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포퓰리즘

조회 수 7903 추천 수 113 2007.05.17 23:27:55
설교와 포퓰리즘

청중인가, 성서 텍스트인가?
현대 설교학의 주요 관심은 청중을 어떻게 설교행위 안으로 끌어들이는가에 놓여 있다. 예컨대 수요자 중심의 설교, 귀납법적 설교, 스토리텔링 등등, 설교학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용어들은 설교자와 청중의 간극을 좁혀보려는 노력들이다. 이런 노력은 기존의 설교가 청중을 무시하는 독단론에 빠졌다는 반성에서 출발한다. 이런 지적은 일단 옳다. 전통적 설교는 청중들의 실제적인 삶과 영적인 상황을 간과한 채 기독교 교리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이는 흡사 동화책을 읽어야 할 초등학생들에게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이나 횔덜린의 시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전통적 방식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설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고, 따라서 청중들로부터 외면받기 마련이다. 이런 전통적 설교 방식에서 벗어나서 청중들의 눈높이에 맞춘 설교를 해야 한다는 현대 설교학 선생들의 주장은 교회 현실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그들의 주장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기존의 전통적 설교에서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 영적인 소통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현상적 분석은 옳지만 그것의 원인과 처방은 옳지 않다. 영적인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원인이 청중들을 중심에 두지 않았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한국교회 안에서 청중은 언제나 주인공으로 대접받았다. 교회성장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존재이유로 자리하고 있는 한국교회에서 청중들이 외면 받는 일은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도 없다. 청중과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문제는 기껏해야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나 설교자의 가부장적 태도에 해당되는 것들이었다. 예컨대 부정확한 발음, 불분명한 요지, 내용 전개의 산만성, 부적절한 예화사용 같은 요소들 말이다. 이런 것들은 설교를 결정하는 중심 요소들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개선한다고 해서 설교의 위기가 극복되지도 않는다. 설교를 잘 하기 위한 프로그램들이 계속해서 생산되는데도 불구하고 설교의 위기가 조금이라도 극복되는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에 대한 방증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이러한 처방들이 청중을 설교 행위 안으로 끌어들이고, 따라서 설교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그들의 주장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어디에 있는가? 전통적 설교가 청중과의 소통에 장애를 일으키는 이유는 청중의 눈높이를 무시한다는 사실보다는 훨씬 근원적인 사태에 놓여 있다. 그것은 곧 설교자가 계시사건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태다. 설교자가 계시를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전한다는 말인가? 언어가 자기에게 말을 건다는 경험을 못하는 시인이 어떻게 시를 쓴다는 말인가? “생명의 신비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켜켜이 간직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와의 진정한 만남이 없는 설교자의 설교가 어떻게 청중들의 영혼에 공명을 일으키겠는가? 문제는 설교자와 청중의 소통이 아니라 설교자와 성서 테스트 사이의 소통과 회통이다. 설교자가 성서와 하나님의 통치와 그 구원 현실에 눈을 떴다면 그는 자기가 본 것과 들은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그의 경험과 인식이 영적인 지평에 속한 것이기만 하다면 청중의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청중들의 영혼과 대화하기 마련이다. 그는 굳이 커뮤니케이션 이론이나 연설방법, 수사학, 또는 대형프로젝터를 비롯한 각종 시청각 교재를 이용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신이 본 것만큼 자연스럽게 청중들에게 전달된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설교행위에서 청중에 대한 고려가 별로 필요하지 않다는 게 필자의 지론이다.
노파심으로 한 마디 해야겠다. 설교행위에서 청중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하나님 계시의 존재론적 우위성을 강조하려는 것이지 청중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의 설교에서도 청중은 빠질 수 없었다. 예언자들에게도 청중은 있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허공을 향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대상을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선포된 계시라 할 수 있는 설교에서 청중이 중요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필자가 강조하는 것은 설교행위에서 청중 중심이 아니라 계시사건, 언어사건, 구원사건이 중심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신탁(神託)이다.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오늘의 설교학이 제시하는 청중중심주의는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설교보다 오늘의 설교는 훨씬 심각한 포퓰리즘에 빠져버렸다는 게 그 이유이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은 상품*이 되고 말았다. 설교는 그 상품을 포장하는 기술로 전락했다. 청중중심주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민중의 속성이 작용하고 있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생활에서 끊임없이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했고, 가나안에서 끊임없이 가나안 농경문명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듯이 설교의 청중이라 할 수 있는 민중은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삶에만 민감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민중들도 국가경제가 어떻게 되더라도 자기의 작은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산다. 민중은 이중적이다. 20년 전 6월 항쟁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 변혁의 에너지를 분출하기도 하지만, 새만큼 간척사업을 전북도의 숙원 사업으로 추진하듯이 반(反)생태적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다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필자는 이런 민중들의 속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 역사의 현실이기 때문에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설교자는 민중들의 이런 속성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들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뿐이다.

