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은 사유다

조회 수 3624 추천 수 3 2008.07.31 23:13:47
신학은 우리가 자동차 운전 기술을 배우듯이 몇 가지 요령을 체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신학적 사유를 배워야 한다는 데에 어려운 점이 있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쉽지만 그것의 근원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삶으로 깨닫게 되는 것은 그렇지 못한 것처럼 신학적 사유는 우리가 만만하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신대원이나 석사과정을 통해서 현대신학의 조류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고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 현대신학의 논점들을 훤히 꿰뚫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에 체화되기는 힘들다는 말이다. 소로우가 ‘월든’에서 철학 선생들은 많지만 철학자는 별로 없다고 말한 것처럼 신학의 정보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신학선생은 많지만 그 신학을 그대로 삶으로 끌어가는 신학자는 별로 없다. 또한 하나님에 대해서 신자들에게 설교를 할 수 있는 목사는 많지만 그 하나님을 자기 삶의 토대로 삼는 목사는 드물다. 이 말은 곧 신학 지식이 영적인 존재인 하나님의 세계에 들어가는 도구가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의 세계밖에 머물러서 그것에 대해 알기만 하는 정보차원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외면상 신학을 정보로 인식하고 가르치는 것과 삶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며 가르치는 것 사이에 차이를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차이는 너무나 엄청나다. 목사가 신학이나 성서를 정보로만 아는 가운데서 설교와 목회를 하는 경우와 그것의 진리 속으로 들어가서 하는 경우가 완전히 다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차이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마 제 삼자가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논쟁을 보았다면 별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을 통해서는 소유차원과 존재 차원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신앙은 말이 아니라 그 능력에 있다고 본 것처럼 신학도 그럴듯한 말에 있는 게 아니라 그것의 능력에 있다. 이 차이가 외면적으로 발견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극과 극이다. 우리에게 영적인 실체를 풀어낼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결국 그 동안의 신학작업이 정보수집 차원에 머물렀다는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어떻게 하면 신학을 정보로서가 아니라 영적인 실체를 담아낼 수 있는 인식론적 틀로서 소화해낼 수 있을까? 그 출발은 ‘신학적 사유로서의 신학작업’에 있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구체화하기 위한 도구를 확보하는 작업이다. 우리의 경우로 말하자면 이 도구가 곧 현대신학이다. 현대신학자들과 그들이 제시하는 주제들을 세밀하게 검토함으로써 우리가 현대적 시각으로 신학적 사유를 지속할 수 있는 능력이 제공되며,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영적인 실체인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 세계에 들어가는 일련의 순서로 신학활동이 이루어진다. 이 시간에 우리는 신학의 대상인 영적인 실체와 그 대상을 현대적 시각으로 해명해 보려한 현대신학 방법론 사이에 있는, 바로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표이며 기능이라 할 ‘신학적 사유’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해보려고 한다.
일전에 티브이에서 세계 석학과의 대담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거기서 이런 말을 들었다. 교육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 동안 배울 수 있는 능력을, 또는 배우고 싶다는 동기를 키워주는 데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이건 신학의 경우에도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되었다. 신학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평생 동안 이 세상을 신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게 하는 데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신학정보를 획득하는 게 아니라 신학적 사유 능력을 키운다는 사실이다. 정보와 능력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을 했지만 아주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짤막하게 보충하겠다. 내 가까운 사람이 피아노 선생이래서 피아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 어느 정도 안다. 학생은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또는 리스트의 곡을 연습한 다음에 선생 앞에 와서 교정을 받는다. 소위 피아노 레슨이다. 그 학생은 박자나 느낌을 선생의 지도에 따라서 바꾸면서 음악을 완성해 나간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이루어지는 레슨과정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선생과 학생이 이런 레슨과정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해나가는가에 달려 있다. 상당한 경우에 학생은 레슨을 받고 있는 곡을 원활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레슨이 끝나버린다. 이런 학생은 다른 곡을 연습한 다음에 똑같이 레슨을 받는다. 전혀 처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어떤 학생은 레슨을 받는 곡을 얼마나 완벽하게 연주하는가에 중심을 놓는 게 아니라 음악경험에 놓는다. 음악적 사유를 중심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이런 학생은 새로운 곡을 레슨 받을 때마다 음악 경험이 깊어지기 때문에 앞의 곡을 레슨 받을 때 거쳤던 것을 뛰어넘을 수 있다. 앞의 학생은 선생의 생각을 단순히 따라갈 뿐이고, 그래서 결국은 피아노라는 기계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아는 기술자가 되는 것이고, 뒤의 학생은 비록 기술은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음악적 경험과 사유세계에 들어간다.
우리가 성서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도 단순히 성서의 역사비평이나 본문비평을 원활하게 전개하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성서기자들과 같이 이 세계 문제와 하나님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사유하는 방식을 배우려는 것이다. 교회사를 배우는 것도 그렇다. 교회의 연대기를 완벽하게 꿴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 역사를 관통해 나가는 역사의 근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계시론이나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의 주제를 공부하는 이유도 역시 우리가 이 세상의 모든 사안들을 신학적으로 사유하려는 데에 있다.

