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來世) (2)

조회 수 8277 추천 수 163 2007.02.05 23:11:11
내세(來世) (2)

내세는 현세의 반대개념이다. 우리가 내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은 곧 현세를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세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내세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예컨대 어머니 배속에 있는 태아들은 현세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내세에 대한 인식도, 표상도 불가능할 것이다. 어쨌든지 우리가 내세를 표상한다는 말은 현세에 대한 인식 범주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일어난다. 내세의 토대라 할 현세, 곧 이 세상을 우리가 알고 있을까? 물론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사람들은 현재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이런 세계를 확실한 것으로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하늘, 땅, 나무, 새, 강, 바다, 민들레, 거미, 그리고 가족, 교회, 국가, 문화 활동을 우리가 여기서 경험한다. 그러나 그게 정말 확실한 걸까? 지금 내 앞에 탁상시계가 있다. 나는 그것을 눈으로 보고 알 수 있으며, 또는 손으로 만져서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시각과 나의 촉각에 의해서만 확실할 뿐이지, 나의 다른 감각, 예컨대 후각으로는 별로 확실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 바로 가장 근원적인 문제가 놓여 있다. 이 세상을 확인할 수 있는 내 인식감각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감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나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놓치거나 피상적으로만 경험한다. 예컨대 나의 청각은 개에 비해서 월등하게 떨어지고, 나의 촉각은 달팽이에 비해서 월등하게 떨어진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내가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내가 확인할 수 없는 현상이나 실체들이 훨씬 많을지 모른다. 분명히 많을 것이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 나는 우리의 현실 경험이 전혀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사물과 현실들이 한낱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아니다. 이 세상에 직면해서 살아가는 인간의 인식이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는 중이다.
우리의 이런 인식론적 한계는 그것 자체의 한계일 뿐만 아니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이, 또는 우리가 던져진 이 세상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점에서도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이 세상의 변화라는 게 천년, 이천년, 또는 일, 이만년 정도가 아니라 수백만 년, 또는 수억 년의 과정이라고 할 때 이 세상은 우리의 인식을 근본적으로 벗어난다. 그 안에 들어가 있는 인간의 삶도 변하고, 생명의 종도 변하고, 땅도 변한다. 지구에서 살던 생명체들이 멸종하기도 하고, 새로운 종이 등장하기도 한다. 산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바다가 산이 되기도 한다. 이게 바로 우리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그리고 우리가 던져져 있는 세계인데, 이 세계는 우리의 감각과 인식을 넘어서는 대상이며, 그런 실체이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 개념에 따르면 이 세상에 자기 완결적 구조는 없다. 어떤 구조물이나 텍스트도 내적 모순이 없는 것이 없고, 따라서 해체를 피해갈 수 없다. 이 말은 결국 모든 것을 규정할 수 있는 하나뿐인 진리는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절대 진리로 믿는 우리에게 이런 철학자들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게 불안하게 생각할 건 없다. 그의 주장을 뒤집어본다면,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인간의 인식 대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해서 세상을 해명하는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 환영할만한 논리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 세상을 어떤 고정 불변하는 원리와 체계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세계 안에서 그런 원리를 찾는 것은 과학자들의 몫이다. 기독교 신학은 이 세상의 역사 전체가 곧 하나님의 자기계시라도 주장하면서 그것을 논증해나갈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데리다의 주장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해체된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학에는 훼손될 게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계시하니까 말이다. 다만 문제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을 완벽하게 인식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가에 있다. 우리는 왜 이 세상을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만 인식하고 경험하는 걸까?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이건 그렇게 어려운 질문이 아니다. 현세는 현세만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현세는 내세 안에서만 드러날 수 있다. 생각해보라. 여기 모기가 한 마리 있다고 하자. 그 모기가 내 팔을 물었다. 모기는 그 순간에 나의 피를 마시기 위해서 침을 찔렀다. 그 순간에 나의 손바닥이 모기를 향해 날아갔다. 모기는 인간의 팔을 물었는데 왜 다른 쪽 손바닥이 자기를 향해 날아오는지 모른다. 모기의 침이 내 팔을 문 사건은 손바닥이 날아오는 사건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이게 정확한 비유였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이 세계는 이렇게 내세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현세는 내세가 왔을 때만 그 실체를 드러낼 수 있다. 이게 곧 기독교의 종말론적 역사 인식, 세계 인식이다.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 현세와 내세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나님의 창조주라고 한다면, 그래서 현세와 미래를 온전히 통치하신다면 현세와 내세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연결되어야 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 내세의 선취를 경험했다. 예수는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는 전체 역사에서 생명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것은 증명의 차원이기도 하고 믿음의 차원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단 믿음으로 그 사건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보편적인 진리로 증명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내세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달려 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레벨:1]똑소리

