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가?

조회 수 10147 추천 수 126 2007.06.05 15:14:37
나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가?

몇 달 전 늦은 밤에 책을 읽다가 밑줄을 긋기 위해서 사용하던 연필을 책상 위로 떨어뜨린 적이 있었다. 떼구루루 하는 연필 굴러가는 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깼다. 독서삼매에 빠져 있던 나는 그 순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소리는 아주 오래 전 내 일상에 깊숙이 각인된 것이었다. 1960년 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그 당시 우리는 학교에서 연필 따먹기를 많이 했다. 사실 연필만이 아니라 구슬, 딱지 따먹기도 거의 일상적인 일이었다. 연필 따먹기는 주로 학교 책상 위에 연필을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자기의 연필을 튕겨서 상대 연필을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방식이었다. 우리는 상대 연필을 정확하게 가격하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했고, 상대의 가격을 피할 수 있는 요령도 배웠다. 연필과 연필이 부딪치는 소리, 상대 연필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 그리고 굴러가는 소리가 내 무의식 깊은 곳에 들어 있었던 것 같다.
내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린 그 연필 굴러가는 소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더 근본적으로 ‘소리’는 무엇일까? 왜 소리가 여기에 이렇게 ‘있는’가? 물리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이 소리는 공기의 진동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라는 지점에 이르면 우리는 ‘소리’ 앞에서 경천동지의 경험을 할 수밖에 없다. 지구에는 소리가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이다. 이 말은 곧 소리가 없을 수도 있었다는 뜻이다. 비존재의 개연성이 존재의 당위로 변했다. 이런 점에서 소리는 바로 창조능력과 다를 게 없다. 그래서 요한복음 기자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고 고백했다는 말일까?(요 1:1)
청각장애인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에게 소리는 비존재이다. 소리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의술의 도움을 받아서 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 세상은 전혀 다르게 경험될 것이다. 세상은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들리기도 하는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의 세계로 돌입할 것이다. 그러나 청각장애를 계속 갖고 있는 사람들은 선생의 설명을 통해서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지만 그것을 실체로 경험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그들에게 소리는 여전히 비존재이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청각 비장애인인 우리는 청각 장애인들과 전혀 다른 소리의 세계에서 살아가지만 소리의 존재론적 능력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우리에게도 역시 소리는 비존재이다. 우리에게 소리가 너무나 익숙하다는 게 문제이다. 너무나 많은 소리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소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청각장애인들은 소리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청각비장애인은 소리의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 때문에 양자 모두 소리의 존재론적 능력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이와 달리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새와 대화할 수 있었다는 건 그가 바로 새의 소리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일 것이다.
화두를 붙들고 용맹정진하는 불교의 선사들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오는 소리를 통해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영운지근(嶺雲志勤)은 청소를 하다가 자기가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대오 경험을 했고, 청허휴정(淸虛休靜)은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크게 깨우치고, 고봉원묘(高峰圓妙)는 목침이 침상 아래로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대오각성하고, 초석범기(礎石梵琦)는 성루의 북 소리를 듣고 대오했다고 한다.(김영민, 한겨레 18.0c, 2007년 3월23일) 소리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곧 진정한 예술경험이고, 구원경험이다. 위대한 작곡자들에게서 우리는 이런 선승들과 비슷한 경험을 발견한다.
2000년 사순절 기간에 필자는 독일의 베를린에 있었다. 베를린에 있는 필하모니의 연주를 관람할 수 있었다. 교향악단과 합창단이 함께 연주하는 베르디의 레퀴엠이었다. 고전 음악에 대한 소양이 별로 없는 필자가 그때의 경험을 음악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소리’에 대한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종종 불협화음을 내는 베르디의 그 작품에서 죽음과 삶의 경계에 놓여 있는 작곡자의 영적인 상태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가 작곡하기 전에서 이미 그런 소리가 있었는가, 아니면 베르디에 의해서 창조되었는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소리는 이미 그곳에 있었다. 다만 베르디가 그것을 나름으로 구성했을 뿐이다. 그런 일을 아무나 할 수는 없다. 음악적인 영감에 사로잡히는 사람만이 존재론적 지평에서 소리를 듣고 그것을 청중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작곡도 분명히 예언자들의 경험과 비슷한 신탁(神託)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선승들의 깨우침과 작곡가들의 존재론적 소리의 경험, 예언자들의 신탁과 사도들의 생생한 예수 경험이 있는가? 즉 나는 하늘로부터 내리는 소리를 듣는가? 이것을 판단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 자신도 그것을 판단할 수 없다. 이것은 오직 성령의 배타적인 권한이다. 나는 다만 조심스럽게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연습에 충실할 뿐이다.

