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와 사도신경

조회 수 9857 추천 수 138 2007.04.18 23:39:52
예배와 사도신경

설교비평 글을 쓰기 위해서
동영상으로 해당 교회의 예배를 접하다 보면
간혹 특이한 현상을 만난다.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하지 않는 교회가 있다.
대표적으로는 귀신론으로 유명한
김기동 목사님의 성락교회이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주기도는 예수 직접 가르쳐주신 것이지만
사도신경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예배 순서에서 뺐다는 것이다.
현재의 사도신경이 원래는
로마교회의 세례문답 용이었으며
한참 후대에 공식적인 예배 순서로 들어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도신경을
제쳐둔다는 것은 별로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과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도신경을 예배에서 제외하는 이들도 있다.
주로 평신도 중심의 교회나
민중교회 계통의 교회들에게서 그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들은 사도신경에 신학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굳이 예배에서 고백할 필요가 있는가 하고 주장한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같은 구절은
현대인에게 전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문제를 제기한다.
몇몇 교회는 사도신경 대신에
자신들의 교회에서 독자적으로 신앙고백문을 만들어서 사용한다.
예컨대 “샘터 신앙고백”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그 내용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을 근거로 하겠지만
각각 공동체의 취향으로 채운다.
민족교회 취향이나 민중적 취향,
또는 여성신학적 취향 같은 것들이다.

사도신경이 경전인 신약성서만큼의 권위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리고 동방교회에서는 별로 권위 있는 고백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동방교회와 사도신경의 관계는 내가 조사해보지 못했음)
서방교회에 뿌리를 둔 개신교회의 예배에서
이것을 제외한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전승과 역사성을 손상시킬 개연성이 높다.
사도신경은 신약성서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꾸로 신약성서도 사도신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양측 모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신앙적 기준이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사도신경을 예배의 한 순서로 채택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가장 핵심적으로 간추리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예배가 2천년 전체 역사와 소통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지금 우리가 사도신경을 함께 암송한다는 것은
2천 년 전의 초기 기독교 신자들과 동일한 신앙을 고백한다는 의미이다.
그리도 2천 년 후의 신자들과도 신조의 차원에서 소통한다는 뜻이다.

신조를 무시하는 영성은 주로 미국의 각성운동으로부터 나온 영향이다.
그들은 신학과 신조를 무시하고
각자의 신자들이 성령과 무시로 소통하고
사죄의 은총을 받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한국에 복음을 전달한 선교사들이 대개 이런 전통에 서 있는 분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사도신경도 중요하지 않고,
교회력도 그렇고,
리터지도 마찬가지이다.
큰 그림으로 볼 때 역사적이며 공동체적인 기독교 영성이
그들에 의해서 탈역사적이고 개인주의적 영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느님이 바로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신앙의 역사성이 그들에 의해서 훼손된 형국이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이런 신학과 신조 중심의 영성과 예배가 크게 위협받고 있는 것 같다.
개인의 영성이 아무리 예민하다고 하더라도
2천 년 역사를 관통하는 영성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사도신경은 박물관에 전시되어야 마땅한 로마교회의 따분한 도그마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행위와 계시가
역사과정에서 훨씬 풍요롭게 해석될 수 있는
전체 기독교인들의 가장 소중한 신앙적 전통이며, 전승이고, 자산이다.

[레벨:0]無名齋

2007.04.19 00:27:33

목사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도신경은 서방교회 전통이고,
니체아-콘스탄티노폴리스신경(줄여서 니체아신경)이 동방교회 전통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이 초대교회의 세례문답에서 연원했으며,
이단들의 발호에 맞서, 정통 교리를 정립하기 위해,
니체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확정한 것이 니체아신경인 것은,
(즉, 니체아신경은, 전 세계 그리스도교 공통의 신앙고백임)
교회사에 있어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성, 다시 말해, 교회의 소중함은,
결국, 보편성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됩니다.
이것은, 공시적이며, 또한 통시적(역사적)이고,
그리스도교의 경계도 뛰어넘어, 세계적, 우주적인 것입니다.

저도 늘 의아하게 여겨왔고, 비판적으로 바라봤던 점인데요,
공동체성과 사회성, 역사성을 중시하는 민중교회, 진보교회들이,
그리스도교의 보편성을 담지하는 신경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사실상 배척하고,
자신들만의 신경을 만든다든지,
심지어, 예배 시간에 성서 대신 다른 글을 읽고,
설교(강론) 대신 현장 운동가를 초빙하여 강연을 듣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모든 진보교회들이 그렇지는 않겠습니다만,
현재 가장 유명한, 제 거처 바로 옆에 있는 그 교회,
그런 경험을 한 이후, 출입하고 싶은 생각이 줄어들더군요.
그렇게 해서, 결국 80, 90년대 민중운동의 엘리트주의를 못 벗어나는 것 아닙니까.
게토를 형성하면서 민중과 사회, 생명을 주장하는 것은 아이러니라 생각됩니다.

교리 근본주의는 경계해야 하리라 봅니다만,
'텍스트' 그 자체에 대한 근본주의는, 철저히 추구해야 되지 않을까요.
구조주의자들의,
"텍스트 밖에는 구원이 없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 언설을 모방한 것)
라는 테제는, 그리스도교에게도 유효합니다.
자유로운 해석은, 텍스트에 충실할 때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역사적으로 전승해 온 텍스트를 갖고 신앙하는 종교 아닙니까?
그 텍스트에 소홀하면서 타 종교와의 대화, 컨텍스트에의 적극적인 참여는,
본말이 전도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것들도 열심히 해야 할 바이지만,
자기 전공을 등한히 하면서 다른 전공자들과의 대화와,
텍스트의 정신에 바탕하여, 사회 참여를 한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레벨:8]김인범

2007.04.19 00:19:43

대표적으로 미국 남침례교회들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미국에 있는 동안 제가 몸담고 있던 교회의 담임목사와
치열하게 논쟁을 벌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경은 성경으로만 족하다는 의미라고 하더군요.
세례도 다시 침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결국은 특별한 이유가 아니고 그렇게 정해 졌으니 지킨다로 결론이 났지만
그래도 좀 찜찜했던 기억이 나네요.
다른 교단 목사가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하려면
필히 다시 침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통합측에서 안수 받으셨던 분이 침례를 다시 받으시더군요.
뭐 신앙고백이라기 보다는 그저 거기의 통과의례로 생각한다시며,
그런데 저는 왠지 많이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그렇게 변두리로 돌다가 돌아오고 말았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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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07.04.19 15:26:55

사도신경은 니케아 신경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는 점에서 개신교에서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봅니다.

