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하는가?

조회 수 4677 추천 수 1 2008.08.25 23:04:54
나는 부활하는가?

성탄절의 절기는 기독교의 종단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나지만 부활절만은 모든 종파가 일치하고 있다는 건 그 부활 사건이 유대교의 유월절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점에서는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훨씬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성탄절은 기독교의 역사가 한참 흐른 다음에, 즉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에 태양력 중심의 로마 절기에 의해 성립되었지만 부활절은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시작과 더불어 구성적인 요소였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서 성탄절은 없어도 기독교가 어느 정도 버텨낼 수 있지만, 부활절이 없으면 기독교 역시 없다는 말이다. 바울은 이미 이 사실을 명백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전한 것도 헛된 것이요 여러분의 믿음도 헛된 것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고전 15:14). 그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이 없으면 기독교가 허물어진다고 말한 적이 없지만 예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기초가 허물어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부활’은 단지 신앙생활의 장식용품 정도로 전락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기껏해야 일년 한번, 부활절을 맞아서 부활에 관한 설교를 듣는 게 우리와 관계된 부활신앙의 모든 것인 형편이다. 부활절 자체도 우리에게는 어떤 요란스러운 부활절 행사로 각인될 뿐이지 부활 사건의 깊이로 들어가거나 그것 자체를 진지하게 질문하는 일은 별로 일어나지 않는다. 기독교를 지탱시키는 이 부활 사건이 우리의 신앙에서 주변적인 요소로 전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핵심적으로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명분으로는 부활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거의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없다는 게 우선적인 이유이다. 현대인들이 받아온 자연과학적 교육과 물질 중심의 경험은 기본적으로 부활을 거부한다. 단지 사도신경의 문장으로만 부활을 고백할 뿐이지 실제로는 철저하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부활에 관심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부활절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훨씬 강하게 기울어져 있다. 거꾸로 여전히 열광적인 형태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더 정확하게는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부활에 관한 그들의 믿음과 확신은 이 세상의 모든 합리적인 인식론까지 완전히 부정하는 단계에까지 발전한다.
그런데 부활을 믿지 못하는 신자들이나 지나치게 열광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나 그 무의식 깊은 곳에는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불안이 부활절의 ‘이벤트’로 나타난다. 많은 교회들이 부활절 전 일주일 동안 고난주간에 ‘특별새벽기도회’를 개최하고, 목요일에는 세족식과 성찬식을 거행하고, 교회에 따라서 칸타타를 중심으로 음악예배를 드린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기능을 감당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행사의 내면에는 부활 사건에 관한 진정한 관심과 참여라기보다는 신자들의 신앙적 열정을 강화하려는 ‘행사’에 머물러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흡사 부모님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모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부모님을 향한 마음은 별로 없고 그저 자기들끼리 많이 먹고 노는 데 모든 열정을 쏟는 후손들의 태도와 비슷하다.
부활 사건에 영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태도와 자신들의 신앙적 열정에 빠지는 태도를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 차이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전자의 경우에는 진리와 생명의 영이 주체로 작용하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그럴듯하게 보인 신자들의 인간적 욕망이, 혹은 인간의 감정과 심리가 주체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차이를 우리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만 설교행위와 연관해서 일단 이렇게 설명해보자. 우리는 예수가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라고 강요당한다. 성서에 기록된 그대로 믿는 것이야말로 믿음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협박까지 받는다. 이런 방식의 설교가 곧 인간의 열정에 치우친 설교이다. 이런 자리에서는 진리와 생명이 문제가 아니라 단지 믿을 수 없는 사실까지 믿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과, 아울러 믿을 수 없는데도 믿는다는 광신의 영만이 관건이다. 그렇다면 부활 문제에서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만 진리와 생명의 영이 끌어가는 설교일까?
그 대답은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다. 부활 주체에 관심을 기울이는 설교이어야 한다는 게 그 대답이다. 부활을 믿어야 할 사람의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라 사람이 믿어야 할 부활 사건 자체가 중요하게 해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약 부활의 심층으로 들어간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람들을 억지로 믿으라고 강요하거나 선동하는 일은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며, 더 나아가 그의 해명이 충분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때 바로 믿음의 길을 가게 된다. 결국 여기서의 핵심은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사람에게 놓는가, 아니면 성령에게 놓는가에 있다. 성령에 의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부활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질문을 쉬지 않는다. 즉 한번 믿은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본인의 세계 이해가 심화하는 과정에서 그 부활의 리얼리티를 훨씬 깊이 알기 위해서 끊임없는 사유 활동을 전개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걸고 이렇게 질문해야만 한다. “나는 정말 부활하는가?” 이 질문의 의미를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야만 한다. “나는 어떻게 부활하는가?” 어느 정도 기독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부활처럼 우리가 부활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결국 예수에게 일어났던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에 관한 질문과 같은 것이다. 물론 예수가 부활했다고 해서 우리도 그와 똑같이 부활할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는지 대답해야겠지만 그건 또 하나의 다른 주제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접어두기로 하자. 과연 예수의 부활은 무엇인가?
