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과 비생명

조회 수 3483 추천 수 2 2008.07.29 23:09:53
생명과 비생명

기독교 신앙은 창조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종말에 이르는 우주론적 역사를 예수의 부활 사건에 근거해서 해석하는 삶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키워드, 즉 창조와 종말과 부활의 공통점은 생명이다. 생명의 시작이 부활로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런 기독교 신앙의 패러다임을 실질적으로 이해하려면 결국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이런 질문은 생명의 정체를 우리가 아직 모른다는 뜻이다.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생명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조금 더 신앙적으로는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것이 바로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대답들은 생명 전체가 아니라 부분에 해당될 뿐이다. 이런 부분적인 대답의 설득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생명 전체, 또는 생명 현실에 연루된 사태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그 사태의 가장 명백한 분야는 크게 말해서 생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 현상에 관한 연구를 말한다. 21세기에는 아마 유전공학을 필두로 해서 이런 생물학 분야가 비약적인 발전을 보일 것이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생명에 조금 더 접근하게 될지 모르겠다. 우리가 상식적인 차원에서만 보더라도 지구에서 벌어지는 생명 현상은 놀랍도록 다양하다. 식물을 제외하고 동물만 보더라도 단세포 생명체로부터 고등동물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생명체가 살고 있다. 서로 다르기는 하지만 생명이라고 할 때 공동되는 점이 몇 개 있다. 하나는 DNA를 기초로 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복제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나의 관심은 여기서 자기 복제이다. 앞으로 지능과 감성을 소유한 로봇이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그 한계는 자기 복제에 놓일 것이다. 앞으로 자연과학이 그런 한계까지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단정적으로 말할 게 없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생명체는 완전히 새로운 종의 자리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이런 보편적인 생명 현상보다는 주로 인간 생명에 한정해서 생명 문제에 접근하곤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바로 모든 생명체의 정상에 선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신념은 이미 성서가 말한 것이기도 하고, 실제 삶에서 경험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금만 세상을 향해서 눈을 돌릴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인간 중심의 생명 이해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과 그 인간의 생명이 별 볼 일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결코 독립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은 인간만으로는 도저히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만약 풀이 모두 사라진다면, 인간도 결국 생존할 수 없다. 박테리아가 사라진다면, 모든 동물의 시체가 부패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도 역시 생존할 수 없다. 이렇게 생명이 주변과 철저하게 유기적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 앞에서 인간 중심의 생명 이해는 충분하지 않다.
필자는 인간을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해서, 일종의 먹이 사슬을 이루고 있는 생명체계이 아니라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도 역시, 어쩌면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곧 비생명의 세계를 말한다. 물은 말할 것도 없다. 물이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다. 탈레스가 만물의 본질을 물이라고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불도 역시 자기 복제가 가능한 그런 범주의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임에 틀림없다. 만약 지구에 불이 없었다면 어찌 되었을지 생각해보라. 고대 유인원들은 빙하기를 결코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며, 현재의 인간 문명도 불가능했다. 그랬다면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는 아주 사소한 지질학적 변화에도 손쉽게 멸종당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 지구라는 혹성이 바로 그 모든 생명의 토대라는 사실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태양을 비롯해서 저 멀리 우리의 손길이 전혀 닿지 못하는 우주 한편의 어떤 별들이 오늘 우리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일지도 모른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믿는 우리는 유와 무의 경계 설정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생명 이해와도 직결된다. 그동안 우리가 고수하던 생명과 비생명의 선입관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곧 생명 문제를 접근하는 과정에서 인간 중심으로부터 하나님 중심으로의 패러다임 쉬프트이다. 기독교인은 바로 그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로부터 살려내신 그분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profile

[레벨:8]시와그림

2008.08.03 00:45:27

'유와 무의 경계를 넘어서고'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를 뛰어넘고'...
목사님 글을 읽으면
하나님이 내안에 숨겨 놓으신
겸손과 유연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지대 감사!!!
profile

[레벨:8]김재남

2008.08.05 19:46:32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20 나는 부활하는가? [2] 2008-08-25 4676
119 꿈과 현실 2008-08-25 3382
118 기독교란 무엇인가? [1] 2008-08-25 4958
117 귤과 하나님 [2] 2008-08-25 3280
116 귀신신앙 [2] 2008-08-23 3911
115 구원파 [2] 2008-08-23 3979
114 구원에 대한 질문 [2] 2008-08-23 3747
113 교회의 표시 2008-08-23 3543
112 교회의 부유세 [1] 2008-08-23 3096
111 교회력 [5] 2008-08-22 4040
110 공평하신 하나님 [7] 2008-08-21 6431
109 고독 [2] 2008-08-21 3566
108 거미와 천국 [2] 2008-08-21 3792
107 가짜 교회, 진짜 교회 [1] 2008-08-21 3632
106 가르멜 산 전승 2008-08-21 3956
105 신학은 길이다 [3] 2008-07-31 3524
104 신학은 사유다 [5] 2008-07-31 3623
103 신학은 영성이다 [1] 2008-07-31 3556
102 신학의 현대성에 대해 [5] 2008-07-31 3521
» 생명과 비생명 [2] 2008-07-29 348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