*전통적 설교의 대안으로 등장한 이런 현대적 감각의 위로설교는 전통 설교가 안고 있는 문제의 극복을 성서와 기독교 전통에서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아주 세속적인 시대정신에서 찾고 있다. 그런 태도는 현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겠다는 일종의 상품논리이자 대중추수주의와 다른 게 아니다. 여기에는 청중을 중심으로 삼겠다는 발상이, 즉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을 포괄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복음의 정체성을 훨씬 심화시키는 게 아니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사는 대중들의 욕구에만 눈높이를 맞춤으로써 결국 복음의 역동성과 날카로움을 순치 시키고 만다는 위험성이 숨어 있다. (졸고 “전통설교와 위로설교”, 기독교 사상, 2003년 10월 호)

오늘 한국교회에서 설교만이 아니라 가장 거룩한 행위라 할 수 있는 예배 자체가 볼거리를 제공하는 쇼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도 역시 포퓰리즘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이다. 소위 ‘열린예배’는 바로 그런 성격을 적나라하게 보인다. 예배는 청중들의 은혜나 만족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열린예배는 극도로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에만 영적인 안테나를 맞추고 있다.

종교적 여흥
청중들의 눈높이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설교와 예배로 인해 결국 기독교는 청중들에게 종교적 여흥(entertainment)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마치 한국의 공영TV방송국이 거대 연예오락프로그램 생산기지로 바뀐 것처럼 종교적 오락을 제공하기에 바쁘다. 온갖 종류의 이벤트와 프로그램이 신앙과 선교라는 명분으로 교회 안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소비자가 왕이다.”는 경제 구호가 설교 현장에서도 진리로 통하는 실정이다. 어떤 설교자는 설교할 때 청중들을 반드시 한번은 웃겨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흡사 TV 시트콤이나 멜로드라마처럼 그냥 청중들을 웃고 울리는 데만 초점을 맞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의 예배와 설교는 설교자의 입담에 따라서 대중성을 얻는 데 매우 효과적일 수는 있지만 성서의 놀라운 세계를 경험한 설교자의 자리는 아니다. 유진 피터슨의 아래와 같은 경고는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북미의 신앙은 근본적으로 소비자 중심의 신앙이다. 미국인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생산품 정도로 여긴다. 자신들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고 더 잘 살 수 있도록 돕는 그런 존재 정도로 생각한다.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미국인들은 마치 소비자처럼 가장 좋은 제품을 찾기 위해 쇼핑을 한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거의 인식하지도 못한 채 거래를 시작하고, 최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외관으로 하나님이란 상품을 포장한다. (Eugene H. Peterson, 차성구 역,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56쪽)