[레벨:1]india

2007.04.19 20:57:08

무슨 운동이든지 처음에 그 배우는 자세가 참으로 중요하지요. 자세가 나쁘면 최대의 효과와 운동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고 또 자유로운 소통과 추구가 막히게 되는 것은 자명하지요.

그래서 폼생폼사라는 말이 폼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국교회에 가서 사도신경을 입술로 고백할 때 그 짧은 고백의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삶 전체를 묵상할 수 있다는 것은 큰 복이지요. 그것만큼 핵심적인 복음이 있을까 싶습니다. 스스로 뜨거워지는 그 복음...

다른 나라에 방문해서 예배를 볼 때 사도신경을 고백하기도 하고 하지 않는 교회도 있지만 첫 배움의 자세가 좋으니 자유롭게 그 예배에 들어가서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굳이 공 예배가 아니어도 길을 가다 또는 데칸고원줄기에 올라가 기도중에 갑작스럽게 사도신경이 입술에서 흘러나오기도 합니다.

그저 폼이 좋아야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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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4.19 23:29:10

김인범 목사님,
남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다는 게 사실인가요.
뜻밖이래서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혼자 명상을 하건
누워서 기도하건,
개인 신앙고백문을 쓰건
하나님이 영으로 함께 하시겠지요.
그러나 에클레시아로서의 교회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라고 한다면
사도신경으로 하나가 되어야 하는 건 마땅한 거 아닐는지요.
교회의 단일성이나 사도성이라는 본질에서 볼 때도
사도신경을 매우 중요한 교회구성 요소입니다.
사도와 속사도, 그리고 교부들들과 여러 신학자들,영성가들,
개개 신자들과 여러 교파의 교회들이
역사를 통해서 동일한 신앙을 유지하고 있잖아요.
사도신경을 포기하는 건
곧 교회의 역사성을 포기하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요.
내가 극단적인 정통주의자인가?...

[레벨:0]無名齋

2007.04.19 23:43:14

정 목사님, 제가 알기로도, 미국 침례교는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것 같더군요.
(남침례교만 그런지, 다른 미국 침례교단들도 마찬가지인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만)

성서 외의, 신경 등, 다른 권위를 부정하는 개신교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한국 개신교회사를 봐도, 기존 교단에서 갈라져 나간 소수 교파 운동들이,
오로지 성서만을 인정하고 다른 권위들은 배격한 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지 참으로 의아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 그 자체가,
그리스도교의 역사적 맥락의 연속선상에서 이루어지는 해석학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오로지 성서만을 인정한다는 것은, 자가당착일 것입니다.
그들이 유일한 권위로 떠받드는 성서,
이것을 읽는 해석 행위 그 자체가, 그리스도교 신앙과 신학의 연속선상의 맥락에 서 있는데,
성서를 신앙의 최고 권위로 떠받드는 자신들의 그 행위 자체가, 그러한 결과인데,
사도로부터 전해받은 신앙을 규정한 신경을 거부한다는 것은,
대단한 자가당착이라고 판단됩니다.
혹, 회원님들 중에, 침례교우님 등, 규정된 신경을 고백하지 않는 교파의 교우님들이 계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물론, 규정된 신경을 거부한다는 것이,
신경의 내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만,
이같은 '성서 근본주의'는, 역사적으로 볼 때,
개신교 내부의 저류에, 늘 잠재되어 흐르다가, 때때로 수면 위로 표출되곤 했던,
개신교 특유의 유전형질적 충동이랄 수 있는데,
그다지 사려깊은 생각은 못 되지 않느냐는, 개인적인 감상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4.20 00:01:34

무명재 님,
옳소이다.
성서근본주의의 한계.
그것은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성서 실증주의이기도 하지만
폐쇄된 성서주의라 보면 되겠소이다.
더구나 그들의 신앙은 인간론적 착상이 아주 강한 것 같소.
판넨베르크의 표현을 빌리다면
개인적 회심 영성에 치우치는 태도가 아니겠소.
그런데 극과 극은 통한다는 말처럼
그들의 보수, 수구적인 신앙이
현대의 민중적이고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그대로 나타난다는 게 신기하오.
양측 모두 기독교의 역사를 훼손하는 것 같소이다.
양측 모두 결국은 신앙의 포퓰리즘에 빠진 건 아닌른지.
(사족, 개신교 특유의 유전형질적 충동이라, 이해하기가 복잡하군.....)

[레벨:0]無名齋

2007.04.20 00:27:43

제가, 말을 요령껏 할 줄 몰라서,
쉬운 말도 어렵고 불명료하게 돌려 표현합니다. 부끄럽습니다.
개신교가, 기존 그리스도교의 권위의 부정에서 출발했고,
루터는 오직 성서,
츠빙글리와 칼뱅, 청교도들은 이를 극단으로 밀어붙여,
성서에 근거가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모조리 박멸해 버렸잖습니까.
성서 근본주의일 수 있고, 반가톨릭적 적개심의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신교 특유의, 권위에 대한 부정은,
유일(최고가 아니라, '유일')한 권위로 표방했던 성서의 권위에의 호소로 이어지는데요,
성서에 근거가 없다고 판단되면, 부정의 대상이라고 판단하는 개신교적 사고방식,
(더 엄밀히 말하자면, 개혁교회적 내지, 개신교 근본주의적 사고방식.
루터교, 영국계 개신교(성공회, 감리교 전통) 계열과 비근본주의 진영은 그렇지 않으므로)
기존 교회(천주교회)와 대결했던 종교개혁 당시에, 투쟁하면서 자신을 성립시킨 그 사고방식이,
아직까지도 개신교의 유전형질로 남아있다고 본 것입니다.