2007.02.06 18:27:46

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면
고대그리이스시대 회의학파가 주장했던 <판단중지>가 연상이 됩니다.
지금까지 목사님이 쓰신 글이나 설교
아티클을 읽으면서 느낀 제 개인 생각입니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불확실하며 궁극적 실재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것은 인간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기에
부정할수도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 윤리행위나 사회현상이나 사건에 대해서
시비와 선악을 판단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회의학파들의 주장이나
목사님의 여러 글에 드러난 생각이나 주장이 비슷해 보일때가 많거든요.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실체가 드러난다는 기독교의 종말론과
회의학파의 주장은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지
아니면 약간의 유사점이 있는지 좀 알고 싶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기독교의 신학에 회의적인 요소가 있다는 건지,
반대로 회의학파의 사상에 기독교의 종말론적 성격이 담겼다는 것인지..
아니면 기독교신학에 내재하고 있는 '잠정성'이라는 말과
회의학파의 <판단정지>와 어떤 공통분모가 있는건지...
다르면 어떤 면에서 다르고
공통점이 있다면 어떤 면에서 그러한지
설명이 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철학과 신학의 관계에 대해서 새로운 기분으로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 기분을 무어라고 해야 할지
....'맛있다'는 표현이 그래도 제일 어울릴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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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2.06 23:57:54

<판단중지>라...
똑소리 님은 정말 어려운 질문을 골라서 하네요.
나는 철학선생이 아니라서 위의 질문에 정확한 대답을 할 수가 없군요.
판단중지를 그리스 회의론자들만 한 건 아니겠지요.
현상학의 아버지인 후설도 바로 그것을 말하던데요.
내가 지금 회의론자, 후설, 그리고 나의 신학적 관점을 연결해서
설명할 자신이 없어요.
그런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지금 철학, 물리학, 신학 등, 모든 학문과 종교와 과학이
무언가를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지만
궁극적인 거는 여전히 어딘가에 그대로 남아있지요?
그것이 노출되기 까지는 우리의 모든 인식론적인 노력들이
잠정적이라는 건 그냥 상식적인 이야기이겠지요.
나는 그렇다고 해서 불가지론을 따라는 게 아닙니다.
계시론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하는 것만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게 말이 되는지 아닌지는 더 논의해야겠지요.
신학은 그게 말이 된다는 점을 주장해야하고,
지금 그런 길을 가고 있습니다.
철학과 신학의 관계라...
저는 어떤 점에서 신학은 곧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계시론적인 철학(?)인 거지요.
이게 말이 되나요?
오늘 이만.

[레벨:23]브니엘남

2007.02.14 00:40:52

지금 여기서 "내세, 즉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어찌 죽은 다음에 "내세, 즉 하나님의 나라, 천국"을 알 수 있으리오, 그리고 들어가리오.
profile

[레벨:100]이길용

2007.02.14 00:48:26

구원체험이 있고.. 살아계신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체험했다면

생과 사의 구분이 어떤 의미가 있으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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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유목민

2007.02.25 02:01:46

어디서 많이 듣던 말처럼 '살아도 영광, 죽어도 영광'이 아니겠습니까?

