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강화, 혹은 심화

조회 수 4471 추천 수 3 2008.10.13 23:01:35
믿음의 강화, 혹은 심화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구원이 일어난다는 기독교의 도그마는 알 만한 사람은 대개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다. 그렇지만 그 실체까지 충분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실정이다. 대개는 로마 가톨릭의 업적주의와의 대결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던 마틴 루터가 <오직 은총>과 더불어 <오직 믿음>을 강조했다는 그 배경 안에서만 이해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오직 믿음>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곧 이성을 무시하기 위한 도구로 이 용어가 사용된다는 점이다. 믿음을 통한 구원이라는 기독교의 도그마는 단지 로마 가톨릭의 업적신앙과 싸우기 위한 방편도 아니고 계몽주의적 이성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그것은 행위와 이성까지 포함하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해석학적 토대이다. 즉 믿음을 통한 구원을 강조한다고 해서 우리가 행위와 이성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행위와 이성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뜻도 아니다. 행위, 이성, 믿음은 이렇게 구원을 얻기 위해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니라 절대적인 사건이라 할 구원에 대한 다로 다른 차원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 개신교의 입장에서는 행위와 이성이 믿음의 경지에 이르는 중간 과정, 또는 믿음의 신비에 이르는 일종의 인식론적 훈련이라고 말할 수 있다. 행위와 이성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하게 살아갈 수 있는 수단들이다. 도덕적 행위와 합리적 이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복지사회와 민주사회, 노동의 해방, 생태학, 물리학, 예술 등등, 인간과 사회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바로 행위와 이성을 토대로 한다.
그러나 우리가 절대적인 행위와 이성에 충실하게 살아가며 어느 정도 그런 세계를 실현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절대적인 생명의 세계가 완성되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늘 주관적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행위와 이성은 숙명적으로 절대적인 세계를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계내존재>인 인간은 근본적으로 세계 자체를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은 끊임없이 표상하고 계량할 수는 있지만 그 근원을 밝힐 수 없다. 근원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이 숙명 앞에서 인간은 자기의 행위와 이성에 근거해서 궁극적인 것을 건설할 수 없다.
좀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 생명공학 연구소에 실험용 흰쥐들이 있다고 하자. 그 쥐들은 인간이 만들어준 일정한 삶의 조건 아래서 살아간다. 그 쥐들의 운명은 그런 조건을 만든 연구원에 의해서 달라질 뿐이다. 그 쥐들이 아무리 자기의 머리를 굴려서 최선으로 행동하거나 이성적으로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근원적으로는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피조된 인간은 실험용 흰쥐와 비교한 일을 그렇게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미 성서 기자들은 인간을 토기장이가 만든 질그릇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더 궁극적으로 성서는 인간을 피조물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 핵심은 ‘피조’ 사건에 있다. 피조된 존재인 인간은 자기의 행위와 이성으로 절대적인 세계를 이루어낼 수 없다는 게 성서의 창조설화가 말하려는 핵심이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는 그 절대적인 사건이라 할 구원을 우리 안에서가 아니라우리 밖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흡사 흰쥐들이 인간 연구원의 손길을 기다려야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세계를 해석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일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믿음>이 그것이다. 이 믿음은 앞에서 말한 대로 인간의 행위와 이성을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어떤 사건과 소통될 수 있는 우리 인간의 유일한 태도이다. 우리 밖에서 구원이 내려온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사건에 대한 희망과 기다림인데, 이것이 곧 믿음이다. 이런 점에서 루터가 <오직 믿음>이라고 주장한 것은 올바른 가르침이다. 교회 안에서 이 믿음 이외의 것들은 부수적인 것에 불과하다.
얼마 전 나는 “믿음을 무시하라”는 주장을 편적이 있다. 그 주장은 믿음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믿음의 왜곡에 대한 경계였다. 과연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믿음을 ‘강화’의 차원이지 ‘심화’의 차원이라는 것을 간과한다. 여기서 믿음의 강화는 인간론에 해당되는 문제이고, 심화는 신론에 해당되는 문제라는 점을 먼저 밝혀둔다.
교회생활이라는 것이 거의 이런 믿음의 강화에 집중되어 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강화에 불과한 경우가 태반이다. 예배참석, 철야기도회, 헌금, 봉사, 성서공부와 성서쓰기 등등, 모든 교회 행위들이 믿음의 강화에 머문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만나는 경험보다는 자기의 주관적인 종교경험, 혹은 자신의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에 머물러 있다는 뜻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 흡사 자동차 외판원들이 극기 훈련을 하듯이 또는 대학생들이 엠티를 하듯이 자신의 심리와 감정과 결단력을 강화한다. 소위 “경배와 찬양” 유의 열린예배도 이런 수준의 종교행위이다.
우리는 이런 강화를 믿음의 바람직한 차원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믿음의 토대는 여전히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영성이 끊임없이 심화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바리새인 같은 의도적인 경건이나 도덕성을 훈련하지 않는다. 아니 훈련을 하더라도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그런 것을 인간의 결단력에 의해서 달라질 뿐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하나님, 그의 통치, 생명의 신비로 들어가는 일에 집중하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신앙의 강화와 심화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이걸 억지로 납득시킬 수는 없다. 부부가 사랑한다는 사건을 이벤트로만 확인하려는 사람에게 상대방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위대한 사랑의 근거라는 자실을 납득시킬 수는 없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사실,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 나의 이웃과 모든 생명체들이 지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이 안에 하나님의 영이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 안으로 깊이 들어가는 일 이외에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이런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혁명적인 사유의 변화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이런 혁명적 사유의 깊이로 들어가는 것이 곧 영성이다. 오늘 우리는 인간학인 믿음의 강화로 가는지, 아니면 신론인 믿음의 심화로 가는지 철저하게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다.