또, 진보진영의 경우,
그리스도교 신앙의 보편성과 연속성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심지어,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의 텍스트를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태도는,
근대 이후 인문주의의 비판의식, 나아가, 냉소적이고 반그리스도교적인 태도에서
크게 영향받은 것이 아니냐 싶습니다.
이들 역시, 개혁파 내지 근본주의 개신교와 마찬가지로,
기존 권위를 부정하면서, 성서의 권위에 호소하거나,
심지어, 성서의 권위마저도 경시하는 태도가 보인다는 말이죠.
(근대 인문학과 성서비평학에 공격하려는 의도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인문 사조와 성서비평이 성서의 권위를 실추시키지 않음은 다들 아실 테구요)

요컨대, 전자나, 후자나,
개신교의 치명적 단점인, 역사단절성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종교개혁은 타당했고, 피해갈 수 없었겠습니다만,
그만큼, 단절의 피해도 컸습니다.
이같은 단절은, 이후에도, 지금까지도,
개신교 모델의 부정적 유전형질로
(단순히 '단점'만이 아닌)
강하게 내재, 작용하는 듯 싶습니다.
개신교가, 반보편주의의 충동을 타고났다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이 될까요?

제가, 보수근본주의 진영 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칼과 진보를 지향하는 진영에도 상당히 실망하고 있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개신교 모델의 '유전적' 결함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목사님을 비롯한 회원님들의 심기를 언짢게 만들 표현 같아 죄송합니다)
개신교 모델에, 반보편주의의 충동이 내재하고 있음을 논증하고,
그 원인과 역사적, 현재적 양상을 규명하는 작업도,
괜찮은 연구 주제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느 교파에서도 달갑게 여길 만한 주제가 못 될 것 같긴 합니다만.
(학문도 수요-공급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인데...)

[레벨:1]india

2007.04.21 05:30:10

무명재님은 개신교 모델의 '유전적 결함' 이라고 말씀을 하시며 '개신교가 기존 그리스도교의 권위의 부정으로부터 출발했고' 말씀하시는군요. 그 권위의 부정을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성경의 권위' 속으로 몰입하는 것이라는 견해는 어떤 유전으로부터 나오는지 참 궁금합니다. 그 paradigm 의 뿌리가 어디에서 오는것인지 참 궁금해요. 혹시 성공회 분이신가요?

[레벨:0]無名齋

2007.04.21 15:46:21

선교사님, 제가 위의 댓글들에서 제 의견을 충분히 설명했다고 스스로 생각했는데요.
중세 가톨릭 교회의 탈선에 대하여,
종교개혁자들이 성서를 준거로 항의하고 개혁한 것에 대해서는 저도 찬성해 마지 않습니다.
그러나, 개혁파(츠빙글리, 칼뱅, 청교도 등. 칼뱅은 상대적으로 덜 파괴적이긴 했습니다)는,
성서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면 모조리 박멸,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갔고,
루터파와 성공회가 독일어권과 영국에만 국한된 국가교회, 민족교회에 머물렀던 반면,
개혁파는 신대륙인 미국을 기점으로, 민족과 국가, 유럽의 경계를 뛰어넘어 넓게 전파되면서,
(장로교만이 아니라, 침례교, 회중교회 등 다수의 개신교파가 개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고,
성공회에서 분파된 감리교 계열조차 앵글로가톨릭 전통보다는 청교도적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세계 개신교의 판도를 주도하고, 개신교의 성격을 규정지웠다고 보는 겁니다.
게다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천주교회는 반개신교성을 강화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체성을 세워갔고,
(트렌트 공의회 이후의 반동종교개혁을 생각해 보십시오)
개신교 역시, 반가톨릭의 길을 걸음으로써 스스로의 성격을 수립해갔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구요,
이러한 한 가운데에, 개신교 종교개혁의 출발이었던 성서 지상주의가 자리잡고 있다고,
저는 보는 겁니다.
첫 출발로서의 "오직 성서"라는 테제는 타당했지요.
그러나, 성서에서 근거를 찾을 수 없으면 모조리 박멸 대상이라는 건 넌센스입니다.
이 구호는, '복음적', 엄밀히 말해 '개신교적'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대상에 대하여,
성서를 갖다붙여 재단, 정죄하는 성서도구화로 치달았구요,
요컨대, 16세기 종교개혁이, 천주교와 개신교 간의 분쟁과 전투로 전개되면서부터,
'오직 성서'라는 구호의 본래 취지는 변질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구호 자체도 극단으로 치달았고, 성서를 자기정체성 확립과 강화의 도구로 전락시켰죠.
천주교와의 투쟁, 대립 가운데서 자기정체성 확립의 이데올로기로 성서를 이용한 것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 분쟁 이후, 개신교가 천주교와 대결하면서
자기정체성을 수립하려 들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종교개혁 직후, 개신교 스콜라주의가 등장하고,
미국이라는 신대륙을 기점으로, '개신교적 열정'에 힘입어 개신교 근본주의가 확립된 것은,
이해가 충분히 가는 바라고 저는 봅니다.
성서근본주의가, 실상은 성서를 자기들 편한 대로 도구로 이용한다는 비판은,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타당해 보입니다.
정용섭 목사님께서, 우리나라 개신교의 대형 교회의 주요 목사님들의 설교를 비평하는 가운데에도,
이러한 점들은 늘상 지적되지 않나요?
결국, 성서 지상주의의 미명 아래, 개신교 근본주의의 게토 언어만을 재생산하고 있는 겁니다.
선교사님께서 말미에 제게 물으셨다시피, 저는 성공회 소속입니다.
루터란 전통과 가톨릭 전통에도 대단히 공감하고 있구요.
이 세 교파에 대해서 전적으로 맹종하지는 않습니다. 비판적인 의문도 많습니다.
반면, 개혁파 설교자 분들의, 성서를 철저히 중심에 두는 설교 태도에 대해서는,
저 또한 많은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서 근본주의, 성서 지상주의는, 쇄신과 개혁의 방법이 못 된다고 믿습니다.
어차피 인간의 인식이란, 해석인걸요.
신앙도, 신학도, 해석학인데,
역사(전통)와 이성( 및 감성), 경험(삶)을 도외시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들 측면을 의식하는 긴장이 없을 때,
'오직 성서'를 말하지만, 실상은 '오직 성서'가 아니라,
성서를 읽는 내 의식의 빈 자리에,
무의식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온당한 이성이 아닌,
지극히 주관적인 내 경험과 욕망들이 자리잡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긴장성이 결여된 안일한 독해가 되고,
결국, '오직 성서'가 아니라, 성서 텍스트를 도구 삼아 자기 욕망만 반추하게 된다고 봅니다.

