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우스 딕시트!

조회 수 4148 추천 수 1 2008.08.26 22:42:28
데우스 딕시트!

Deus dixit!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Dominus dixit! 주님이 말씀하신다! 칼 바르트의 이 명제는 우리가 두고두고 곰삭혀 보아야 할 아포리즘이다. 모더니즘 이후 인간의 가능성과 종교성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설명해보려 했던 19세기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을 향해서 바르트는 인간의 말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충고한다. 그래서 요즘도 수많은 개신교회의 설교자들이 자신의 설교행위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강변한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을까?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쉴라이에르마허, 리츨, 또는 좀 후기에 속한 불트만 같은 신학자들을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경멸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실제로는 거의 이들의 신앙적 노선을 좇고 있다는 사실이다. 쉴라이에르마허의 ‘절대의존 감정’이 오늘 한국교회의 설교 안에서 얼마나 강력한 무기로 작동되는지 알 만한 사람들을 모두 알고 있다. 교회에서 부르는 복음 찬송부터 시작해서 소위 ‘열린예배’로 일컬어지는 예배 형식들이 한결같이 인간의 감정에 호소하는 요소들이다. 설교하는 30분 동안 수십 번, 수백 번 남발되고 있는 ‘믿습니까?’라거나 ‘축복합니다.’는 표현들은 청중들의 종교적 감정을 자극하기 위한 도구들이다. 리츨이 강조하는 ‘윤리’ 문제가 조금 교양 있는 세련된 도시 중산층 교회의 전유물이 되고 있다. 윤리를 기독교 신앙의 근본으로 몰아가는 태도는 기독교의 구원을 여전히 인간으로부터 발생하는 어떤 성취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낙관론적 인간이해와 같은 지평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불트만의 인간 실존의 문제도 교묘한 방식으로 교회 안에서 왜곡되어 있다.
기독교 신앙을 인간이 일상에서 만나는 많은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다루는 설교가 바로 그런 왜곡의 전형이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그런 실존을 여러 방식으로 자극하는 설교를 우리는 자주 듣는다. 내가 위에서 언급한 종교 감정, 윤리, 실존이 무조건 문제라는 말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감정적인 요소가 있고, 윤리적인 책임이 있으며, 더구나 실존의 깊이를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요소들은 기독교 신앙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할 삶의 모습들이지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속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앙이 감정적인 차원에서, 윤리적인 차원에서, 실존적인 차원에서 풍부하게 표현될 수 있다면 이런 요소들은 매우 중요하겠지만 오히려 이런 요소들이 신앙의 본질을 해체하거나 대체하면 기독교 신앙은 위기에 처한다.
여기서 모든 것을 종속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신앙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글의 제목인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성서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게 일단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충분한 대답은 아니다. 성서는, 바르트 표현을 따른다면, 기록된 말씀일 뿐이지 계시 자체는 결코 아니기 때문에 성서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는 ‘성서론’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이런 정도로 접어두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로 좀더 들어가자.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는 곧 인간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순간에도 침묵을 지키지 못한다. 더 나가서 자기가 말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호도한다. 필자가 <기독교사상> 7월호에서 설교비평의 대상으로 삼은 연세중앙교회 윤 아무개 목사는 설교할 때마다 자기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고 강변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설교는 자신의 욕망을 청중들에게 강요하는 것에 불과했는데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의 말을 혼동하고 있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대답은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다. 그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누군가? 우리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런 주제는 신학 전반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간단하게 대답하기 어렵다. 성서론, 계시론, 인간론, 신론, 종말론, 더 나가서는 창조론과의 연관성 속에서 매우 다각도로 이 주제에 접근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철학적 토대인 존재론과 인식론은 필수적이다. 신학적이라는 핑계로 이 주제를 얼버무리고 넘어갈 수는 없으니까 상식적인 차원에서라도 몇 마디 정리해보자.
우리가 성서의 하나님을 ‘역사적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역사적으로 계시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말하는 그 계시가 곧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자기를 계시하는 그 하나님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명제의 핵심이다. 여기서 역사적 계시라는 말도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다. 좀 거칠게 요약한다면, 역사의 보편적 지평에 근거해서 드러나는 진리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서마저 이런 역사의 보편적 지평에 근거해서 늘 새롭게 해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예컨대 바울이 로마서에서 동성애자들을 책망했다고 해서 오늘 그 말씀을 읽는 우리가 이 시대의 동성애자들을 책망한다면 그는 결코 역사의 보편적 지평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글이 자꾸 현학적으로 꼬이는 것 같으니까 이런 정도로 내 설명을 정리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이 명제의 가장 핵심적인 논지로 들어가 보자.
그것은 위에서 지나가듯이 한번 지적한 것인데,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왜 우리는 자꾸 공연한 말로 신자들의 마음을 흩트려 놓는가? 왜 우리는 무언가를 자꾸 일을 꾸밈으로써 우리 영혼의 호수에 풍파를 일으키는가? 좀 인내심을 갖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우선적인 우리의 태도이다. 교회 행사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모임의 숫자도 파격적으로 줄이고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데 진력해야 한다.
아마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주 모여서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교회 행사를 많이 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우리의 모임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데 집중되고 있는지 반성해볼 일이다. 명분으로는 예배, 기도회, 성경공부, 선교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감정, 인간의 윤리, 인간의 실존만 난무한 건 아닐는지.
이제 여름이 온다. 전국 교회가 이번 여름에도 온갖 행사를 치르느라 몸살을 앓을 것이다. 담임 목사도 힘들겠지만 부 목사들과 전도사들은 이런 치다꺼리(?)를 하느라고 자신의 영혼을 돌볼 틈이 없을 것이다. 이런 게 모두 믿음의 일이라고 강변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지만, 다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좀더 실질적으로, 좀더 심층적으로 생각해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레벨:7]2C120

2013.03.19 10:0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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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신학 단상 본문에 의하면,
<성서는, 바르트 표현을 따른다면, 기록된 말씀일 뿐이지
계시 자체는 결코 아니기 때문에 성서만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라고 합니다.
 
본문 말씀대로,
성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성서는 기록된 말씀일 뿐이지 계시 자체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기 때문”인 거라면, 그러면
계시 자체’(?)는/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라는 말씀/주장인 걸까요?
그런 말씀/주장이 타당한 얘기가 될 수 있겠는지요?
또, 그런 말씀/주장의 성경적 근거란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요?
 
아울러,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이 명제의 가장 핵심적인 논지>라고 하는 것이
본문 말씀처럼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인간은 침묵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 정도의
표피적, 주변적 차원에 있는 진술에 국한되는 걸까요?
한국 교단이 워낙 비정상적이고 표피적이다 보니까 그런 정도 주변적 진술이
핵심’ 내용인 걸로 제시되고 통할 수도 있는 건지 어쩐 건지.... 그것도 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성경적 의미에서의 '계시'에 대해 정 목사님의 이 본문 내용과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는 언급이
다른 '신학 단상' 본문 내용에도 있어 흥미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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