[레벨:5]홀스타인

2007.06.05 15:56:29

목사님의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한겨례신문을 통해서 소개된 '꽉찬 설교 속빈 설교'와 '설교냐 선동이냐' 두권의 책을 아내와 더불어 거의 집중하여 빠져들다싶이하며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곳에 들려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게 되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설교외에는 글이 복사가 안되어서 조금 불편합니다. 글을 복사하여 읽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6.05 19:54:31

홀스타인 님,
처음이지요?
안녕하세요?
승급이 되었으니가 드래그가 잘 될 겁니다.
부부가 함께 책을 읽고 대화할 수 있다니,
멋있군요.
이곳에 두분에게도 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0]OxyR

2007.06.06 00:26:45

안녕하세요. 종종 목사님글을 읽다 보면 뭐 옥의 티 찾기는 아니지만 자연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사실에대해서 일반인들 처럼 실수를 종종 하시는 것을 봅니다 (과학에 대한 신학자나 목사의 지식이 일반인들과 달라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를 들면 위에서 "물리적 차원에서만 본다면 이 소리는 공기의 진동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만 가능한 현상이라는 지점에 이르면"에서 1. 정확히 이야기하면 공기의 진동현상"뿐"은 아니며 빛과 같이 소리또한 입자성과 파동성을 아우르는 현상이며 2. 지구에서만 가능한것은 우리의 관심이 지구에 주로 한하기때문이지, 다른 천체에도 대기 (물론 우리와 같은 대기의 조성은 아니지만)가 있음으로 그곳에도 소리가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가 잘안다고 하는 소리도 우주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다른 현상으로 다가 올수 있다는데 물리학적 신비함 (우리가 잘 모르기 때문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옥의 티라는 이야기로 시작했지만 하나님이 우주 만물 창조의 시발이라한다면 그 소리의 신비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신비와 연결된다고 할수 있겠습니다. 그분을 밝히 드러내는 분이 성령님이라면 그 단순한 소리도 하나님의 신비와 연결되겠죠. 그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마도 제가 아는한에선 대오의 순간이 아닐지.
한마디만 더한다면 목사님의 글중 "별들은 떠돌이별이 없지만 태양은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태양의 빛만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떠돌이별이 없이 단지 불을 토하는 별만으로 구성되어 있다면 그곳에서는 생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약간 말이 옆으로 흘렀습니다만, 태양의 빛은 이 우주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생명의 에너지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입니다."에서도 사실 우리 태양계의 태양 말고, 다른 태양계에서 혹성이 그 태양 주변을 도는 것이 발견되었음으로 태양이 이 우주의 거의 유일한 생명의 에너지인지는 아직 더 살펴봐야만 할것입니다. 만약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우리의 태양계를 포함한 작은 우주의 개념이라면 위의 진술은 맞을수도 있습니다.
과학적 사실은 항상 새로운 결과가 나오며 항상 재 조명되기 때문에 어떤 현상이 이렇다에서 끝나기 보다는 그것을 보고 생기는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행하는 인간 활동이라는 점에서 과학에 매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궁극적 미지의 신비라면 그것을 추구하며 인간의 말과 글로 풀어낸다는 방식면에선 신학과 과학이 동떨어진 학문이 아니라는 목사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 합니다. 목사님께서 쓰신 글에 괜히 딴지 거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학문하는 사람의 버릇이라서 그냥. 죄송합니다.

[레벨:2]헌숑!!

2007.06.06 00:19:45

정용섭 목사님!! 안녕하세요~
정말 좋은 글들 너무나 감사합니다!!
인사를 드려야지 하면서도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사실은 저도 자료를 한글파일로 복사해서 읽고 싶은데 드래그가 안되네요~
저도 승급좀 올려주세요...
로그인을 안해서 그렇지 저도 자주 방문하는 우수회원이랍니다!!ㅎㅎ
아무튼 한국교회를 위해 너무도 필요한 역할을 감당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다비아공동체가 바른 신학과 신앙을 위한 첨병으로의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레벨:1]india

2007.06.06 00:26:44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시며 누구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가 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이지요.

[레벨:1]소음공명

2007.06.06 01:00:56

Regula fidei, viva vox.
profile

[레벨:3]수우

2007.06.06 04:31:54

새벽4시
닭우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자동차 시동거는 소리, 월요일이면 늦잠좀 자고 싶은데 채소장사 아저씨 확성기 소리
등등......
그런 소음이 싫어서 산속으로 들어왔습니다.
내 안의 소리 를 듣습니다.
이 글은 기독교 여성 문예 에 이번에 당선된 제 수필 입니다.
올해 들어 세번째 수상한 작품 입니다.
제목은 < 산, 하나님 , 그리고 나 >

이 깊은 산속에서 가장 가까이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으니 바로 나의 숨소리다.
그동안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일에는 심각하게 쏘다니며 해결해 주기도 하였지만 정작 내가 누구인지 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사람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제 한 몸 굴레에 눌러 살 수 밖에 없다. 세상의 법칙과 나를 구속한 모든 것들 내 모습을 보여주기 위하여 본위 아니게 위험도 부려본 가공인물의 옷을 벗고 싶다. 자기가 되기 위한 투쟁 이다. 홀로 있음은 내안의 나를 만나는 길이다. 존재의 근원에 도달하지 못하여 내가 낯설다.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물어야 한다. 나의 속 얼굴이 드러나 보일 때 까지 묻고 물어야 한다. 귀속의 귀에 대고 목소리 속의 목소리로 간절하게 물을 것이다.