[레벨:8]하늘소망

2007.04.23 19:21:20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항상 목마르고 갈급한 한 아기엄마입니다.. 우연히 이곳을 알게된게.. 두달은 되가는거 같네요..
여기서 설교도 읽고 저의 갈급함을 채웁니다.... 제가 여기있는 몇개글을 복사해서 읽으려고 하는데... 복사가 안되네요.ㅜㅜ
항상 컴퓨터만 들여다볼수도 없고... 종이에다 복사해서 틈틈이 묵상도 하고.. 공부도 하고싶은데..
안된다면 어쩔수 없지만요~... ^^
깨달음을 얻을수 있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4.23 23:01:13

하늘소망 님,
레벨이 9급이래서 그렇습니다.
제가 임의로 8급으로 승급했습니다.
이젠 될 겁니다.
이런 장치를 해놓으니까
눈팅 회원들이 커밍아웃하네요.
어쨌든지 반갑습니다.

[레벨:8]하늘소망

2007.04.24 09:47:23

앗.. 되요..히히~ 감사합니다 (ㅡㅡ)( _ _) 꾸벅...
바쁘신데....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레벨:1]daniel

2007.04.27 20:27:28

정용섭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비평 책 2권을 읽고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아! 전 신학생입니다.^^
책에서 보고 이 사이트도 찾아왔네요. 너무 좋은 글들이 많아 자주 와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profile

[레벨:21]유목민

2007.05.03 15:03:01

남침례교단 뿐만 한국의 대부분 침례교회가 사도신조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란 말은 일부교회에서는 한다는 말이죠. 그런 교회는 목회자의 신학사조보다는 지금 거론하신 것처럼 이상한 소리를 듣기 싫어 예배시간에 사도신조를 채택합니다.
정 목사님께서 개신교가 서방교회에 뿌리를 두며, 사도신경이 신앙적 기준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신앙의 기준이 성경이라고 말하면 '폐쇄된 문자주의자'라고 말씀하실까요?
침례교회는 엄격하게 구분하면 프로테스탄트가 아닙니다. 그냥 침례교회일 뿐입니다. 개혁 전에도 산발적으로 침례교회가 있었죠. 개혁자들이 개혁을 외치기 전에 개혁을 외친 자들이 아나뱁티스트들입니다. 개혁자들은 '종교개혁의 서자'라고 부르죠. 로마교회로부터 핍박을 당하고 루터나 칼빈으로부터로 핍박을 당하는....
열린 진보를 추구하며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하는 분들이 일방적으로 사도신조를 채택하지 않는다고 매도하는 것은 '독설'이 아닌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학부를 초교파 신학교를 나왔습니다. 알미니안, 칼빈주의를 배웠습니다.
신대원에 입학해서 보니 알미니안 계통의 학부를 나온 사람과, 개혁주의 계통의 학부를 나온 사람들이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신학적 앙숙(?)를 보이더군요. 어느 성씨 가문에서 출생했느냐에 따라서 성씨가 결정되듯이 어느 신학사조를 처음에 배웠느냐에 따라 목회자 신학사조가 결정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먼저 '왜 침례교회는 사도신조를 채택하지 않는가?' 는 알아 보아야 순서가 아닙니까?
일선 목회 현장에서는 사도신조를 채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단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심지어는 이름만 대면 알만하신 목사님께서 '침례교회는 이단이니까 가지 말라'는 소리를 직접들었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교단의 신학도 '상식' 정도의 이해를 요구합니다.
제가 사고 있는 앞 동네에 전주정교회 건물이 있습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져 동산 위에 두루마리 항아리 모양으로 아름답게 지어졌습니다.
옆에 있는 개혁주의 목사님께서 마치 있어서는 안될 것들이라는 표현으로 매도를 하더군요.
아무 소리를 하지 않았지만 '무식의 대로'를 질주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사도신조를 신앙고백으로 채택하지 않는 이유를 올리고 싶습니다.
신앙고백(사도신조 말고)이 없는 교회가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레벨:1]귀천

2007.05.06 18:22:55

안녕 하세요. 캐나다에 사는 귀천 입니다.다비아 회원된것을 자축하며 신입 인사드립니다.
제가 속한 교회는 카나다 서부 침례교단으로 예배중에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큰 잘못인가요.(?) 개념없는 질문에 죄송하오나 너무진지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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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5.07 00:07:47

임영웅 님,
이제야 위 대글을 보게 되었군요.
요즘 다비아에 대글이 넘쳐서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도신경의 전통에 대해서 저도 공부를 좀더 해야겠습니다.
그것 없는 예배를 무조건 매도하려는 건 아니고,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뿐입니다.
왜냐하면 교회 일치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만이 아니라 성경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예배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고,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영성이 없다고 말할 수도 없지요.
교회 일치를 위해서 어느 정도의 전통과 질서를 지키는가 하는 문제는
계속해서 논의 되어야겠지요.

귀천 님,
제가 따로 답을 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큰 잘못이다, 아니다라기보다는
교회일치를 위한 안전장치로서 사도신경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어쨌든지 침례교회에서 사도신경을 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가 왜 진작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군요.
언젠가 기회가 있으면 이에 대해서 저도 글을 한번 올리겠습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1]india

2007.05.08 04:49:28

정목사님 저도 무명재님 글을 복사해서 옮길려고 시도를 하니 동작을 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요청하옵니다.

무명재님께.

무명재님께 질문을 드린후 하이드라바드 라는 도시에서 미팅을 갖느라 오늘에서야 무명재님의 답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뒤늦게 덧글을 달게 되어서 우선 용서를 구합니다.