설교의 여흥적인 요소를 극대화한 설교자는 대전중문교회의 장경동 목사이다. 그의 설교는 설교의 희화화이다. 필자는 그것을 설교자의 자학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했을 뿐이다. 개그맨들이 인기를 끌기 위해서 익스트림을 구사하듯이 말이다. 어쨌거나 평신도 대중집회만이 아니라 장로 모임이나 심지어는 목사 모임에까지 그의 설교가 상종가를 기록하고 있다는 이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우리는 한국 교회 강단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대중주의의 극치를 볼 수 있다. 오직 청중들의 호응만을 설교 평가의 유일한 기준으로 삼아온 한국 강단에서 장 목사의 출현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성장이 멈추거나 뒷걸음질 치는 한국 교회가 장 아무개 목사 같은 사람을 통해서 힘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장 목사가 지나치게 웃기기는 하지만 복음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니까 큰 문제는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오늘 이런 논의는 우리에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필자는 신바람 넘치는 그의 설교에서 일종의 허무주의 영성을 맛보았다는 사실만 지적하려고 한다.(졸고 “허무주의 영성”, 기상 2005년 2월호 참조). 실제로 그의 설교에는 내용이 전혀 없었다. 설교의 내용은 날이 갈수록 심하게 형해화(形骸化) 하고 대신 사람을 웃게 만드는 온갖 재료, 정보, 기술만 그 자리를 지배할 뿐이다.
필자는 이 자리에서 장 아무개 목사의 설교만을 꼬집어서 비판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흡사 피에로처럼 연기하고 있는 그는 우리 모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속도와 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우리는 기본적으로 이런 대중주의를 추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요즘 목회자들이 상담학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있다는 현상도 대중주의의 한 단면이다. 성서 텍스트가 담고 있는,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열려 있는 생명의 신비에 들어갈 생각은 없이 청중들의 정서와 심리를 읽는 인간론에 매달린다는 것은 결국 설교자의 영적인 촉수가 오로지 청중들에게만 쏠려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이것이 바로 오늘 한국교회 강단이 처한 근본적인 위기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눈치 채고 있을 것이다. 말씀이 제공하는 하나님의 존재론적 통치만이 설교자의 영성이 살아날 수 있는 토대인데도 불구하고 그런 말씀의 세계는 날이 갈수록 축소되고 청중들의 종교적, 또는 통속적인 욕구에만 기울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설교자들의 영성은 확보될 수 없다. 영성이 소진된 설교자들은 설교의 좌절감에 빠지거나 청중들을 닦달하는 데에 몰두하기 마련이다. 포퓰리즘이 극복되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을 면할 길은 요원해 보인다.

통속과 자기연민
이해를 돕기 위해서 설교의 포퓰리즘을 한국문학의 그것과 잠시 비교하겠다. 인간구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지평에 놓여 있는 신학과 문학이 포퓰리즘에 빠질 수 있다는 점에서도 서로 비슷한 메커니즘을 보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공지영의 신작 소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 한국소설 중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한다. 문학비평가 이명원은 공지영의 소설이 “위안의 서사학, 감상주의 또는 문학적 센티멘탈리즘을 통해 세상을 바라”봄으로써 놀라운 대중성을 확보했다고 평했다. “공지영의 소설은 깊은 대중주의의 출발점인 것이다.” 이에 반해 정문순은 그네의 소설을 “통속과 자기연민, 미성숙한 자아”의 표현으로 보았다. “그의 소설 전편을 꿰차고 있는 것은 조숙한 여자아이 수준의 인식과 크게 다른지 않다.” 정문순에 의하면 공지영만이 아니라 90년대에 상업적으로 잘 팔린 신경숙과 은희경도 이런 혐의를 피할 수 없다. “여성작가들이 어린아이의 미성숙한 자아를 가져야 했던 것은 세상이 여성작가들에게 어른이 되지 않기를 요구한 지배적인 통념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분석이 한국교회 설교에도 적용된다고 보아 한 대목을 더 인용하겠다.

드세지 말고 세상과 맞장 뜨지 말아야 하고 고분고분하며 하며 세상과의 불화를 감당하기보다 쉽게 물러서고 자기연민에 탐닉하는 것은, 공지영 등 여성작가들이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이었는지도 모른다. 상처입거나 패배를 두려워하는 한 공지영의 작품을 화해와 사랑이 유난히 강조될 수밖에 없다. 이는 그녀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극심한 피로에 지친 내면을 위로받고 싶을 뿐 세상과의 장면 승부를 감당할 수 없는 독자들과 출판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겨레 21, 2007년 4월24일 자에서)
  
