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와 천국

조회 수 3793 추천 수 0 2008.08.21 14:52:02
거미와 천국

오늘 오후에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있는 천호아파트 입구에서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현상을 보았다. 아파트 1층은 관리사무실과 주차공간과 엘리베이터 출입구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람이 사는 집은 2층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그 입구에 3미터 정도 높이의 공간이 확보되어 있다. 예배 후 집에 갔다가 교회로 가기 위해서 그 공간 밑을 지나가는데, 발쪽으로 무언가가 닿는 느낌이 들어, 순간적으로 몸을 비키면서 돌아서서 무언지 살펴보았다. 땅바닥에서 겨우 10센티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상태로 공중에 떠있는 거미였다. 평소에 테니스를 치던 내 순발력 탓에 다행스럽게도 거미를 다치게 하지 않았다.
거미줄이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공중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직감적으로 거미줄에 매달려 있겠거니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 녀석에게 무슨 일이 생겼기에 이렇게 위험스런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허리를 굽혀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아마 2층 베란다 한 구석에서 겨울을 나는 중이었다가 오랜만에 봄처럼 따뜻한 날씨에 몸이 간지러웠는지 잠시 나들이를 나왔나 보다. 그런데 나들이치고는 너무나 위험했다. 만약 내가 무심코 지나가거나 아니면 순발력이 좀 떨어졌다면 그 녀석은 내 발에 밟혀 장애를 입거나 천당에 갔을 것이다.
좀 말이 옆으로 흐르는 건지 모르겠지만, 천당에도 거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 거미가 없는 천당이라니! 그런 천당은 너무 삭막하지 않을까? 내가 어렸을 때 본 거미줄은 감동 자체였다. 아침 이슬이 초롱초롱 매달린 거미줄을 본 적이 있으신지. 거미줄에 잡힌 나비나 잠자리가 거미에 의해서 생포당하는 장면은 끔찍하긴 했지만 그래도 명주실처럼 반짝이는 거미줄은 내 어린 시절의 한 귀퉁이를 아름답게 수놓고 있다.
나는 이 녀석이 어떤 줄에 매달려 있는지 좀 정확하게 보기 위해서 바짝 다가갔다. 그런데 아무리 초점을 맞추어도 거미줄이 보이지 않았다. 내 눈이 더 나빠진 건가, 아니면 거미줄 없이 이 녀석이 ‘공중부양’의 기술을 익힌 걸까? 방향을 다른 쪽으로 틀어보았다. 그제야 거미줄이 내 망막에 포착되었다. 밝는 쪽을 향해서 바라볼 때는 아무리 눈을 부라려도 보이지 않더니 좀 어두운 안쪽으로 향해서 보니까 수직으로 늘어져 있는 거미줄이 보였다.
그 순간의 놀라움이라니! 물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생명체가 직접 만들어서 실용화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가는 선이 3미터 가량 전혀 구부러짐이나 휘어짐 없이 햇살처럼 밑으로 내려온 모습을 직접 보았을 때 어떤 절대적인 현상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세가 본 호렙산의 불타는 가시떨기라고 한다면 좀 불경한가?
그 끝에 겨우 2센티미터 밖에 되지 않는 거미 한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기의 생존을 이 한 가닥 거미줄에 완전히 맡기고 있는 이 거미의 신뢰와 그 자유의 경지를 인간이 따라갈 수 있을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가 이런 정도는 돼야 하는 게 아닐까?
지구의 중력을 극복한 듯 3미터의 줄에 매달려 있는 이 녀석의 자유를 간섭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우리 아파트 개구쟁이들에게 들키는 날이면 뼈도 못 추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하다는 걸 생각하고 손으로 거미를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그 녀석은 성깔을 부리지 않고, 그렇다고 겁먹는 태도도 안 보이면서 천천히, 중국말로 만만디(?), 순전히 우리말로 시나브로 침착하게 줄을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2센티미터의 몸으로 300센티미터의 줄을 탔다. 자기 몸의 150배 길이이다. 170센티미터의 인간에 비한다면 255미터의 줄을 타고 올라가는 것이다. 아무리 암벽타기 훈련이 잘된 산악이라고 하더라도 그 정도의 줄을 타려면 최소한 세 시간은 걸릴 것이다. 그런데 거미는 1분도 채 걸리지 않는 짧은 시간에 거뜬히 2층 베란다까지 올라갔다. 그 모습을 디카로 잡는 건데, 아쉽다. 거미는 몸은 작지만 다리가 길어서 성큼성큼 올라갔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줄을 타고 올라가면서 그 줄을 밑으로 늘어뜨리는 사람의 줄타기와 달리 거미는 올라가면서 그 줄을 자기 몸의 한 곳으로 모았습니다.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느다란 줄이 거미의 가슴이 모이면서 솜뭉치처럼 변했습니다. 그걸 다시 먹을지, 아니면 다른 곳에 재활용하는지 나로서는 그 녀석의 꿍꿍이를 알 수 없다. 대략 3분 정도 나는 생명과 존재의 아찔한 경험을 한 셈입니다. 고도의 줄타기 기술을 가진 러시아 서커스를 본 것 같다고나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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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8.22 14:28:23

동물이나 식물, 자연을 보노라면
그 생명이 너무 아름다이 도드라져서
생명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보이는 듯 합니다
노력없이 애씀없이 말없이
존재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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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22 23:31:00

그 무엇이 점점 더 윤곽을 또렷이 드러내고 있나요?
그게 다시 사라질 때도 있을 거에요.
그럴 때 두려워 마세요.
마음을 닫아두지 않으면
다시 나타날 테니까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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