무명재님의 글을 조심스럽게 읽으면서 저 또한 무명재님과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서지상주의, 성서 근본주의를 오용하거나 잘못 이해해서 context 를 파괴하는 일들을 한국교회뿐 아니라 선교현장에서도 발견하게 됩니다. 그 파괴의 시작은 성서의 도구화를 통해서 발생한다고 봅니다.

무명재님께서 말씀하셨듯 출발로서의 '오직성서'가 그 순수성을 지킬 수 있었다면 context 가 어떠하든 마치 다양한 형태의 컵에 물이 아무런 충돌과 파괴없이 그 모양을 바꾸되 근본이 훼손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안에 엄청난 충돌이 내재해 있음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발견한 것과 동일합니다.)

지금 이 세계는 인간의 이성이 마치 그 손에 칼자루를 쥔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재단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오랜동안 그래왔지요. ^^ )

글자로 나눌때는 얼굴 표정을 볼 수도 없고 그 억양이나 논조를 소리로 들을 수도 없기에 때로는 자의적 해석이 되서 엉뚱한 이해를 낳기도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재미있네요.' 라고 쓰면 글을 읽고 정말 흐뭇해서 재미있다고 표현한 것인데도 마치 빈정거리듯이 받아들이기도 하는 현상이 발생하지요. ㅋㅋㅋ (글을 써 놓고 정말 재미있어서 표현된 글자 입니다.)

저는 정목사님께서 설교비평 때마다 그 기준점으로 이야기 하시던(제 이해가 맞다면) 성서로 돌아간 성서의 이야기가 설교여야 한다는 것이 '성서근본주의-부정적 의미가 아닌' 라고 생각합니다.

언어적 유희가 우리의 감정과 이성 그리고 경험의 산물과 함께 녹아서 진정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방해한다면 그것이 가장 위험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명자님께 성공회분이시냐고 물은 것은 공격적인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입니다.
성공회분들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신 걸까? 아니면 무명재 님의 개인 생각? 일까 라는 단순한 궁금증.

무명재님 좋은 생각을 나누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곳에서 참으로 좋은 나물들을 발견하는 기쁨이 저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비빔밥 재료들이 풍성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재미있습니다.

"The purpose of theology is not just to know certain facts about God what He is and what He does but more, it is the praise of God by man; it is the worship of the creator by the cre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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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07.05.08 16:33:20

인디아님, 저도 무명재님처럼 성공회 신자인데요, 성공회 신자라고 해도 각자 신앙성격이 달라요..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성공회=자유주의라는 편견을 갖고 있어서 심지어는 이단취급하는 경우도 있는데, 침례교회나 장로교또는 천주교나 정교회같은 타 교파들도 그렇지만, 성공회도 신자나 성직자마다 신학성격이나 이념이 달라요..예를 들어서 양심적 병역거부문제에 대해서도 남북이 대치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너무 이상적인 사고라고 보아서 반대하는 분도 있고, 소수의 목소리로 민주사회에서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보아서 찬성하는 분도 있죠..물론 사도신경에 대한 성공회의 목소리는 니케아 신경과 더불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죠.

[레벨:0]無名齋

2007.05.08 23:24:13

선교사님의 답에 저 또한 동의해 마지 않는다고 화답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리스도교 선교를 받았던 200여년 전, 100여년 전은,
동양과 서양이 대면하기 시작한 때였고, 제국주의 침략과 함께 얽혔기에,
비서구권에 대한 그리스도교 선교 또한 문제점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 중 많은 분들은,
한국의 문화에 감동받고, 존경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인도 역시 그렇겠지요. 더욱이, 그리스도교가 전래된지 수백년이 흘렀구요.
선교라는 것, 아니, 우리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살아가는 것 자체가,
상황화, 토착화일진대,
칼 바르트가, 한 손에 성서, 한 손에 신문이라 말했듯,
텍스트와 컨텍스트 양자에 철저하기 위해 늘 치열하게 살아야겠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중세 천주교의 명제를 모방하여,
구조주의자들이, "텍스트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 했거니와,
더욱이, 그 텍스트가 하느님의 말씀이라면,
저 역시, 선교사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성서 근본주의자입니다.
예술에서, 긴장성은 필수적인 미적 요소입니다.
신앙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텍스트와 컨텍스트라는 두 축 사이에서,
하느님 앞에 늘 깨어 있는 긴장을 잃지 않아야겠지요.
사실, 이렇게 보면, 신학과 영성은 불가분의 관계인데 말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말하는 전통, 경험, 이성,
그리고, 이에 제가 덧붙이는 감성,
이것은, 하느님의 영의 이끌림을 받는, 신앙 안에서 제대로 작동한다고 생각합니다.

인도 그리스도교에는 성공회가 상대적으로 비율이 크지 않나요?
저는 그다지 성공회라는 제 소속 교파에 충성하지 않는 편인데^^;
제 생각에서 성공회적인 맛을 느끼셨다니, 저 역시 흥미롭습니다^^
사실, 저는 신학은 감리교(감신대)에서 전공했습니다.
아시다시피, 감리교가 성공회에서 분파되었잖습니까?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이라는 감리교 신학의 4중 표준은,
성서, 전통, 이성이라는 성공회 신학의 3중 표준, 바로 그것입니다.
감리교는 성공회 신학과 사유체계를 거의 대부분 물려받았어요.

그나저나,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대화하니, 지적하신 바와 같이,
그러한 오해가 있었습니다.
말씀하셨듯이, 빈정거리시는 듯하는 느낌도 받았구요.
하지만, 오해가 풀려서 저도 기쁩니다^^

먼 땅에서의 사역 위에 주님께서 주시는 힘과,
성령의 열매들이 풍성하기를 빌겠습니다^^*


* 선교사님의 댓글에 대한 답과 별도로,
침례교우님들의 댓글을 읽고, 외람되나마 제 나름의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침례교가 예배 중에 사도신경이나 니체아신경을 암송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침례교가 사도신경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침례교의 신앙 역시 사도신경의 열 두가지 항목들을 그대로 믿고 고백하는 것이므로,
저는 침례교 신앙 자체에 대해서는 문제 없고, 지극히 건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정 목사님께서 본문에서 말씀하셨다시피,
예배 중에 신앙고백하는 그 의미성의 문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저도 보구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신앙고백은 그리스도교 예배 전통에서,
중요한 한 순서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무리 복음주의 등, 개신교 자유교회주의(*신학적 자유주의와는 전혀 다름) 쪽이라 하더라도,
예배 전통과 그 의미는 숙고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거구요,

주지하는 바이겠습니다만, 사도신경이란 세례 문답입니다.
(천주교든, 개신교든, 성공회든, 서방교회 교파들은 모두 다)

이 점에서는 제가 침례교우님들께 여쭤보고 싶은데요,
침례교 역시 세례 문답은 사도신경으로 하지 않나요?