[레벨:0]truth

2007.02.28 17:25:07

안녕하세요 목사님
저는 올바른 기독교인이 되고 싶고 올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싶은 무지랭이입니다.
내세가 있다면 그곳으로 이르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죽기전에 세례를 받지 않으면 천국에 결코 갈 수 없다고 하시는 어느 교회 목사님의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요.
누군가 죽기 일주일 전에 '병이 다 낳으면 저기 보이는 작은 교회에 다니고 싶네'
그랬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물론 세례도 못 받고 죽음으로 맺었다면 그의 내세에는 천국이란 없는 건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3.01 00:26:55

트루쓰 님,
내세는 현재 안에 있기도 하고,
미래에 있기도 하는,
우리의 시간 개념으로 고착화할 수 없는 세계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꾸 어떤 공간, 또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성서가 비록 그런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있긴 하지만
그건 훨씬 궁극적인 생명을 설명하기 위한 방법일 뿐이지요.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닙니다.
다른 길이 없어서 그렇게 말할 뿐이지요.
저의 이런 설명이 트루쓰 님에게는 뜬구름잡는 것처럼 들리겠군요.
하나님의 나라를 이해하려면
지금 우리가 말하는 그런 세계 경험의 한계를 일단 접어두어야 합니다.
천국에 가서도 잘 먹고 잘 사는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해에요.
그리고 그런 세계는 하나님의 배타적인 통치가 현실로 드러나는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그것에 대해서 전혀 상상할 수 없어요.
사실 지금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면
그런 내세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미 우리는 그런 내세의 한 성격인
영생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내세, 혹은 천국에 가냐, 못가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본질은 아닙니다.
내세와 천국이라는 거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두 가지로 결론을 내릴께요.
천국은 오직 하나님의 소관이다.
천국은 이미 오늘 우리의 삶에 침입해 있다.

[레벨:0]truth

2007.03.04 21:24:36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님의 답변을 읽고 또 읽고 했습니다.
너무나도 무지한 질문에 이렇게 답변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는 어느교회를 비판하려고 그런것은 아닙니다.
목사님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더 크게 한 성도가 목사님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땅에 다시한번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면 하고 기도합니다.
자신의 배에 기름기를 채우려는 자들
자신의 권세를 위해 성전건축을 하려고 눈이 뒤집힌 자들
독일에서 아니고 제 2차 종교개혁은 이땅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목사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레벨:0]옥토

2007.03.06 16:07:30

좋은 만남 기대 합니다.
.
"부탁이 있습니다."
.글씨가 더욱 크면,
.읽기가 좋겠습니다.

[레벨:7]늘오늘

2007.03.07 11:58:15

본문 시작되는 우측 모서리에,
+, -, save, default. 4가지 단추가 있습니다.
글자 크기를 조절하는 단추입니다. ^^

[레벨:0]옥토

2007.03.11 23:31:03

늘오늘 님 !
좋은것 가르쳐 주셔서 너무나 감사 합니다. 주 안에서 늘 평강 하소서 !

[레벨:1]india

2007.03.12 13:57:41

목사님 자크 데리다의 해체철학의 관점을 인용하셨는데 한 17년전에(기억이 가물)읽었던 데리다의 해체 철학 이라는 책속에서 저는 오히려 데리다가 진리(로고스)에 대해 정수를 뽑아내는 일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덕분에 오히려 성경을 더 깊이 읽어가게 되었으니까요... ^^

작년에 한국에 방문했을 때 제 책들무덤에서 정말 작고 빽빽히 줄을 긋고 주석을 달며 읽었던 데리다의 책을 주루룩 펼져보며 그가 분명 성경을 많이 읽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 기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가 날씰과 씨실을 해체해가면서 발견하고자 했던 내세와 현세의 진리는 로고스 안에 늘 존재해왔으니까요...

목사님이 어떻게 생기셨는지 매우궁금했는데 설교비평 책이 출판된후 신문에 목사님 사진이 함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런데 왜 자신기자가 아래서 위로 목사님을 올려 찍었을까요? ^^

건강하세요...