예수의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서 간혹 ‘달걀’을 비유로 들거나, 봄에 피어나는 새싹을 비유로 드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비유로 이 숙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는 없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병아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결국 죽어야 하며, 봄의 새싹도 가을이 되면 결국 죽어야 한다면 그런 현상은 예수의 부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예수의 부활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일단 성서의 증언들을 면밀하게 살펴야 하고, 존재와 생명에 관한 철학의 도움도 받아야 하겠지만 결정적으로는 성서와 철학적 사유에 근거해서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이런 작업의 역사는 2천년 기독교 역사만큼 오래되었고 그 양도 풍부하다. 여기서 이런 역사를 모두 검토하기는 힘드니까 필자의 신학적 직관에 한정해서 몇 대목으로 그 윤곽만 잡으려고 한다.
1) 예수의 부활은 죽었다가 단순히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으로 변화한 사건이다. 예수의 부활에 관한 복음서의 보도가 일목요연하지 않은 이유는 부활의 예수가 우리의 인식방식으로는 충분히 담아낼 수 없는 생명으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2) 예수의 부활은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에 근거하고 있다. “만일 죽은 자가 부활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실 리가 없다.”(고전 15:13)는 바울의 진술이 바로 그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늘 예수의 부활을 변증하려는 신학자와 설교자라고 한다면 죽은 자로부터의 보편적인 부활 가능성을 탐색해내야만 한다. 과연 이런 작업이 가능할까? 현대물리학은 인간의 보편적인 부활을 용납할 수 있을까?
3) 따라서 기독교는 한 사람의 운명이 출생과 죽음으로 끝장나는 것처럼 보이는 이 현실의 삶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으로 들어갈 수 있는 영적인 영역을 확보해야만 한다. 그런 영적인 영역은 막연하게 아니라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인식하고 있던 그런 세계이다. 그 영역은 우리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 궁극적 현실이다. 문제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해명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4)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린다면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이라 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과 다르다는 점에서 신비이다. 우리가 그 신비의 힘을 여실히 인식하고 경험하게 될 때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모세처럼 하나님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5) 그 하나님 안에 숨겨져 있는 생명의 현실이야말로 우리가 부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궁극적 세계이다.
6) 그런데 그 궁극적 생명은 아직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7) 다만 역사적 예수에게서 부활이 선취되었다.
8) 예수에게 선취된 그 궁극적 생명은 곧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이다. 여기서 죽은 자는 무엇인가? 죽은 자는 사물에 불과하다. 이런 사물과 생명과는 극단적으로 다른 영역이다. 모든 생명을 사물로 돌려놓는 죽음이 예수에게서 극복되었다는 것은 결국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사물로 돌아가지 않는 궁극적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뜻이다. 이를 다르게 표현한다면 예수의 부활로 인해서 이제 우리는 생명의 창조자인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약속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런 몇 가지 화두를 전제하고 다시 “나는 정말 부활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땅에서 성취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삶의 재현이나 연장을 부활로 생각한다면 아무도 그런 것을 소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완전하게 인식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도 역시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부활이 불확실하다거나, 하나님의 존재여부가 불확실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절대적인 세계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또한 현재 우리에게 인식되고 있는 것들은 늘 잠정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종말의 빛 안에서만 그 세계를 언급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우리가 지금 종말을 맞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지만 그 종말의 빛은 이미 그곳에서 이곳을 향해 빛을 비추고 있다. 그 빛을 의식하는 영적인 사람들은 부활의 희망 안에서 현재의 수고를 넉넉하게 지고 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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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8.29 13:33:14

동영상 강의에서
우리가 물이 될 수도 흙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의 영성을
열어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정말 신앙 안의 모든 문제들을
백지 상태로 다시 생각하게 하시니 놀랍습니다
'부활'을 붙들고 욕심 부리지 않겠습니다
생각하면 가슴 벅차지만
내 몸이나 내 영혼에 대한 존재 요구를 하지 않겠습니다
궁극적 생명을 선취하신 예수의 빛 앞에
눈 처럼 녹아지는 기쁨을 누리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29 23:40:24

시와그림 님,
옳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사유범주로
부활생명의 세계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겠지요.
우리는 '영광'이 무언지도 잘 모르거든요.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상할 수 없었던,
그런 놀라운 일들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날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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