세상이 요구하는 것에 치우치는 포퓰리즘 문학이 자기연민(나르시시즘)에 사로잡혀서 내면의 위로만 추구하는 것처럼 포퓰리즘 설교도 역시 이런 틀에 갇힌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신적 미성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홀로 진리의 길을 갈 줄 모르고 옆에서 누군가 옆에서 보아주기를 바란다. 청중으로부터 인정받을 때만 영성이 살아난다면 그는 분명히 성숙한 사람이 아니며, 그런 영성은 사이비이다. 신탁에 사로잡힌 설교자는 청중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과 상관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영적 세계를 열어갈 줄 안다. 그게 없는 사람은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면치 못하는 사람처럼 청중들과의 교감에만 모든 관심을 쏟는다. 그 결과는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향한 맹목적인 추구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어떻게 대중들을 거슬러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겠다. 한 마디만 한다면 그 당시에 사이비 예언자들의 선포는 대중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반면에 엘리야와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에게서 보듯이 참된 예언자들의 선포는 외면당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요즘 우리와 달리 대중들의 안목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바울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내가 하직도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일꾼이 아닐 것입니다.”(갈 1:10) 결정적으로,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은 곧 그의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언자와 사도들의 전통에 근거하고, 궁극적으로 예수의 운명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설교자의 설교행위는 청중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다. 투르나이젠도 바로 이런 관점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설교는 인간을 이해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일이 행해지는 사건이다. 교회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모든 인간적인 것에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대답하는 것이다. 따라서 청중의 심리를 읽으려고 하거나, 이른바 인간이해를 위해서는 이제모두 모든 노력을 그만두기로 하자.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생활체험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강단 위에서 생활체험을 이야기하는 일(다른 사람의 것이거나, 자신의 것이거나 불문하고)이나 신앙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그만 두자. 설교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 인식, 하나님의 선포가 행해져야 한다.(Eduard Thurneysen, Die Aufgabe der Predigt, 102. 루돌프 보렌, 설교학실천론, 139에서 재인용)

이제 설교자들은 청중들에게 그만 아부하고, 그들을 그만 닦달하자. 청중을 풀어주자는 말이다. 그들이 스스로 성서 텍스트와 영적으로 대화할 수 있도록 설교자는 옆으로 비켜서자. 혹시 우리는 성서 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를 볼 줄 모른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 좋은 뜻이든 나쁜 뜻이든 청중들에게만 매달려 있는 건 아닌지. 이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리라.

[레벨:11]QED

2007.05.18 00:41:24

목사님 글을 읽을수록 제가 듣고 본 설교들이 그리고 그것이 속한 공예배가 부족했거나 가졌던 문제점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됩니다만, 어떤 형식이나 내용으로 설교와 예배가 이루어져야하는지 구체화된 모습은 머리속에 잘 떠오르지 않고, 점점 엄격히 갖춘 제례형식에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고음과 저음의 장단으로 읊조려 나가는 사제, 연기, 어린아이들의 청아한 찬양소리가 어울려 퍼지는 로마 카톨릭의 미사가 그려집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갖던 니고데모가 했던 질문처럼 저도 우문에 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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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07.05.21 20:43:29

imprimatur님, 현대 로마 가톨릭 미사에서는 라틴말이 쓰이지 않습니다. 트리엔트공의회이후 해외교회에서도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지만, 지금은 자국언어로 쓰여진 미사예문으로 미사를 드리죠..이는 한국 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집니다. 그리고 가톨릭 전례는 님의 관점에서는 형식적일지 모르지만, 성찬의 전례와 말씀의 전례가 균형을 이룬 훌륭한 예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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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5.19 00:21:10

'임프' 님,
그렇지요.
손이 잡히지 않을 겁니다.
'저도 잘 모르니까요.
도가도비상도'라는 말이 여기에도 딱 맞는 것 같군요.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언어로 표현하고,
예배로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그 하나님을 우리가 모르는데 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하나님에 대한 존재유비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으로도 하나님을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지요.
그것만이 아니라 진리는 늘 그런 식이겠지요.
다만 우리는 기독교 역사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교회력과 예전을 중심에 두고 신앙생활을 했는지 배워야 합니다.
그게 반드시 가톨릭의 미사예전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개신교회도 예전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력도 있구요.
교회력과 예전은 청중의 종교적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최선의 방식입니다.
흡사 베드리의 레퀴엠처럼
사람이 요구가 아니라 천상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거지요.
감사.

[레벨:1]india

2007.05.21 01:50:47

"언어가 자기에게 말을 건다는 경험을 못하는 시인이 어떻게 시를 쓴다는 말인가?" 촌철살인의 명쾌한 한마디 이군요 목사님. A.W 토저의 설교를 들을 때마다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있었는데 그것이 목사님의 한마디에 담겨있는듯 합니다.