[레벨:2]양손잡이

2007.06.06 05:05:43

정목사님의 글을 읽다보니, 언젠가 제가 느꼈던 감정이 생각나 그 때 끄적였던 것을 옮겨봅니다. 순간 순간 들려오는 수 많은 소음 속에서, 하늘의 소리를 듣고 일상의 신비를 깨닫는 것이 쉽지많은 않은 것 같군요..

마음아, 눈을 뜨렴.

좁은 내 방의 창문은 남쪽을 향해 나있습니다. 그 창문 틈새론 맑은 햇살이 들어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하루 종일 도시의 소음이 들려옵니다. 도시의 온갖 기계음들은 가뜩이나 지친 몸을 더욱 피곤하게 할 뿐 아니라, 마음까지 불안정하게 만듭니다. 도시는 이렇게 항상 다그칠 뿐, 마음에게 참 불친절 합니다. 아마 도시는 마음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가 봅니다.

도시가 주는 피로함이 칼날처럼 날카로와 질 때면, 하릴없이 고요한 숲 속을 찾습니다. 초록 빛 동산, 맑은 공기, 찬 바람, 따순 햇살.. 그 속에 잠겨 있으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영적 감수성과 시적 상상력이 저절로 깨어 납니다. 낙엽이 구르는 소리가 들릴 정도의 적막함 속에 거하면, 들리지 않던 소리도 들려 옵니다. 그리고 그 동안 잊고 지내던 (우스워 보이는) 대화를 시작합니다. 꽃과 나무와, 새와 개미와, 내 마음과 그리고 님과.. 그렇게 수다를 떨다보면 마음은 얼굴에게 평화로운 웃음을 선물로 주고, 내 속의 나무도 훌쩍 자라남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깨어나면 상상력도 더불어 활짝 피어나, 잊고 있던 과거의 추억과 미래의 꿈으로 마음껏 여행을 다닙니다. 어릴 적 뛰놀던 작은 골목 길과 아카시아 따 먹던 아련한 들녘으로, 그 이와 정겨웠던 따뜻한 모닥불 가와 눈물나게 아름답던 해질녘 동산으로, 그 분의 눈물로 흘러넘치는 은혜의 강가와 천사들이 뛰어노는 기쁨의 들판으로, 사랑과 평화가 높은 산으로 서 있고 정의의 강물이 자유롭게 흐르는 나라로, 마음껏 돌아 다닙니다.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나면, 문득 상상력은 영적 세계의 거울이 아닐까 상상을 해 봅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영적 세계와 시공간에 매이지 않는 상상력은 비슷하니까요. 어쩌면 우리의 상상력은, 이 땅에서 영원을 미리 맛보라는 그 분의 선물은 아닐런지요.. 마음의 눈을 크게 떠서 영원의 신비를 자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렇다면 그 나라가, ‘순금으로 된 집과 다이아가 깔린 길’이 있는 싸구려가 아니라 , 숲 속에서 맞이 했던 그 아침의 맑은 풍경같은 것임을 쉽게 알 수 있을 텐데요..

하지만, 침묵의 대화와 영원으로의 여행을 뒤로하고 다시 도시의 현실로 돌아오면, 그러한 하늘의 신비를 자주 맛보기가 어렵습니다. 도시의 소란함 속에서도 마음을 지켜내면 좋으려만, 그게 그리 쉽진 않습니다. 수 많은 소음들이 출렁거릴때면, 신비는 빛바래지고 마음은 다시 탁해지고 맙니다. 저 옛날의 로렌스 형제나 사두 선다 싱같은 깊은 영성의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든 하늘의 폭포수에 깊이 잠겨 일상의 평화를 누렸다는데, 나는 여전히 물가에서만 촐싹대나 봅니다. 시끄러운 시장바닥의 한 복판에서, 거대한 공장의 온갖 기계음 속에서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크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앤소니 드 멜로 신부는 개구리의 기도라는 책에서 이런 우화를 들려줍니다. 한 수사가 어느 날 밤 기도를 하는데 개구리 한 마리가 개굴개굴 울어 대어 분심이 되었습니다. 그 소리를 무시하려고 애써 보았으나 모두 헛일이었기에, 창문을 열고 외쳤습니다. “조용히 해라! 기도 중이다.” 그 명령을 듣고 개구리 뿐 아니라 삼라만상이 고요해 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또 다른 소리가 기도를 방해했습니다. 바로 내면의 목소리였습니다. “어쩌면 하느님께서는 네가 노래하는 것을 기뻐하시듯이, 개구리의 노래도 기뻐 하실지 어찌 아느냐?” 수사는 비웃으며 대꾸 했습니다. “개구리 우는 소리가 하느님 귀에 듣기 좋을게 뭐야?” 그러자 목소리는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그 소리를 만들어 내셨는지 아느냐?” 수사는 그 이유를 찾아 보기로 결심하고, 다시 창문을 열어 명령 했습니다. “노래해라!” 그러자 그 개구리가 다시 울더니, 근처에 있던 모든 개구리들의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습니다. 수사가 그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을 때, 이제는 방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안 들으려고 애 쓰지 않는다면, 모든 소리는 밤의 고요를 짙게 해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자 수사의 마음은 삼라만상과 조화를 이루게 되었답니다.