[레벨:1]india

2007.05.09 04:13:35

무명재님 축복해 주심에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때에 맞추어 한국 교회에 그리고 세계 복음화에 기여할 착한 사람들을 다비아를 통해 교제하고 성실한 비판과 수용의 장을 열어주신것에 저 또한 감사하기만 합니다.

언젠가 감리교단의 (기존 세대와 전혀다른) 목사님 한분을 알게 되었는데 젊은 세대 목사님들로부터(물론 저 또한 젊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존경을 받고 계시는 겸손한 분이라 그분의 설교 또한 들을 기회를 몇번 가졌었습니다.

이제 한국 교회 안에 변화와 깊은 성숙 그리고 유연함을 지닌 영향력 있는 분들이 겸손함으로 섬기시는 모습에 주님께서도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무명재님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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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위디

2007.05.09 14:33:17

이곳을 알게 된지는 2년이 넘은것 같은데 가끔 들려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웁니다. 영적으로 무디고 학구파가 아니라 댓글도 달 능력이 없어서 치열한 고민없이 그냥 무임승차하고 있는터라 좀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계속 묵상하고 싶은 글이 있는데 복사가 안되어 안타까웠는데 등급때문에 그런것이라고 하시기에 복사할수 있도록 부탁을 드리려고 글을 씁니다. 제 신앙의 길을 치우치지 않게 해주시는 지기님들과 모든 다비안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레벨:2]운영자

2007.05.09 15:46:55

위디 님~~

승급 조치가 되었으니 이제는 복사가 될 것입니다.
불편케 해 드려서 송구스럽습니다.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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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위디

2007.05.09 15:57:19

감사합니다. 건강하십시오.

[레벨:1]규발이

2007.05.09 17:54:03

글큰요, 정목사님의 글을 읽고 교회 주보를 확인을 하여 보니 역시 사도신경이 빠져 있더라고요. 근데 그게 불과 얼마전의 일인 것 같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쥐도 새도 모르게 안하게 된 것 같던데.... 갠적으로 사도신경만큼 기독교 신앙을 집약하여 잘 나타낸 것도 없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그게 없어져서 영 서운(?)하네요. 그러나 저라나 본디오 빌라도는 쾌재를 부르겠네요. 더이상 주일에 자신을 씹을(?) 사람들이 없으니 말입니다...

[레벨:6]月光

2007.05.10 16:05:09

사도신경이 나의 신앙고백이 될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걸까여? 교회전통으로서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전 정말 무식합니다.)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과 정말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요. 예를 들자면 예수님의 나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은 포함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의 삶은 빠져있는 것이 걸리구요, 제가 보수적인 교회에 출석하지만 동정녀출생과 같은 부분은 아직 받아들여지지가 않네염.
원체 글쓰기를 못해서 조리있게 쓰지를 못해서 두서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레벨:1]규발이

2007.05.10 17:08:42

예수님의 생애를 어떻게 신앙고백으로 할수가 있을까요? 마4:23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하신 사역을 요약을 하여야 하는 것인지 아님 다른 방법이... 제 갠적인 생각으로는 어차피 예수님의 생애 자체가 그분의 구원의 사역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본다면 전체적인 구원의 사역의 틀속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이해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글고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가 자신의 복음서에 동정녀 탄생에 증거구절로 인용한 이사야서 7:14은 확실히 적절하지 못한 것 같아요..이사야 7:14에서의 여자는 처녀가 아니라 단지 젊은 여자를 나타내는 단어로 왜 이 단어를 동정녀탄생의 증거구절로 가져 왔는지는 언뜻 이해가 되지 않네요....글고 올리브 나무님 저도 정통보수(?)인 장로교고려파 교회에 다니지만 그건 별의미가 없는것 같아요...성경에 대해서 읽고 공부하고 사유하는 것은 전체교회가 결정하는 것이 아닐뿐 아니라 사실상 교회가 이런 역할들을 거의 감당하지 못하는 실정이니까요^^

[레벨:1]소음공명

2007.05.12 16:44:02

침례교회가 사도신경을 교회적으로 강요하지 않는 것은 그것의 기원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유교회' 전통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집단적인 신조, 고백들이 굳어져 교권과 연결되어 각 신자들의 자유로운 신앙고백을 막는다고 본 것이지요. 침례교도들은 성서와 자유교회, 회중교회의 전통에 입각해 자유롭게 신앙을 전개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에 따라서는 침례교회는 전체 회중의 동의에 따라 함께 사도신조를 고백하기도 합니다.

[레벨:2]새즈믄

2007.05.13 08:48:19

매도보다 온전한 이해가 인문학적 아닌가요
예수님 말씀은 없고 신학자 말만 있으니 어렵기만 합니다.
바람불면 다 날아갈 말들.. 지식의 이미지 그 프레임에 갇힌 어리석음을 보고 있습니다.
깨닫음가지고 덕을 세워야지 편가르기나 하면
앎이 복이 되지 않고 혀가 죄의 사슬이 되여 자기 욕심의 허상에 포로가 되는
우를 범 하는 경우가 있읍니다.
창세전부터 앞으로 영원히 우리의 모든 연결 고리는 오직 예수그리스도 뿐입니다.
인간들의 말장난이 아닐것입니다. 손가락을 보고 싸우지말고 달을 봅시다.
모두가 말씀이 육신이 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 본질 아닐까요.