다만, 장경동 목사님에 대한 목사님의 견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습니다. 선교사인 제가 가장 오랜 동안 기도해오던 대상중의 한 분인 제 아버지(Atheist 였습니다.)께서는 어머님께서 즐겨 시청하시는 기독교 방송을 우연히 옆에서 보시다가 예수님께 마음의 문을 매우 많이 여셨습니다. 그 설교자가 바로 장경동 목사 이십니다.

기독교 방송에 나오는 유수한 설교자들(그중에는 목사님께서 칭찬해 마지 않는 설교자도 있습니다.) 모두에게 귀를 막고 있던 제 아버님께서 포퓰리즘으로 가득찬 허공에 소리지르는듯한 장경동 목사의 설교에 귀를 열고 그의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매일 그 설교 방송을 기다리는 엄청난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난것을 한국에 방문했을 때 보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감사기도를 이렇게 했습니다. "하나님, 이 시대에 수많은 설교자들이 ,,,주옥같은 설교들이 있지만,,,,그리고 선교에 온 삶을 바치고 아버지와 함께 지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장경동 목사님을 이 때에 보내셔서 무신론자인 아버지의 마음을 열게 하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장경동 목사의 설교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구원이 필요한, 마음이 딱딱한 육신의 아버지께는 그가 가장 적합한 설교자임에는 틀림이 없는 현실임을 목도 하면서 그저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린양도 어여삐 여기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안에 장경동 목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한국 방문때 제 육신의 아버지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더군요..."천하의 목사들 다 필요없다. 장 아무개 목사만큼만 설교하면 진작 예수 믿었겠다.."

장경동 목사가 포퓰리즘을 동기삼아서 설교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의 설교의 방식을 포퓰리즘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의 설교의 동기(motive)를 확인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설교와 포퓰리즘' 이라는 글의 전체 맥락은 군더더기가 없지만 그 안에 장아무개 목사를 포퓰리즘의 한 예로 가져온 것은 그의 설교가 낳은 열매는 모두 가라지라는 결과를 선언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굳이 장아무개 목사를 거론하지 않아도 포퓰리즘이 만연한 현대 교회 강대상의 세태와 설교 본연의 자세에 대해서 충분한 그림이 그려졌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시선을 바꾸어서... 정목사님께서 장아무개 목사뿐 아니라 몇몇 목사들의 이름을 대전제에 대한 반론용 재료로 사용하는 것도 일종의 포퓰리즘(정목사님의 비평의 동기를 모른다고 가정할 때)이 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대한민국의 어떤 목사의 설교에도 꿈쩍 않던 제 육신의 아비의 귀를 열게 했다는 이유로 장아무개 목사를 변호하는 것이 아님을 우선 말씀드립니다.

요컨데, 정목사님의 '설교와 포퓰리즘' 이 비빔밥 이라면 logos 와 holyspirit 으로 잘 비벼가던 비빔밥에 - 사실 정말 맛있게 먹었습니다. 정말 기쁩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 참기름을 넣으려다가 공업용 기계기름을 넣은듯 합니다.

살리고 기쁘게 하는 비평이 아닌 죽이는 생명이 없는 비평이 되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어야 겠습니다.

목사님의 비평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가끔 돌이 나오지만 잘 비벼서 섬기시고자 하는 동기(motive)를 알기에 사랑하는 마음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이 전세계에 있으니 든든하실겁니다.

축복합니다.

[레벨:3]삶에서..

2007.05.22 00:17:57

이신건 교수님을 통해 종종 들어왔는데 이교수님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목사님의 글을 보며 역시나
한숨과 기대가 같이 나오는건 왜일까요??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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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5.23 19:56:50

인디아 님,
늦게 대글을 달게 되었습니다.
요즘 내가 정신을 빠뜨리고 다니거든요.
장경동 목사님에 대한 인디아 님의 입장을 존종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도 좋다고 봅니다.
저는 제 시각으로 그렇게 보였다는 걸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장 목사님의 설교의 동기를 보아야 한다고 지적하셨네요.
모든 목사님들의 설교가 동기는 좋은 거에요.
박옥수, 김기동 목사님의 설교도 역시 동기가 순수하답니다.
그건 틀림 없습니다.
저는 장경동 목사님의 설교 내용을 두고 하는 이야기이지요.
어쨌든지 인디아 님에게
장 목사님의 설교 행태가 좋게 보였다니,
저와 시각이 조금 다르구나 하고 지나가면 되겠지요?
먼 이국 땅에서의 선교 사역에 주님의 도우심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사족- 인디아 님의 글 끄트머리에 "축복합니다." 하는 문장이 나오는데,
표현이 재미있군요.
축복받겠습니다!)