자연의 소리만이 아니라, 기계의 소리 또한 고요를 짙게 해 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내 분심의 원인이 밖의 소리가 아니라 안의 소리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밖의 소음보다는 속의 소음을 탓해야 소음을 잠재울 수 있다는 겁니다. 하기야 그럴 수 밖에요. 마음의 정결한 속삭임에는 귀를 막고, 탐욕과 욕망의 소음으로 내 속을 잔뜩 채워 놓았으니, 마음이 탁해질 수 밖에요. 마음이 지쳐 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인거지요.

이제 지쳐있는 마음과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겠습니다. “마음아, 참 미안했다. 착한 네가 다시 깨어나렴, 이제 눈을 뜨렴?” 이렇게 마음에게 용서를 구한다면, 아마도 거룩한 바람(聖靈)께서 내 속의 소음들을 잠잠케 해 주시겠지요. 그 때 쯤이면, 신이 난 착한 마음이 어느 곳에서건 하늘의 노래를 마음껏 부를테고, 나도 도시의 소음쯤에는 아랑 곳 없이 하늘의 평화를 마음 가득 담을 수 있겠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6.06 11:56:32

oxy R 교수님,
반갑습니다.
좋은 지적에 감사드리구요.
제 글에 그런 허점들이 있네요.
소리의 신비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소리도 햇빛처럼 파동만이 아니라 입자일 수도 있군요.
태양만이 행성을 갖고 있다는 제 표현은
글의 진도를 빨리 나가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확률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요.
제 상식이 옳다면
우리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또 하나의 태양은 2,3광년 떨어져 있고,
행성이 있는 또 다른 태양은 7(?) 광년 떨어져 있는 게 맞나요?
아이구 어지러워라.
앞으로도 제 글에 티가 발견되면 지적해주세요.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7.06.06 14:02:45

올려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정선생님때는 연필따먹기가 유행했군요. 제가 초등학교를 다닌 80년대에는 지우개를 씨름시켜서 이긴 사람이 지우개를 가지는 지우개따먹기가 유행했습니다.

[레벨:0]충만

2007.06.06 22:05:49

정목사님께서 공개적으로 질문을 올릴 것을 말씀하셔서 이렇게 몇자 적어 봅니다.
정목사님께 계시라는 용어 대신에 신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시는 이유를 여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기 노출, 하나님의 자기 수여, 즉 전인격적인 하나님과 설교자의 만남을 위해 계시가
신탁이라는 용어보다 더 적절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탁은 '소리'를 듣게 합니다. 하지만 저의 생각에는 그것에는 위로부터 오는 전인격의 수여는
결여되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히려 신탁에는 위로부터 오는 전인격적인 수여라기보다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투영이 있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계시는 '소리'도 포함합니다. 하지만 목사님께서 위에서 쓰신 그 '소리'는 단순히 숫자로 표기되는
'음'이 아니라 전인격적 소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아래서부터 위로의 투영이 아니라 위로부터 전적인 타자에게서부터
오는 전인격적인 소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계시라 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저는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에게 이러한 계시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주어진 계시인 성서를 기반으로 하며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구원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재경험하는 것이리라 봅니다.
여기에는 계시되어져야 알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죄도 경험될 것입니다.
만약 설교자가 설교를 준비하며 성서 텍스트 속에서,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계시된 삼위 하나님을 만난다면 그것은 계시가 아닐까요?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만남은
오직 그분 쪽에서 그분이 지금 여기서도 자신을 열어 보이셔서 우리에게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수여하셔야만
사건으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저의 생각은 아직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지 못한 학생으로써의
생각입니다.
profile

[레벨:4]위디

2007.06.08 11:32:17

성령님의 소리를 듣고자 하여도 내 안에 방해하는 요인들이 많아서 듣지를 못하는것 같습니다.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실텐데 말입니다.

[레벨:5]살군

2007.06.10 02:15:07

'무'에서 존재에로의 이행이 새삼 새롭게 다가옵니다.

인간의 완고하게 닫힌 마음으로 인해 누멘에 대한 경이로움이 묻혀버린 시대에

'소리'로서 존재에로의 이행을 보여주신 목사님의 탁월한 통찰력에
다시 한번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레벨:2]솔나무

2007.06.11 18:31:19

소리..
요즈음, 저의 아이 둘이 '리코터'에 관심이 많아서 좋아라 합니다.
리코더와 달리 큰놈이 불고 있는 것 중에 '단소'를 배우지요.
두 악기의 소리냄의 역할이 다릅니다.
리코더와 단소...
단소를 가르치는 선생의 한마디..
"소리는 바람이 지나는 것의 흐름을 방해하는 무엇때문에 생깁니다.
대나무 숲에 바람이 지날 때 갈라지는 현상에 소리가 들립니다."

리코더와 단소의 소리를 내는 방식이 틀린 것은 알고 계시리라...
단지 악기와 바람이 있다고 소리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람의 세기와 필요에 따라서 아름다운 소리가 많들어 지니 말입니다.
소리를 만들다는 말은 틀린듯하네요.
원초적으로 있었던 그 소리,음을 만난다고 할까요.