[레벨:3]Dr. Jung

2007.03.16 12:34:30

강퇴 되신 분들이 다른 카페에서 글들을 올리시는데 하나같이 목사님 의견에 반대 하신분들만 강퇴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곳이 그런 곳인가요?? 자유로이 의견을 계시하지 못하고 반대되는 내용이 올라와서는 안되는 곳인지요?? 그것이 사실이라면 안타깝습니다. 목사님의 펴시는 주장이 가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요,, 제가 잘 못 알고 있는 것인지??? 해명?? 뭐 그런 답변이 하시면,,, 좋고,,,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3.16 13:25:43

닥터 정 님,
강퇴당한 분들이 다른 곳에서 진술한 내용이 사실대로 맞는가, 이런 질문인가요?
다비아에서 저와 의견이 다르다고해서 강퇴당한 분들은
제가 기억하는 한 한분도 없습니다.
태도의 문제입니다.
예컨대 함께 토론해야 할 자리에서 빈정대거나 트집잡기를 하거나
습관적으로 훈계조로 나오거나,
또는 똑같은 이야기를 계속해서 반복하는 경우이지요.
비유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탁구를 배우고 싶어서 열심으로 그런 연습을 하고 있는데,
축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이런 글쓰기는 다른 분들에게 불편을 주기 때문에 강제조치를 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지만 그런 일도 지난 몇년 동안
서너번밖에 없었을 겁니다.
조금 더 되나?
하여튼 제 기억에 별로 없어요.
그리고 그런 것에 저는 관심이 없답니다.
누가 오고 말고 하는 거 말이지요.
그냥 다비아가 기독교의 근본을 알아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말 그대로 '사랑채'가 되기를 바라는 거지요.
그게 이상하군요.
여기서 강퇴당한 사람들이 왜 다른 데 가서 그런 말을 할까요?
자신과 코드가 다르면 오히려 잘 된 거 아닌가요?
다비아는 결코 '권력'이 아니랍니다.
하양이라는 작은 시골바닥에서
아주 소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며, 신학운동이며, 영성 운동이랍니다.
여기서 뭐 강퇴다, 뭐다 하는 게 별 의미가 없는 거지요.
다비아의 정체성은, 혹은 스펙트럼은 넓은 게 아니라
좁습니다.
그 안에서 진리를 추구하자는 거지요.
좋은 하루!

[레벨:2]소나기

2007.04.04 15:53:33

현세와 내세. 결국 내세도 현세 안에 해석되는 것이 아닐른지. 결국 내세와 현세의 경계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일 터. 아이가 어미의 뱃속에서 현세를 경험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그것이 아이의 현세가 아닌지.

아무 것도 가지려고 하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허락되는 무한의 부.
그것은 흔하게 말하는 '천국에서 보상 될 현세의 삶'이 아니라.
오늘 천국을 사는 나의 삶의 실재입니다.
천국과 지옥. 요한계시록의 심판은 하나님의 마음을 그려놓은 '이미지화'가 아닌가..
그것을 이루는 하나님의 결정은 아무도 속단해선 안될 것이겠죠.

이순신 장군은 지옥 갔나요?
갔다는 건 뭐고.. 뭐가 뭔지.ㅋ
하나님께 물을 일입니다.ㅋ

여기 처음인데.
참 좋네요.ㅋ
정용섭 목사님(?) 형제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그 향기는.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고.
뚜껑이 열렸기 때문에 자연히 느껴지는 것 같은.
기분 좋은 향입니다.
위의 어느 분이 말씀하신.
종교 개혁.
할 용의가 있으시다면.
모두, 모든 것을 껴안고 해주십시오.
모든 부조리와 불합리(하나님 마음에서의 불합리)를 껴안고.
저는 그 길 위에 있고 싶고...ㅋ
부단히. 오히려. 의도하기 보다는...
뚜껑을 화알짝 열어보이려는...
다만 내용물을 위해 조심할 다름입니다.

주절 주절 많았지만.ㅋ
이만. 핑안.

[레벨:0]폴김

2007.06.28 07:32:57

현세와 내세의 연속성을 강조하는 책이 한권 출판되었습니다.
<헤븐>이라는 책입니다.
물론 정목사님과는 좀 다른 색깔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연속성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는 일치하네요.
천국에 대해 모호한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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