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현대성에 대해

조회 수 3522 추천 수 3 2008.07.31 23:06:32
신학을 신에 대한 학문이라고 할 때 굳이 ‘현대’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왜냐하면 이런 식으로 신학을 꾸미다보면 자칫 신학이 시대적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원칙적으로 신학은 신학일 뿐이지 고대신학이 따로 있고, 중세신학이 따로 있고, 근대, 또는 현대신학이 따로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런 관점은 두 가지 면에서 설득력이 있다. 첫째, 신학의 대상인 신은 발전되거나 변하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에게 너무 명확한 사실이기 때문에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구에 따라서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가변적인 존재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존재이유를 확보하고 있는 절대이기 때문에 현대라는 범주로 재단할 수는 없다. 둘째, 실제적으로 현대신학이라는 작업이 고대신학에 비해서 전혀 새로운 것을 발견해낸 것은 거의 없다. 바울과 어거스틴이 말하지 않은 것 중에서 현대신학자가 새롭게 발견해낸 것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학이 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는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우리보다 바울이 이 궁극적인 사실을 훨씬 정확하게 인식했다고 보아야 한다. 오늘의 우리가 아무리 현대의 인식론적 틀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어거스틴에 비해서도 하나님에 대한 더 나은 지식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신학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에서도 역시 고대인에 비해서 현대인이 훨씬 철이 많이 들었다고 볼 수는 없다. 우리는 물리학의 정보를 상대적으로 많이 확보하고 있을 따름이지 물리학적 근본 사유라는 점에서는 고대인들보다 조금도 낫지 않다.
어쨌든지 이런 근본적인 한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현대신학’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무언가를 생각하려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비록 신학의 중심 주제는 고대나 현대나 여전히 삼위일체 하나님과 계시, 종말, 구원 같은 것들이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시대에 따라 변했기 때문에, 즉 신학방법론적 실용성을 위해서 신학을 현대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곧 신학을 공부해야 할 사람을 염두에 둔 관점이다. 인간의 인식론적 범주와 그 틀이 변화되고 다양화되었기 때문에 그것에 상응하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둘째, 신학의 주제가 그 은폐성을 이미 우리에게 온전히 드러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학의 현대성 문제를 제기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현대는 단지 연대기적 시간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신학의 종말론적 성격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있는 신학은 종말이 이르러야 온전히 드러나게 될 그 하나님의 계시를 향해서 시종일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한 번 더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학이 현대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어야만 신학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거나 하나님을 좀더 깊이 인식할 수 있다는 게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종말론적 성격 앞에서 인간이 견지해야 할 인식론적 한계 때문에 ‘현대’라는 사유 방식이 필요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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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재남

2008.08.05 19:58:59

목사님, 서점에서 일하다보니 신간서적을 먼저 접하게됩니다.
제가 아직 어리기때문에 열린자세로 많은 글을 읽어보려고 노력중인데요,
7월 말에 출판된 <모리스 블랑쇼의 침묵에 다가가기>란 책이
들어와 읽고 있습니다. 블랑쇼란 인물의 사상에 대해 일견을 여쭤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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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05 23:30:23

나미 님,
나는 블랑쇼를 잘 모른답니다.
나미 님이 알아보고 알려주세요.
감사.

[레벨:1]인봉

2008.08.18 13:41:24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해 있는 신학은 종말이 이르러야 온전히 드러나게 될 그 하나님의 계시를 향해서 시종일관 열려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 신학의 현대성이란 정의로 볼 때, 위의 정의는 결국 두가지 의미를 다 포함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뉴스엔조이에서 가끔 목사님의 글을 보며 다른 목사님과는 다른 분이구나 하고 느끼다가 얼마전 박창진목사님의 반론글에 댓글을 달았다가 솔나무님의 인도로 여기까지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종교는 종말론이 참으로 중요한 포인트임에도 불구하고 그 종말이라는 개념이 혼돈의 상태가 아닌가 싶어 조심스레 흔적을 남깁니다. 그것이 비단 오늘의 문제이겠습니까만, 지난 일은 지났으니 비켜놓고요. 오늘의 관점에서만 볼 때, 종말이 나중에 있는 문제여야만 할까요?
복음서에서 나오는 종말인듯한 뉴앙스로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유에서 저는 그것이 미래의 일이 아니고 지금 언제든지 말씀을 통해서 예수와 하나님을 만난 싯점이 바로 종말이라고 그 종말을 뒤로 하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받았는데 그 후로도 계속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해도 그 이상도 이하일 수도 없는 문제를 대부분 모든 사람(목사고 신도고 간에, 사실 목사들의 시각은 중요하지요. 왜냐하면 신도들은 그런 목사를 따라가기 마련이니)들은 이와는 다른 종말론적 시각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또 어떤 글이고 말이고 설교도 다 대동소이합니다.

종말이나 부활이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문제이고 언젠가 있을 나중의 문제로만 남겨둬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받은 것처럼 성경을 읽으며 깨달음을 얻은 싯점, 곧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알고 함께 한다는 인식(이것도 여러 수준이 있겠지만)으로 이전의 몸과 정신이 죽고 새로 태어나는 것을 종말과 부활로 받아들이면 안되는 또다른 무엇이 있나요?

이 글이 올려진 시간이 지나서 보실지 모르겠으나 답변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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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18 16:23:14

인봉 님,
안녕하세요?
옳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종말론은 순전히 미래주의가 아니랍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종말이 이미 현재 안에 선취되었다고 말합니다.
현재와 미래의 변증법적 역동성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이 살아나는 거지요.
그러나 종말론은 단순히 현재와 미래의 관계를 말하는 게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생명의 완성에 대한 기독교의 고유한 인식론적 근거랍니다.
앞으로 다비아에서 좋은 사귐이 계속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하루.

[레벨:1]인봉

2008.08.19 08:56:18

아래 '정세웅목사님!'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면 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그 모든 건 종말에 드러나겠지요.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비판은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한 도저히 불가능하냐, 하는 게 아니랍니다.
기독교는 이런 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왔으니까 그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
문제는 일단 지난 2천년 기독교가 무얼 말했는지는 알고 비판해야겠지요. 안티-기독교 유의 결정적인 한계가 바로 그겁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표면적 현상으로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거지요."
=> 종말이란 말을 이용하는 것이나 기독교의 역사나 한국교회에 대한 상당히 독단적인 모습이 돋보이는군요. 또다른 모습을 봅니다.
이런 모습은 위에 제 질문에 대한 답변과도 약간 상반된 모습은 아닌가요?
이런 것도 결국은 모두가 종말에나 드러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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