프리실라

2007.05.25 14:42:07

또 하나의 사족-

"인디아 님의 글 끄트머리에 "축복합니다." 하는 문장이 나오는데, 표현이 재미있군요. 축복받겠습니다!"

아마도 정 목사님의 이 말씀에는 '우리가 축복을 어찌 준단 말인가?' 하는 뉘앙스가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아니면 제가 잘못 읽은 거구요.

하지만 이 표현은 맞는 표현입니다.
'축복합니다' 라는 말은 복을 빌어준다는 뜻이지 복을 준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 대한 답으로 '축복받겠습니다.' 라는 표현이 오히려 어색합니다.
그냥 '감사합니다' 정도가 좋겠지요. (정 목사님 표현방식을 흉내내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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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5.25 23:52:03

프리실라 님,
그렇군요.
저에게는 좀 낯선 표현이래서
제 대답도 정확하지 않았던 것 같군요.
감사.

[레벨:0]無名齋

2007.05.27 16:07:54

imprimatur님,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예배 형식이,
(개신교가 그것을 버렸을 따름이지, 천주교만의 예배 형식이 아닙니다)
개혁교회의 일방적이고 설교 중심의 예배보다는 백배는 낫고 합리적입니다.
그리스도교 전례의 기본 구조는,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교와 대화입니다.
과월절 어린 양의 잔치(성찬)지요.
이러한 성령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의 맥락 가운데서 성서 말씀의 선포와 설교(강론)도 있는 것입니다.
개혁교회는, 이것을 상실해 버렸기에 지적되고 있는 설교의 문제들이 벌어지는 것 아닌가요?
천주교에, 열린 예배니, 그런 따위가 왜 없는지 아십니까?
그리스도교 전통의 예배 맥락 가운데서는,
말씀의 선포와 신앙의 감수성 모두 충족되기 때문에, 아예 필요가 없는 겁니다.

imprimatur님의 댓글 가운데에는,
천주교의 전통적 미사 전례는 나쁜 것이고, 개혁의 대상이라는 선입견이 전제로 깔린 듯 합니다.
외람되오나, 옳은 태도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정 목사님의 글에서 어떤 인상을 받으셨다 말씀하셨거니와,
설교(강론)란, 어디까지나 전례(예배)적 행위입니다.
전례(예배)의 맥락 가운데서 취급하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지요.
한국 개신교 대다수의 무분별하고, 기준도 없는 예배 실태,
이것에 대한 문제 의식과, 설교에 대한 문제 의식은 같이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여담입니다만, 전 세계 그리스도교 가운데,
개혁교회(장로교), 감리교, 오순절 계통 등,
비전례적 자유교회주의 교파들이 과연 몇 %나 차지한다고 보십니까?
얼마 안 됩니다.
일단, 천주교와 정교회가 압도적 대다수를 먹고 들어가구요,
개신교 중에서도 루터교와 성공회가 장로교보다도 더 큰 대교단들이니,
전 세계 그리스도교 가운데,
전통적 전례로 예배를 드리는 부류가 80~90%는 된다고 봅니다.
숫자 싸움 같아 좀 그렇습니다만.

도현

2007.05.27 21:11:13

주옥 같이 아름다움을 내포하면서 상대에 대한 섬세한 배려를 보고 이 곳에 가입 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바랍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5.28 00:13:43

도현 님, 반갑습니다.
다비아를 좋게 평가해주셨군요.
자주 뵙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도현

2007.05.28 13:18:34

당분간 틈나는 데로 들려서 이곳에 있는 좋은 글을 통해 배움을 가져 보고 싶습니다..
글이 많아서 어디서 부터 어떻게 공부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혹시 강의가 MP3파일로 된것이 있나요? 왜냐면 시간나는데로
자투리 시간에 듣고 배울수 있는 장점이 있거든요..