[레벨:5]오영숙

2007.06.08 19:24:15

이 기회에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와 사도신경을 좀 비교해 보면 어떨까요?
사도신경이 서방교회의 전통이라면
동방교회에서 암송하고 있는 니케아 신조가 우리에게 심정적으로 가까울 듯도 한데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저는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긴 하지만
'거룩한 공교회'라는 말에서 약간 주춤합니다.
문자적 의미로 보아서 말이죠. ^^

[레벨:5]오영숙

2007.06.08 19:25:54

어머, 이제보니 제 얼굴이 이렇게 예쁘게 치장되었네요.
운영자님 감사합니다.하하
이목사님이시죠?
목사님께 기쁨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레벨:0]목수

2007.11.24 09:52:50

베토벤의 장엄미사곡 제 3곡 니케아신경 (Credo)에 나온 번역본인
은혜로운 니케아-콘스탄티노플신경 옮겨 놓고 외우다 갑니다.
늘 강건하시길 .... 목수 두손

한 분이신 하느님을
저는 믿나이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믿나이다.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 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믿나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한 본체로서 만물을 창조하셨음을 믿나이다
성자께서는 저희 인간을 위하여, 저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셨음을 믿나이다.
또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음을 믿나이다.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저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수난하고 묻히셨으며
성서 말씀대로 사흗날에 부활하시어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계심을 믿나이다.
그분께서는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또한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이다.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블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시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하나이고 보편되며
사도로 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죄를 씻는 유일한 세레를 믿으며
죽은 이들의 부활과 내세의 삶을 기다리나이다.

아멘.

[레벨:0]엉클캐빈

2007.12.27 13:40:02

어제 잠자기 전 문득, 사도신경과 관련된 제목의 글이 여기에 있다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회사 출근해서 잠깐 들어와 읽고 갑니다...^^ 좋은 가르침 감사드립니다. 정목사님과...댓글 올려주신 모든 분들께.!!

[레벨:1] 김창용

2008.01.04 20:32:47

침례교회는 왜 사도신경을 고백하지 않는가? 그 내용을 부정해서인가? 아니면 다른 형태로 대체되고 있다 믿어서인가? 개인의 신앙고백 (Believer's Baptistm)이 중요한 침례교의 교리가 (탈역사성이 강한것으로 오해 받기도 함) 그들의 예배 형식에 반영된 것으로 봐야 합니다. 넓은 의미에서 신앙고백의 형식을 개교회의 (정확히는 개인) 몫으로 돌리고 있다 할 수 있지요. 개인적이며 탈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것도 형식이라면 형식) 지극히 미국적이라 할까요. 미국에서 침례교가 성장한 근본이유와도 연결이 될 수 있을것입니다. 하지만 예배 공동체로서의 정체성을 기독교 전통속에서 조명해야 한다는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 합니다. 이 점이 결여 되었을 때 발생하는 폐혜를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죠. 한가지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침례교의 예배는 장로교나 감리교처럼 총회차원에서 모범으로 제시되는 예배 형식이 일단 없습니다. 모든 예배는 예배 담당 목회자가 '설계'하며 ('설계' 라는 용어에 대한 사람들의 반감이 있긴하나 이들이 사용하는 '예배를 design 한다' 라는 표현을 달리 적절하게 표현할 수 없어서 사용함) 따라서 개교회마다 다릅니다. 이것은 침례교회의 장점이자 동시에 최대의 단점으로 작용합니다. 예배 담당목사나 담임목사의 취향이 예배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 아실겁니다. 담당자의 신학적 사유와 예전에 대한 이해가 깊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할땐 그 폐혜가 심각합니다. 시대 정신에만 부합할 위험에 곧바로 노출되기 때문이죠. 미 남침례교단에 속한 신학교 (6개) 들의 예배학 교수들은 이러한 위험에 대해 경고하며 정기적으로 예배에 관한 세미나를 열어주지만 참석자들의 기대 (?)와는 다른 내용에 그 분위기는 냉랭한 편입니다. 전통적 예배를 드리던 교회들도 신세대들의 요구에 부응한다는 이유로 신학적으로 필터링되지 않은, 감성만을자극하는 노래들과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형식으로 예배시간을 채우는 것을 자주 목격합니다. 역사를 통해 겹겹이 쌓여온 전례속의 깊은 영성이 이들의 예배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지요. 남 침례교단의 모든교회가 이와같진 않겠지만 상당수의 교회가 이러한 혼란을 겪고 있으며 특히, 새로 개척되는 교회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는것 같습니다. 이를 비판하는 교단내의 학자들은 신학교에서 퇴출당하거나 스스로 학교를 떠나고 있는 실정이지요. 교회력과 예전을 소홀히 한 그들의 출발을 한탄하며 말입니다. 미 남침례교단은 10여년전 moderate 과 fundamentalists로 분단 되었습니다. 가장 보수적이라 자처하는 근본주의자들 (축자영감설 신봉)의 예배 행위가 시대정신에만 철저히 부합하고 있다는 사실도 아이러니지만 많은 한국교회들이 이것을 비판없이 수용하고 있는 현실이 우려됩니다. 교회 성장에만 관심이 있어서 그런것일까요? 미국에서의 교회성장학은 철저히 마케팅차원에서의 접근이며 예배는 이의 하위개념으로 전락한지 오래지요. 이러한 접근으로 크게 성장한 월로우크릭교회가 급기야 총체적 실패를 선언한 마당에 한국교회가 이에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하네요.

정용섭 목사님 반갑습니다. 저는 음악사를 공부하고 있는 나이많은 학생 전도사 입니다. 약 6개월 전쯤 회원으로 가입했는데 이제서야 댓글을 달아봅니다. 송구합니다. 한국의 여느 신학자들과는 달리 리터지에도 관심이 많으신것 같아서 '흥미로웠습니다.' 이 표현에 오해 마십시오. 교회력과 예전의 관계를 중요하게 보시는 목사님에게서 기독교 영성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느꼈다는 의미 입니다. "이천년 기독교 영성이 교회력에 스며있다"는 목사님의 의견에 동의 합니다. 형식과 내용에 충실한 것은 오래가기 마련이지요. 얄팍한 시대정신이 그 속에 있는 가치를 볼 수 없도록 하는것이 가슴 아플 따름입니다. 건승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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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1.04 14:48:20

김창용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위에 다신 글을 보면서
어째 내 생각이나 글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런 상관 없는 사람들인데도,
자란 환경이 다르고 신학적 배경이 다르고 세대가 다른대도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라는 점에서는 깊이 통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원하시는 공부, 잘 하시구요.
예배에 대한 고민이 좋은 결실로 맺어지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1] 김창용

2008.01.04 20:29:01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사역위에도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Happy New Year!