두 녀석이 혼성으로 연주를 하는 것을 보면 절로 흥이 납니다.
잘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연주를 할 수 있으니 행복합니다.
가끔 두녀석과 청계천 다리 밑에서 연주를...
모인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했던 기억이 생갑납니다..."브라보! 앵콜!" 외국인이..

점점 손가락의 놀림이 빨라지는 것을 봅니다.
하루하루 실력이 성장하는 모습에..
이 녀석들이 공부보다는 배짱이...

우리 인간은 딱딱한 악기와 같지만,
성령의 바람이 우리를 지날 갈때 살아있음의 소리를 날 수 있으니..
나의 소리를 말하지 않고 소리 근원을 들으려 힘써야 할..

소리! 귀하네요.

[레벨:0]key2heart

2007.06.12 03:26:21

정용섭 목사님,
목사님의 설교 비평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설교가 무엇인지 배우고 싶습니다.
설교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할 수 있는 책을 추천해 주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살고 있는 관계로 영문책이면 좋겠습니다. ^^

늘 건강하시고 건필하세요.

P.S. 제 메일 주소는 lee_sangmok@hotmail.com입니다. 바쁘시더라도 꼭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a

[레벨:6]남다윗

2007.06.13 16:34:45

정용섭 목사님 매주 설교하는 자로서 저의 고민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을 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지만 매주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전하는 고통이 큽니다. 좋은 글이 많이 있어서 프린트해서 읽고 싶은데 승급 부탁합니다. 그럼 강건하십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6.16 22:51:01

key2heat 님,
설교에 관한 책을 소개해 달라고 하셨는데,
특히 영문책이 좋다고 하셨는데,
바쁘더라도 꼭 알려달라고 했는데,
미안하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도움을 못드리겠네요.
저의 설교비평은 설교학이 아니라
조직신학과 인문학으로 푸는 작업이랍니다.
조직신학과 인문학 책을 소개할 수는 없겠지요?
굳이 설교학 책이라고 한다면
저는 루돌프 보렌과 헬무트 틸리케의 책만 읽었습니다.
설교에 관해서 관심이 있다면
굳이 설교학에 관한 책보다는
신학전반에 대한 공부를 잘 하는 게 좋습니다.
물론 아울러 인문학 공부도 따라야겠지요.
아자!!!

[레벨:0]폴김

2007.06.20 17:47:50

정목사님의 글에 대해 자꾸 비판적인 댓글을 쓰는 것 같아 영 맘이 편치 않지만
목사님께서 비판의 소리에도 열려있을 줄 믿고 편한 마음으로 씁니다.
윗 글의 서론은 너무나 인상적입니다.
소리에 대한 통찰력은 저의 지적인 지평을 열어주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본론이 너무 약하네요.
하늘의 소리(성령의 음성)에 대한 것이 본론이 아닌가요?
만약 하늘의 소리가 성령의 배타적인 권한이라고만 한다면
공을 성령께 넘긴 것이니 우리가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회피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이 글은 하늘의 소리에 대한 글이 아니라 단순히 소리에 대한 글이라 여겨지는군요.

개인적으로 바라기는 목사님께서 오순절 계통의 그리스도인들의 경험들에 대해서도 좀 열려있었으면 합니다.
그들의 세계가 목사님의 세계와 전혀 다르지만
그들 또한 오늘날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데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의 글들을 읽어보면 그쪽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닫혀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오늘도 다만 하늘의 소리를 들으려고 힘쓴다는 목사님의 말 속에서 겸손함을 봅니다.
이 글의 서론 부분이 너무나 수려하여 목사님의 겸손함이 더욱더 빛이 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하늘의 소리를 듣고 사는 이들의 경험의 진실성이 오해받을 수 있기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레벨:0]꼴통

2007.06.20 20:26:22

저에게도 드래그 할수 있는 아량을 베풀어 주시면.. ^^
profile

[레벨:100]이길용

2007.06.20 20:43:19

꼴통님 승급해 드렸습니다. 좋은 활동 기대하겠습니다.

[레벨:0]야긴보아스

2007.06.21 17:04:33

이시대의 사도의 길을 게속 하시길................

[레벨:2]솔나무

2007.06.21 17:33:34

꼴통님,
어찌 서로 호칭을 부르기에 송구합니다.
골통이라함을 심통같은 느낌인데...
꼴통이라니 저와 같은 성향의 이름을 만나니 왠지 걱정스럽네요.
혹시 개명하실 의사는 어떠신지요?

[레벨:0]꼴통

2007.06.22 14:20:30

ㅎㅎ 죄송 제가 워낙 꼴통이라서여.. 저는 꼴통이라 불러주시는게 좋지만.. 좀 불편하시면 바꿔야겠지요 ^^
암튼 승급 감사합니다. 하나님 만난지가 얼마 안되고 지식도 너무 짧아서 눈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넘 대단하신것 같아서 부럽기도 하고 ^^ 암튼 감사 또 감사합니다.