[레벨:1]india

2007.05.29 02:45:19

아이고...정성스럽게 써내려간 글을 '글쓰기' 버튼을 누르자 마자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맥킨토시 컴퓨터가 다비아에서는 자주 실수를 하는 군요.. ^^

결론은 정목사님 감사합니다.~

[레벨:1]조이

2007.05.29 19:47:37

지난달 서초동성당에 결혼식이 있어 몇년만에 성당이란델 가보았습니다.
신부 아빠는 미국 지사로 떠나시기 하루 전, 그러한 서운함과 함께
예쁘디 예쁜 신부와 늠름한 신랑을 주인공으로 하는 혼인식이었는데
그렇게도 넓은 예배당에 한 10%나 겨우 채웠을까? 보통의 예식장 같으면
너무 안왔다!! 하고 탄식했을 것인데, 장소가 장소인만큼 그모습 마저도
한갓지고, 멋졌습니다. 고적하고, 적당히 어두운 분위기가 개신교회의
엄청 밝은 모습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천주교 신자는 반드시
성당에서 결혼식을 한다.. 천주교의 결혼식은 예배의식과 같다..."는
말씀을 한참 하시더군요. 그리고 이어지는 혼인의식들이, 배경의 찬란
장식들(개신교는 그런걸 우상이라고 배척하나요?)과 함께 지금도 기억납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비둘기 형상은 성령님을 가리키는 것인지.. 한참을..
마음이 참 편하고, 결혼의 장면들이 하나 하나 살아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밤에 가끔 집 근처를 산책할 때, 부근의 개척교회, 중소 규모의 교회를
가리지 않고 그 앞에 나무벤치라도 있으면 조금씩 앉아 봅니다. 이 때는
가지고 나온 영성서적(문고본!)을 읽거나 데리고 나온 강아지를 쓰다듬어 주면서..
요즘은 많은 교회들이 건물 앞이나 옆에 작은 쉼터를 만들어 놓습니다.
한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작지만 아늑한 기도처를 만들어 놓아 주신다면
동네를 산책하다가 정규적으로 그곳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집에서, 길에서, 어디에서도 드릴 수 있는 기도지만... 성당에 모처럼 오면
아, 기도드리고 싶다, 는 "감상"에 젖게 됩니다. 하하, 그런데 신부님들께선
한결같이 왜 그리도 "포포포포.. 풀리줌'이 없으신지.. 참으로 평이하시게...
말씀을 전해 주시더군요...

[레벨:0]폴김

2007.06.20 10:56:59

저는 어떤 집사님의 추천으로 여기에 다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목사님의 책을 읽고 많은 부분 공감도 하였습니다.
저에게 이 싸이트를 추천해주신 집사님을 봐서라도 가능하면 좋은 글들을 남기고 싶은데,
정목사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옥의 티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우선 이 글과 관련해서는 india님이 정확하게 논평해주셔서 제가 더이상 추가할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한가지 추가한다면 한국교회의 포퓰리즘적 현상을 모두 다 포퓰리즘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일예로 열린예배는 단순히 포퓰리즘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너무나 큰 시대적 흐름입니다.
시대적 흐름이라고 감히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의미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때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미련한 방법들을 사용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옳고 그름을 논할 때는 그 기준이 선교지향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빌1:15-18).
비록 동기가 비판받을 만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면 관용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그런 태도를 가지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하나됨은 요원할 것입니다.

저는 정목사님의 그 탁월한 지성에 감탄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목사님에게 주신 은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목사님의 글들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좀더 관용적인 마음이 엿보였으면 좋겠습니다.
...

[레벨:0]등불

2007.06.21 20:45:21

글을 읽고 제가 전하는 설교에 대해 많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초대받은 설교자가 되기를 위해 노력하고(?) 싶습니다.