[레벨:12]들꽃처럼

2008.10.14 03:15:47

인문주의적 소양이 부족해서인지
제 말로 풀어내는 것이 여간 쉽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글은 물론이고 여기 다비아에 계신 모든분들의 글이 그렇습니다.

다비아에 오면 흥분되고 그리고 줏어 담기에 바빠서 어쩔줄 모르겠는데...
차근차근 배워가야겠죠.....

이곳은 저에게 보물창고입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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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8.10.14 09:35:47

목사님,
이 글을 보니 마음이 시원합니다.
코 끝이 찡해지는군요.
너무 명쾌합니다.
목사님의 논리적인 글에
저는 감성적 표현이 앞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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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0.14 15:03:51

들꽃 님,
다비아를 좋게 봐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오직 한 쪽을 향해서 기울어져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
그분에게 가까이 이르는 이 길에
서로 친구가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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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10.14 15:08:30

유니스 님,
그냥 손 따라서 쓴 글이라서
빈 구석이 많이 보일 겁니다.
그래도 유니스 님의 영혼에 약간의 공명이 있었다는 거
이런 부분에 대한 갈증이 심하셨다는 뜻이에요.
사람은 영적인 만족이 없으면
결코 참된 만족에 이를 수 없는 존재인데,
이 영적 만족이 바로 강화가 아니라 심화의 차원에서 가능한 거지요.
남의 우물에 물을 길러가서 서로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 집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거라고나 할는지요.
인생을 어쩔 수 없이 영적 여행인데,
큰 진보가 있기를 바랍니다.
눈이 부시게 좋은 계절이군요.

[레벨:0]유종호

2008.10.16 00:22:27

저의 일차원적 사고에서는 부정하는 것과 초월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잘 이해되지 않네요... 어떤 것이 궁국적인 무엇인가를 이루지 못하며, 다른 어떤것이 필요하다면 전것을 부정하는 것과 전것을 초월하는 것이 어떤 차이를 가질까요... 저역시도 믿음에 있어서 이성의 초월이라는 말에 호감을 가지지만, 결과적으로 그 초월이라는 것이 부정이라는 결과를 내표하고 있지 않으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행위와 성이 궁국적이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궁국적인 것(구원)에 대해서 그것을 초월한다는 것은 곧 그것을 부정하는 것으로 연결되어 지는거 같습니다.
혹시 목사님이 말씀하신 초월이라는것, 부정하지 않는다는것이 궁국적이지 않은 영역에 대한 가치를 이야기 하시는 지요... 글만 읽다가 한번 적어 봅니다...

[레벨:5]루이스

2012.07.09 16:42:32

인간적인 관점을 가지고 본다면 효과가 금방 나타나는 믿음의 강화쪽에 매력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칭찬과 인정이 즉각 오게 되니까요

그 점을 교회안팎에서 부추기는 면도 더러 있는것 같습니다

결국 강화든 심화든 동기는 자기만족일텐데요

그 만족의 동력의 주체가 누구인가가 문제인것 같습니다

자신인가 삼위하나님이신가

심화에서 강화로 간다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될 때까지 서로 기다리며 격려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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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2.07.09 23:54:29

루이스 님,

C.S.  루이스에서 따온 닉네임인가요?

반갑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다비아 글 읽고

대글 다시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다비아에 생기가 도는군요.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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