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마술이다

조회 수 3733 추천 수 2 2008.10.11 22:15:50
세상은 마술이다

마술이 우리를 사로잡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데에 있다. 마술사의 손 안에 들어 있는 카드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가 다시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된다. 마술사의 입에서 오색 테이프가 끝없이 나오기도 하고, 모자 안에서 비둘기가 튀어나온다. 톱으로 사람을 자르는 데도 죽지 않고, 공중부양도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이처럼 마술은 우리가 일상에서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림으로써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들이는 놀이다.
물론 그것은 속임수다. 손동작의 속임수일 때도 있고, 어떤 과학적인 장치를 통한 속임수일 때도 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 그것은 속임수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술사에게 고도의 손기술과 과학적인 마인드가 따라주지 않으면 마술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마술은 오히려 일종의 예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중들을 신비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예술 말이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통해서 사람들이 경험하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이 결국 일상을 뛰어넘는 신비로움이듯이 마술도 역시 청중들의 일상적 경험 너머의 세계를 열어준다는 점에서 분명히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 세계 자체가 바로 그런 마술적인 것들을 담고 있다. 이 세계가 곧 모차르트의 음악이며, 이 세계가 곧 마술 행위라고도 볼 수 있다. 위대한 음악작품이 담고 있는 그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마술사가 청중들에게 제공하는 그 놀라움이, 아니 그것보다 더한 아름다움과 놀라움이 이 세계의 근본적인 속성이며, 본질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모두 놓치고 살아간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이 세계의 부분, 또는 표면적인 것만 보거나 이 세계를 우리가 다루어도 될 어떤 것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가 마술이라는 사실을 보려면 우리에게 조금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하양에도 몇 개의 다리가 있다. 내가 교회에서 집을 가려면 반드시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 다리는 무언가? 그게 혹시 마술사의 검은 바구니에서 나온 어떤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이 어떻게 가능한지 따라가 보자. 처음부터 하양천을 가로지는 다리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채 개천을 건너거나 아니면 몇 개의 돌을 딛고서 건너 다녔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어떤 사람이 다리를 생각했을 것이다. 이쪽 언덕에서 저쪽 언덕까지 무엇을 걸쳐놓으면 사람들이 바지를 버리지 않고 건널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느 날 다리는 놓였다. 그 이전까지 다리라는 개념자체가 사람들에게 없었다. 없었던 개념이 (물론 실용적인 요구에 따라서) 생겼으며, 그 개념에 의해서 실제로 다리가 세상에 나타났다. 없었던 사물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을 ‘마술’ 말고 그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마 어떤 사람은 그 따위가 무슨 마술인가, 다리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최초로 다리라는 생각이 이 세상에 등장한 그 순간을 생각해보라. 그건 기적이며, 신비이며, 마술이다. 무(無)로부터의 유(有)는 분명히 마술이다.
이제 다리는 그곳에 걸쳐 있다. 그 다리는 무슨 역할을 할까? 사람들이 그 위로 편리하게 오간다. 지금까지 그 하양교 위로 건너다닌 사람의 숫자를 세어본다면 하루에도 수천 명이 되니까 천문학적 숫자일 것이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위대한 음악가가 되었을 수도, 마더 테레사 같은 봉사자가 되었을 수도, 또는 과학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일개 시골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였지만 그 다리로 인해서 인류의 역사가 달라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다리는 온갖 종류의 신비한 물건을 쏟아내는 마술사의 마술 상자와 같다고 보아야 한다. (다리에 대한 이야기는 하이데거에게 도움을 받았다. 그가 위의 설명과 똑같은 뜻으로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만든 다리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이 끝없이 많은데, 자연의 생명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면 설명과 인식 자체를 포기해야 할 정도이다. 사람들은 이 세상을 늘 죽은 것으로, 또는 자연과학의 규칙 안에 놓여 있는 것으로만 바라본다. 그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도, 그것처럼 인간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나타내는 일도 없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눈’에 대해서만 잠깐 보자. 물기를 먹은 구름은 일정한 조건을 만나면 땅으로 내려온다. 날씨가 따뜻하면 비로, 추우면 눈으로 떨어진다. 기상학자들은 그런 현상을 연구해서 사람들의 삶을 편리하게 돕고 있다. 그게 우리가 눈에 대해서 생각할 모든 것인가? 도대체 이 지구라는 혹성은 왜 구름을 만들어내게 되었을까? 구름이 눈으로 내려오게 되는 그 근원에 무슨 힘들이 작용하게 되었을까? 비나 눈이 아니라 그냥 먹구름이 땅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을 텐데 지구는 비와 눈을 이 세상에 나오게 했다. 이는 곧 기상학자들이 계산해 내는 그런 수치와 원리를 근원적으로 가능하게 한 그 원래의 힘이 여기에 작용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계량화할 수 없는 그런 힘에 의해서 우리 앞에 나타난 눈은 분명히 마술사의 능력과 같다.
내 눈에는 이 세상 전체가 마술 상자처럼 보인다. 아침에 눈을 뜰 때 여전히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내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서 아침 요기로 먹는 빵과 커피가 곧 마술사에 의해서 주어진 먹거리이다. 아침 햇살, 맑은 공기, 장사꾼들의 호객행위, 글쓰기 등등, 이 모든 것들이 마술 상자 안에서 벌어지는 진기한 사건들처럼 보인다. 아주 짧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는 내가 이런 것들의 변화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지만 조금 긴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면 흡사 마술사 앞에서 혀를 내두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황홀감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바로 모든 존재의 신비 앞에서 이런 황홀한 기분에 몰두하는 건 아닐까? 조금 술에 취한 것 같은 그런 기분 말이다. 그래서 성서는 성령의 충만을 술취함에 비유하고 있다. 혹시 그것은 노장의 현묘(玄妙) 비슷한 건 아닐까? 예수의 부활은 이런 생명의 신비가 현실성으로 변화하는 게 아닐까? 마술 상자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 앞에 무슨 생명의 현실들이 등장할 것인가? 궁금하지 않으신지....

[레벨:2]버클리

2008.12.02 04:55:49

목사님께서는 없음에서 있음으로의 창조를 말씀하시면서 마술에 비유하신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이 세계가 창조 되기 이전은 분명히 없음이며 창조된 이후는 있음이지요. 사물의 관점에서 보면 진정으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세계와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형성될 가능성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없음이 아니라 꽉 들어차 있는 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없는 듯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꽉 들어차 있다. 이러하기 때문에 없음이라는 것보다는 虛라는 것을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없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고 비어 있지만 그 비어 있음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가능성이기 때문에 비어 있는 것이다. 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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