[레벨:0]김헌중

2007.07.02 00:54:56

다 쓴 글을 날리지 않는 방법

제로보드는 좀 문제가 있습니다.
카페 같은 곳에서도 글을 길게 써서 시간을 오래 끌다보면
로그아웃이 되어버리고 다시 로그인을 하는 사이에 글은 날아가 버립니다.
제로보드에서 로그아웃은 되지 않았는데 글이 날아가 버리는 일도 있습니다.
제로보드에서 비밀번호를 인식하시 못해 수정 삭제를 할 수 없는 일도 있습니다.
제로보드도 계속 개선, 개발되고 있는 거 같습니다.
문제는 날리지 않는 것인데, 잊지 마십시오.
글쓰기를 클릭하기 전에 먼저 복사를 해 두십시오.
먼저 복사하는 거 잊지 마세요.

그리고 제가 쓰는 또 한가지 방법, 이것이 가장 안전
혹시 내가 실수로 복사하는 걸 잊었다고 해도,
날려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마련한 시스템이겠지요.
보내지 못한 메일 다시 불러오기가 있습니다.
다음의 한메일인데요.
편지쓰기에 그런 기능이 있어서 참 고맙더군요.
종이에다가 펜으로 쓰는 게 가장 안전한데 번거롭잖아요.
어쨌든 컴으로 쓰다가는 날려버리는 일이 항상 있을 수 있습니다.

[레벨:0]김헌중

2007.07.02 01:14:03

이런 글을 계속 읽다가 글쓰기에서 복사가 되는지 볼려고 드레그를 시도했는데 되지 않네요.
암튼 좀 길게 써야 될 거 같다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서 작업을 하던지.
쓰다보면 길어져 버리는데 그걸 어떻게 압니까.
일단 글을 등록하고 수정으로 가서 드레그를 하면 그건 됩니다.
한데 날려버리는 건 처음 글쓰기 할 때 입니다.
그래서 좀 변칙으로 일단 등록부터 하고 나서 다시 수정을 하고
거기에서 글을 완성하는 방법을 쓰기도 합니다.
제로보드가 아직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관리자님 이왕 이렇게 된 거 아까 댓글을 읽으니까,
등업하면 드레그를 할 수 있다고 하신 거 같은데
이 홈페이지 운영 취지에 맞게 누구나 드레그 할 수 있도록
허용하심이 어떨런지 말씀드립니다.
아님 회원가입 하신 분들에게만이라도 허용하실 수는 없는 일인지요.

[레벨:0]kantique

2007.07.14 10:59:47

내개 아주 감동적인 설교, 잊혀지지 않는 설교가 요즘도 가끔 생각키게도 하고 싱긋 웃음을 자아내게합니다. 아마도 15년전쯤일거예요. 미사가 진행되고 있었지요. 조금 늦게 들어갔기에 막 말씀 선포가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주일날은 성서 3구절을 봉독합니다.구약,신약, 신약 가운데는 복음을 제외한 다른 장에서, 그리고 성직자인 사제(司祭)가 그날 복음을 읽고 강론(講論)이라불리는 설교를 하지요
그날은 구라주일(求癩主日)이었습니다. 이말은 "구라" 푸는 날이아니라 나병환자를 위한 날로서 문등병환자를 위해 기도와 헌금을 하고 그분들의 고통을 환기하고기도 하는 날이지요. 이러한 날들은 아주 많습니다. 가톨릭 전례는 전례력이라는 것(예를들면 대림절,성탄절, 수난절,부활절,등)과 함께 년간일정이 정해져 있어서 군인주일, 농민주일,등 소외된분들을 위한 날들이 있거든요.
그런데 복음을 읽는 신분님이 뿔테안경을 쓴 미소년같은 얼굴이었어요. 그러니까 아직 애숭이 성직자로 보였지요. 그분께서 성서를 읽기를 마친후, 잠시 회중을 둘러 보시더니, "여러분 오늘은 구라 주일입니다. 모두 5분동안 묵상하겠습니다." 라고 하시고는 제단 뒤편에에 마련된 사제석으로 돌아가 앉더니 눈을 감으시는 거예요. 신자들도 모두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에 잠겨 있었지요.
벼란간, 정말 벼란간 모든 공기가 정지된듯 고요속으로 빠져들고 수천명의 신자들은 그 젊은 사제에 말한마디로 기침소리조차 없는 완전한 묵상의 경지에서 빠져드는 거였어요.
..........................

인간의 세치혀로 모든것을 설파할것 같지만, 꼭 그럴가요,
오히려 목상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느님의 신비,
귀한 설교의 기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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