[레벨:0]청개구리

2008.01.04 21:44:40

정목사님의 귀한 사역이 한알의 밀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지만 다비아에서 성서의 권위는 자유주의적 해석(=인문주의적 해석)으로 사실상 훼손된다고 볼때,사도신경과 같은 전승에 집착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또한, 외식하는 바리새인을 정죄하시면서 대림절등의 교회력을 강조하시는 입장도 이해하기 힘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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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1.04 23:24:36

청개구리 님,
반갑습니다.
성서의 권위가 다비아에서 훼손된다고 말씀하셨군요.
청개구리 님에게 그렇게 비쳤다면 어쩔 수 없지만
저는 성서의 권위를 살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진리론적 사유를 통해서
성서를 해석하게 하는 분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그 해석은 당연히 역사와 연관되는 거지요.
성서의 권위를 훼손하면서
사도신경에 집착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셨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신경에 집착하는 게 아니에요.
사도신경도 성서 못지 않은 권위를 갖고 있다고 볼 뿐이지요.
성서를 역사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는 사도신경도 역시 역사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답니다.
둘 다 기독교의 소중한 신앙이 담긴 전승이라는 점에서
그 어느 것도 소홀하게 취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교회력과 예전을 바리새인의 외식(율법?)과 비교하셨군요.
교회력과 예전을 일종의 형식주의로 보는 것은
아마 청개구리 님께서 기존의 교회에서 그렇게 교육받은 탓이 큽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교회력과 예전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성경과 사도신경을 소중하게 여기는 태도와 똑같은 거랍니다.
그게 모두 역사의 산물이거든요.
그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계시한다는 게 곧
기독교의 하나님 이해이며, 계시이해거든요.
좋은 밤!

[레벨:1]김창용

2008.01.05 21:44:56

교회력과 이에 의한 예전이 오늘날의 예배에 꼭 필요한가? 이러한 논란이 있을 때 마다 아마 골방 깊숙히 갖혀있었던 먼지덮인 골동품을 떠올리실 분들이 많을겁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라며 의아해 하실분도 계시겠지요. 이러한 질문이 전혀 틀리진 않습니다. 사람은 문화적 존재이고 자신이 속한 시간과 공간속에서 생산된 언어와 방법으로 생각하고 표현하는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죠. 또 그것이 스스로에게 authentic 하다고 생각하는것은 정당합니다.

하지만 왜 교회력과 예전이 사람들의 관심밖으로 밀려났다 다시 예배학자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는가에 대해선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의 중요성에 대해선 정용섭 목사님께서 기회있을 때 마다 강조하셨기 때문에 반복할 필요는 없을듯 합니다. 대신 이해하기 쉬운 예를 하나 들도록 하지요. 청개구리님의 질문에 부분적으로나마 도움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저가 살고있는 동네에 맥도날드 햄버거 가게가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앞에는 조조부시절부터 100년이 넘게 운영되고있는 식당이 하나 있어요. 그곳에선 주로 집에서 먹는 음식과 비슷한 메뉴들을 내놓지요. 출근시간이 되면 맥도날드는 문전성시를 이룬답니다. 차를 탄체 음식을 주문하고 받는 통로엔 수 많은 차들이 줄을 서있고 시간이 지체된다 싶으면 안으로 들어가서 직접 아침메뉴중 하나를 사가지고 나오지요. 이러한 광경은 이곳 뿐 아니라 미국전체, 어쩌면 동일한 프렌차이즈가 있는곳이라면 세계어디에서든지 비슷하리라 생각됩니다. 간편하고 맛있는 것은 물론이고 가격또한 저렴하죠. 아이들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갖가지 장난감과 어린이용 메뉴를 제공하는 맥도날드에 마음과 입맛을 빼앗겼다라고 하면 틀리지 않은 표현일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맥도날드가 그 맞은편에 위치한 전통식당보다 더 나은 음식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입맛을 끌지는 않지만 화학조미료와 전이지방질이 함유된 재료를 쓰지 않는 맞은편 식당 음식의 질이 높은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또한 그 식당이 지금껏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균형잡힌 양분을 바탕으로 오랜 기간동안 시행착오를 겪으며 완성된 조리법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진정으로 동네 사람들의 건강에 기여하는 곳은 획일적 메뉴로 입맛을 무디게 만들고 중독성이 강한 맥도날드 음식보단 고른 영양분을 제공해주는 전통식당의 음식들 이지요. 동네 곳곳에 위치한 이런 식당들은 순발력과 마케팅 전략이 뛰어난 패스트푸드점들에 밀려 고전하고 있지만 수십년간 단골로 오는 사람들이 있어서 꾸준히 문을 연다고 합니다. 공공건강의 적이라 지탄 받던 맥도날드는 부랴부랴 전통식 아침메뉴를 개발해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만시지탄이지만 맥도날드를 향한 전문가들의 비난은 오히려 약이 된듯 합니다.

교회력에 의한 예전은 조직신학적 바탕위에 설계된 완성도 높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부분에 있어서) 예배입니다. 항해사의 손에 들린 지도가 (수많은 항해 경험에 의해 완성된) 목적지를 향한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듯이 조직신학은 신앙인들의 항해에 있어서 시행착오를 줄이는 역할을 하지요. 항해지도가 가리키는 항로가 가장 지름길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안전한 길임은 이전 항해사들의 경험에서 증명된 것입니다. 교회력과 이에 따른 예전도 예배자들에겐 마치 이 항해지도와 같은 것이지요. 우리의 예배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이 확실하다면 항해사가 지도를 확인하듯이 전통 교회력과 예전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미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수많은 교회들에서 드려지는 예배의 방향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향하고 있다' 라는 진단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이 누구보다도 문제점을 잘 알고 있으면서 침묵하는 이유를 모르는바 아니지만 아픈 아이를 위해 맛보다는 고른 양분이 들어있는 음식을 만드는 것이 어머니의 의무이듯 과감히 일갈을 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기에 더 그렇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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