[레벨:1]알곡이

2007.06.26 19:49:32

목사님~ 처음 뵙겠습니다...안녕 하세요! 올초 부터 들어와 글만 훔쳐 보다가 반년만에 가입 했습니다..조금전에 장문 댓글을 썼는데 글이 올려지지 않고 로그 아웃 되어버렸어요... /영혼을 바르게 볼수 있는 글을 올려 주셔서 오늘도 이 말씀을 가지고 깊은 생각의 골로 빠지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준비 하는 양식 잘 받아 갑니다!!

[레벨:0]paul777

2007.06.26 23:29:24

일을 할 때 아무리 힘들일이지라도 마음 맞는 사람과 함께 하면 힘들지 않지요 앞으로 더 많은 글을 습득하여야겠지만 목사님의 글들이 제게 일이 힘들지 않음을 알게 해 주어 위로가 됩니다. 내일도 새벽 설교라서 이만 글을 줄여야 하지만 새벽에 들려오는 잔잔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렵니다.
샬롬하세요!!

[레벨:0]폴김

2007.06.28 07:39:07

목사님의 글에 대해 비판적인 댓글을 달고서 이런 부탁하기가 좀 염체가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정목사님, 변승우목사의 설교에 대해 한번 비평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 사람이 요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위험한 것 같습니다. 아니 많이 위험한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역할을 하면 좋겠지만 제가 내공이 좀 달려서...
그리고 저같은 무명인 말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레벨:0]김헌중

2007.07.02 00:05:34

댓글을 썻는데 등록하면서 모두 날아가 버렸습니다.
꽤 길게 썻거든요. 시간적으로도 다시 쓰는 건 어렵고
금방 썻던 내용이니까 머릿속에 그대로 있을 거라는 생각도 착각입니다.
많은 문제의식을 가지고 한 주님을 섬기는 지체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대화를 소망합니다.

목사님의 글, 인상깊게 읽었습니다.
저는 청각장애인이라면 베토벤이 떠오릅니다.
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악보를 그려낼 수 있었을까.

물론 목사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이런 장애를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고 믿습니다.
구약시대에 빽빽한 구름 운데서, 시내산 불꽃 연기 속에서 그리고 회막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우뢰와 같은 목소리를 듣고서도 하나님의 말씀, 뜻을 거듭거듭 거역한 구약백셩들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고백하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고 거듭거듭 넘어지는 삶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는데 성령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싫어합니다.
마치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만물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 있는데도 부러 거부하고 우상을 섬기는 것처럼(롬 1:20) 우리도 성령의 탄식을 외면하고 주님께서 죄를 이기는 능력을 주실려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죄에게 져서 넘어지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허물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은혜에 감사합니다.
한 번 길게 썻다가 날려 버리고 급조해서(?) 썻습니다.
제로보드에서 글을 써 놓고선 다 날려버린 경험이 몇차례 되는데 또 날렸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성령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믿고 기쁨으로 다시 급하게 씁니다.
앞으로 많은 교제 갖기를 소망하고 노력하겠습니다.
은혜를 나눌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레벨:1]아침이슬

2007.07.05 17:13:25

목사님의 글들은 생각을 흐트려지지 않게 하는 힘이 보입니다. 앞으로 자주 들러 신학 공부하는 마음으로 글들을 꼼꼼히 보겠습니다. 제가 오래전부터 존경하는 박영선목사님과 테니스를 칠 정도로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시니 더 호감이 갑니다. 그런데 드래그 안되는데 드래그 해 갈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레벨:0]ark007

2007.07.07 12:06:37

목사님의 글을 접한건 사막에서 물을 만난것 같은 시원함과 통쾌함이었습니다. 잠시 들른 조그만 서점에서 설교비평에 대한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나도모르게 빠져들어 2권을 서점에서 다 읽었드랬습니다. 늘 뭔가 아쉬움과 답답함으로 예배와 교회생활을 하지만 늘 고민과 갈등은 과연 사람들은 이런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깊이를 체험하는가 였습니다. 제가 그렇지 못했음은 말할것 도없구요.
아무튼, 매일 들르는 곳입니다. 저도 드래그좀 할수있게 해주세요.^^*
등록한지는 저도 어느정도 되었는데 로그인안하고 늘 글만 읽고 가다보니...
열심히 읽고 생각해서 제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좀 추스려야 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1]미모미모

2007.07.08 02:51:55

댓글을 많이 올리면 포인트가 올라가고 레벨이 승급되어 드래그인도 할 수 있는 건가요? 전 드래그인이 안돼서 여기 글들의 지적소유권을 보호하시려고 하나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괜히 가입도 안하구 글만 읽으며 혼자 좋아라 한것이 좀 억울하지만 승급시켜주실 때까지 부지런히 여기저기 돌아 다니며 시비도 걸고 댓글도 남기고 하렵니다. 가만 보니 졸라대면 승급시켜 주실 것도 같은데 그냥 기다리면서 정목사님과 또 여기 '다비아'를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의 글을 읽으며 향기를 즐겨보겠습니다. 때가 되면 제 레벨에도 신경 써 주십시오. 고맙습니다.

[레벨:1]똑소리

2007.07.08 06:11:28

미모님!
기다릴 것 없구요.
그냥 까놓고 "등급 올리 도"하시면
조만간 업 될 겁니다.
기다려 보세요.
좋은 코이노니아가 있길...