[레벨:0]팡세

2008.08.03 16:59:00

화이트 헤드의 표현을 빌리면 신학이 철학보다도 더 쉽게 다루어 진다는 것.더 쉽게 취급된다는 말이 떠오릅니다. 아마도 철학이 신학의 시녀는 아니더라도 철학보다는 더 깊어야하고 더 어려운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학을 접근하는 태도도 어느 철학자의 심오한 자세보다도 더 낮게 인식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생각은 아닐런지요. 어쩌면 사유할 능력도 없고 관심도 없기 때문이겠죠..
고뇌하는 철학자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고뇌하는 신학자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신학자를 꿈꾸지 않기에
신학이라는 그 넓고 깊은 사유의 길이 좁을수 밖에 없는건 아닐까요?

팡세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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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03 23:18:29

팡세 님,
안녕하세요?
오늘 오후에 전화로 통화한 분이군요.
생각이 깊으신 분이신데,
앞으로 좋은 영적 대화가 많기를 바랍니다.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 관심이 많으신가요?
그 접촉점이 어디이며,
그 경계는 또한 어디일까요?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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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06 16:25:08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라...
위 대글에서 그게 핵심인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팡세 님이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세요.
'구체적'이라고 해서 세세하게 일일이 실증적으로 표현하라는 말은 아니고
현실적(real)으로 말해보라는 뜻이에요.
그게 하이덱거의 '존재' 경험이에요?
노자, 장자의 '도' 경험이에요?
오토의 '거룩한 두려움' 경험,
쉴라이어마허의 '절대의존감정' 경험이에요?
바르트의 '절대 타자' 경험?
모세, 이사야, 예레미아 등등의 '신탁' 경험이에요?
기독교 신앙경험은 낭만적인 게 아니라
엄정한 거랍니다.
가능하다면 본인의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 무언지 말해보실까요?

[레벨:1]초록새

2008.08.06 17:10:25

교부신학의 아버지가 불린 터툴리안은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기독교 교회의 교과서를 직접했던 그가 죽기전 며칠전에 하나님을 대면하고 이런 고백을 하게 되었다는... 내가 지금껏 써온 많은 책들은 하나님을 만난후에 그 모든것이 지푸라기였다는 것을요.. 더 깊이 공부하지는 않아서 상세히 모르겠지만, 당대 최고의 석학이 자신의 신학서적을 지푸라기에 비유했다면 하나님의 임재 경험은 우리의 지식과 앎의 수준을 초월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 만은 짐작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위와 비슷한 말은 중세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가 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토마스 아퀴나스가 미사집전을 하던 중 신비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 후에
자신의 신학대전은 지푸라기에 불과하다고 고백했는데,
터툴리안도 그런 고백을 했나 보군요.
인용하신 글귀의 출처가 확실한가요?

[레벨:7]빈이

2008.08.07 07:08:42

정황상, 아퀴나스에 대해 이야기하시려고 하셨는데 이름을 터툴리안으로 쓰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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