해보자. 전통적인 의미에서 설교가 들리는 말씀이라면 성찬식은 보이는 말씀이다. 포도주와 빵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인가? 물질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인가? 기독교는 물질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어떤 부분에서는 그런 흔적이 보이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독교는 이런 이원론을 극복한다. 역사적 예수를 영원한 하나님으로 인식하고 믿는 기독론도 따지고 보면 역시 기본적으로는 땅과 하늘의 일치라는 점에서 성속, 영육 이원론의 극복이다.
포도주와 빵이 하나님의 보이는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이 무엇인지 우선 깊이 생각해야 한다. 기독교에서 말씀(언어)은 존재론적인 의미가 있다. 언어는 하나님의 존재론이다. 하나님은 언어로 존재한다. 그래서 요한은 태초에 이미 언어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 언어가 세상을 창조했다. 언어가 없었다면 창조도 없다는 말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언어로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기자의 생각에 닿아 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은 말씀, 즉 언어로 존재한다. 언어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언어이다. 사랑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랑인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언어라는 게 말이 될까? 오늘의 주제는 성찬식이니까 이런 이야기는 너무 길게 끌지 말자.
앞의 이야기와 연결해본다면 포도주와 빵이 보이는 말씀이라는 말은 곧 포도주와 빵이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 된다. 놀랍지 않은가? 포도주와 빵이 하나님이라니! 이런 말을 듣고 신성모독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신학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이다. 아니 기독교를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이다. 이미 전통적인 성찬식에서 포도주와 빵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이해되었다. 그것이 화체설이든, 임재설이든, 기념설, 상징설이든 포도주와 빵이라는 물질이 곧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되었다.
물질이 어떻게 예수의 몸이 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이 될 수 있을까? 여기서 핵심은 물질의 성화다. 포도주와 빵이 거룩한 물질로 이해되고 해석되고 기념되고 받아들여진다. 성찬식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物)의 영성화를 발견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면서 늘 예수의 십자가를 생각하고 우는 경우가 있다. 그게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성찬식의 반쪽 이해다. 포도주와 빵이라는 우리의 일상 먹을거리가 곧 거룩하다는 의미가 그 안에 내재해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사물의 깊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민들레, 개구리, 산, 강, 돌 ... 이 사물이 어떤 두께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의 창조물인데도 우리는 단순한 사물로만 바라본다. 포도주와 빵이 예수의 몸과 피이듯이 이 사물이 어느 순간에 우리 눈에 하나님의 몸으로 비쳐질 것이다.
성찬식은 또 다른 의미가 깊다. 형제애의 회복이 그것이다. 같은 포도주 잔에서 함께 마시는 사람들, 하나의 빵을 나누어 먹는 사람들은 형제다. 모두가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되는, 이를 위해서 적절하게 분배가 이루어지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형제(자매)들이다. 이런 형제애는 교회의 성찬식으로부터 시작해서 온 세상으로 퍼져야 할 것이다. 이런 형제됨의 공동식사가 교회만의 은밀한 종교의식으로 머물고 만다면 온 인류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축소된다. 오늘 성찬식을 나누는 한국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형제애를 가슴에 새기고 있을까.
성찬식을 곁들이지 못한 샘터교회 예배는 늘 아쉽다.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모아서 예배에 참여한다면 부족한 게 채워지지 않을까 기대한다. 우리 모두에게 물과 영의 일치, 그리고 형제애의 회복이 함께 하기를 빈다.  


profile

[레벨:8]김재남

2008.10.12 02:01:10

물의 영성화.
언제부턴가 얼굴을 스치는 공기와
눈에 비치는 노을의 회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가을밤 잠자리에서 듣는 풀벌레 소리가 남다른 고요함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자연은 생명의 신비를 안겨줍니다.
늦은 밤, 도시는 시골과 달리 풀벌레 소리가 들리진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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