[레벨:1]미모미모

2007.07.08 17:42:52

똑소리나시는군요.
고맙습니다. 저는 좀 수줍은 편인가 봅니다. 앞으로는 저도 좀 까놓고 살아 보렵니다. 사실은 열등감 때문인 것도 같구요. 기가 콱 죽어서 돌아 다니거든요, 여기에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레벨:1]jw

2007.07.11 19:05:11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저는 신학교의 학생이구요. 또 교회의 교육전도사 이기도 합니다.

이번 학기에 목사님의 책 <속빈 설교, 꽉찬 설교>를 읽고 레포트를 쓰는 일이 있었는데 형편없는 점수를 받게
되어서 심히 낙담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목사님의 글이 너무 좋아 이렇게 홈페이지에 들어와 회원가입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한주간에 많으면 3번의 설교를 하곤 합니다. 설교자로써 꽤 긴 방황(?)중에 목사님의 책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목사님의 책을 통해서. 또 이 대구성서아카데미 홈페이지를 통해서 방황을 끝마치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많은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등업을 부탁드립니다. 모니터상으로 글을 꽤 많이 읽었더니 눈이 많이 아파서요....ㅡㅡ;;;)

[레벨:3]두기고

2007.07.20 22:09:36

정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회원으로 가입하고서는 처음 글을 올립니다.

아직은 배우고 있고
여러 목사님들과 교수님들
그리고 앞서 가시는 분들의 글을 읽다보면

이제 까지 저의 지식(?)이 너무 패쇄적이었고 편협하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곳을 자주 방문하여 앞으로 많은 도음을 받고 싶습니다.

처음 글을 올리는 주제에 염치 없지만
위에 분들도 도움을 청하신 것처럼
드래그 허용을 부탁드릴까 합니다.(사유는 동일 함)

저는 그동안 그냥 여기는 드래그가 안되나 보다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읽고 나서
그동안 무엇인가 빠진 듯하던 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되어서
다시 한번 더 감사를 드립니다.

[레벨:3]삶에서..

2007.07.25 22:44:34

아주 가끔 와서 구경하고 가는 편인데..
오늘은 아프간 소식으로 마음이 짠하여 들렀다가 목사님의 글을 보고 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소리를 찾아 다시 맘을 쏟아야겠습니다.ㅠㅠ

[레벨:0]sunny

2007.07.27 22:27:25

소리에 대해 새삼 스럽게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갑자기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신학교 때 구약 교수님의 화두는 "너의 목소리를 발견하라" 였습니다. 그 이후에 신학적 스트러글 가운데 간헐적으로, 때로는 폭발적으로 교수님의 모습이 목소리와 더불어 생각이 납니다. 이 의미는 나를 발견하게 하였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알아가게 합니다. 나의 설교 스타일을 포함한 모든 것 말입니다. 그리고 님의 글은 언젠가 보았던 임권택 감독의 판소리 영화가 생각납니다...무음의 경지로 가는 그림이 선명하군요. 소리 다음에는 그림인가요. 아마도 그런 길 보다는 인공적이고 과학적인 소리 보다는 진실한 내면의 소리를 가리키는 것 같았습니다. 이 때 갑자기 이런 거창한 생각이 드는군요. 서구 신학은 텍스트의 신학이다. 따라서 해석의 신학이며, 따라서, 해석자에게 그 해석의 주도권을 주고 말았다. 그러나 소리는 반대로 청자에게 언제나 주도권을 준다. 그러므로 언제나 듣는 자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을 서구신학이 지적했는가? 자기가 들은 소리를 허겁지겁 전하기에 바빴고 그 성격을 규명하기에 바빴던 것이, 왜냐하면, 현대 신학이 현대의 현상에 대한 현대의 소리에 반응하는 것으로 존재하기에 말이다. 그렇다. 소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많은 소리를 잃어 버렸다. 우리 자신에 대한 소리 뿐 아니라, 마이너러티의 소리, 제3세계의 소리, 아픔의 소리, 아 소리여, 소리여.

[레벨:3]삶에서..

2007.08.01 22:49:31

그나저나 가끔씩 와서 보기도하고 하는데 회원등급을 올려주시면 안되겠나 부탁해봅니다..
로그인도 수시로 해야하고 사실 드래그가 안되는 슬픔을 견딜 수 없어서요...^^;

[레벨:1]길동무

2007.09.04 10:46:45

피리가 맑은소리를 내는 것은 그 속이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레벨:4]tj

2007.10.18 03:48:15

길동무님! 진리중에 진리의 말씀... 갑자기 오빠생각이란 피리소리가 듣고 싶어지는군요.
주님의 말씀처럼 진리의 아름다움으로 겸허해집니다
갈대의 속이 비어 있기에, 새싹이 터져나올 때까지 허무한 그의 모습을 보이면서 지치고 의지할 곳없는사람들에게 현실을 인내하며 먼 본향을 그리게 합니다.
비어있는 저의 머리로도 <긍정의 힘>이나 <야베스의 기도>를 읽고, 어떤 의도인지 수염을 깍지않는 개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출하는 어느 목사님의 모습을 보면서, 신의 구역을 월권행위하는 얄팍함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비켜가며 욕망을 채우는 것에 수긍할 수도 없었고, 난무하는 매끄러운 조직의 사치성 신학언어들이 얼마나 삶의 바닥에서 헤메고 있는 상처받은 이웃들에게 고통을 주고있는 지를 알게 하십니다.
어느 목사님의 책 제목을 들먹거릴 뜻은 없지만 바닥에서 하늘을 볼 수밖에 없는 저의 삶으로도 행복했습니다
아흔아홉마리의 양보다 한마리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애타는 사랑이 신학도들의 가슴 지반에 유유히 흐르는 것을 믿어 의심치않으나 인간의 학문들이 얼마나 하나님앞에 이쁘게 보일지 우스울지 신의 섭리에 의해 역사하는 삶의 전쟁터속에서 얼마나 심화되어 하나님의 뜻에 이를 수있는지 저는 알지를 못하여 사랑의 노파심으로 돌아가는 삶의 바닥에서 주운 저의 머리 빈 소리입니다
내가 죽을 때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되살아 난다는 단순한 진리를 믿을 때, 말씀이 인격으로 오셔서 내안에 정직한 영으로 승리하는 주님의 기쁨이 이 삶의 터전에서 성화로 누리는 희열을 비켜갈 수 없겠지요.
딤후 2:23 말씀이 이곳에서 적용되지 않겠으나,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하나님의 발길따라 삶의 터전에서 체험하며 만나는 진리를 접목하여 많은 이 중에 더운 빛나는 진정한 양들의 생명이 되는
우리들의 정 목사님되시길 빕니다.
목마르고 지친 양들을 위해 안개속에서 빛을 내시고 꺼지지않는 징금다리가 되셔서 주님의 참 기쁨이 되시길 빕니다
오늘따라 왜이리 삶을 비켜가고 싶은지...
목줄이 땡기는 지친 영혼 진리한 수 마시려다 너무 높은 곳..아니 저의 키가 너무 작고 힘없어 지쳐 돌아갑니다.
공해가 되었다면 제가 잘못 보고 들어왔기 때문이니 용서하십시요.
진심입니다

[레벨:1]달리라 강쥐

2007.12.04 17:26:46

저도 키가 너무 작고 힘이 없습니다. 올려다 보기 피곤하고 지칩니다. 이제 돌아갑니다. 혹여 공해로 여겨질까 하는 우려들이...당당함을 잃게 하고 제 마음은 더욱 무거워집니다. 댓글에도 표절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함.

[레벨:1]등대

2007.12.28 23:27:07

댓글을 읽으며 느끼는것.....
어떤이의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음은 무시인가, 아니면 회피인가?
아니면 독선인가? 하는 생각이 끊이질 않네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12.29 00:04:01

등대 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든 질문에 일일이 다 답을 달기가 쉽지 않답니다.
그리고 질문 내용과 질문한 분의 상황에 따라서
대답을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경우도 있구요.
어떨 때는 대답을 해야하지만 실수로 넘어갈 때도 있구요.
또는 나중에 생각을 정리해서 답을 해야지 하다가
깜빡 잊어버릴 때도 있답니다.
24시간 다비아에만 매달려 있지 않는 한
답이 놓칠 때가 많답니다.
다비아에 대글을 올리시거나 질문하시는 분들은
그런 사정을 다 알고 계시지 않을는지요.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감사.

[레벨:1]하은사랑

2008.01.15 12:02:41

드래그가 안 되어 매일 그냥 글만 읽고 나가는 사람입니다. 영신학부에서 정용섭 교수님의 강의를 접하게 되었고 자주 들러 글을 읽었으나 댓글을 남기는 것은 처음입니다. 승급부탁드려요^^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00 성령과 바람 [2] 2008-07-29 3750
99 머리글 모음 [1] 2008-06-25 4338
98 민중신학은 대화를 포기하는가? [9] 2008-05-27 5182
97 사유의 길, 또는 지평? [8] 2008-05-02 4951
96 오늘의 신학과 실용주의 [2] 2008-05-01 4058
95 정세웅 목사님! [3] 2008-04-20 5224
94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4] 2008-03-27 5605
93 죽음을 넘어서 [4] 2008-02-22 5267
92 예배와 제사 [12] [1] 2008-02-08 8261
91 내세(來世) (4) [3] 2008-02-04 4576
90 내세(來世) (3) [6] 2008-01-05 5585
89 해석학과 설교 [18] 2007-11-03 6625
88 베르디의 &lt;레퀴엠&gt; [8] 2007-10-05 5682
87 기독교 윤리는 가능한가? [31] 2007-08-07 10792
» 나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가? [43] 2007-06-05 10147
85 설교와 포퓰리즘 [19] 2007-05-17 7902
84 예배와 사도신경 [39] 2007-04-18 9856
83 십일조와 면죄부 [34] 2007-04-07 12083
82 내세(來世) (2) [16] 2007-02-05 8276
81 설교인가, 선동인가? [19] 2007-01-10 10483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