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디의 <레퀴엠>

조회 수 5683 추천 수 75 2007.10.05 10:14:39
베르디의 <레퀴엠>

얼마 전에 필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고 베를린 필하모니와 스웨덴 라디오 합창단 및 네 명의 독창자들이 함께 연주한 베르디의 <레퀴엠>(Messa da Requiem)을 디브이디로 감상했다. 이 연주는 베르디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서 베를린의 필하모니 연주회장에서 2001년 1월 25일과 27일 양일간에 걸쳐 연주된 실황 녹화였다. 다른 것은 접어두고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 모습에서 필자가 경험한 특이한 두 대목을 간단히 전하려고 한다.  
첫째, 그는 84분에 이르는 그 대곡을 악보 없이 지휘했다. 필자가 그런 연주회장의 경험이 많지 않아서 뭐라 끊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긴 곡을 악보 없이 연주한다는 게 필자의 눈에 신기해보였다. 그걸 필자 나름으로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베르디의 <레퀴엠> 안에서 다양한 소리를 내는 음들은 고유한 길을 가고 있다. 이 길을 아마추어들은 따라갈 수 없지만 전문가들에게는 그게 가능하다. 클라우디오는 베르디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갔을 뿐이다. 이런 현상은 바둑에서도 가능하다. 이백 몇 수의 기전을 복기한다는 것도 역시 바둑의 길이 있어서 가능하다. 만약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이 마음대로 그려놓은 악보를 지휘하는 경우라고 한다면 10분도 채 암기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음악의 길이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84분 동안 악보 없이 지휘한다는 게 놀라웠다.
둘째, 아바도는 곡을 모두 연주한 다음에 오랫동안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상상해보시라. 격정적으로 진행되던 음악이 중단된 채 30초 동안 모든 게 정지된 상태를 말이다. 음악에 너무 깊이 빠져든 탓에 갑자기 호흡 곤란증세가 나타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화면에 비친 아바도의 표정은 고통스러워 보였다. 필자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그 순간에 청중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곡이 끝나면 청중들은 박수를 친다. 마지막 음의 여운을 듣는 몇 초간을 기다리는 경우는 있지만, 이번처럼 긴 시간동안 청중들이 그대로 있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다. 그러니 어딘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30초가 지나고 아바도가 윗도리를 살짝 잡아당기며 옷매무새를 고치자 곧 청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다.
필자의 생각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연주를 끝내고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고통스러워한 이유는 음악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에 놓인 어떤 틈 때문이다. 그는 베르디의 <레퀴엠>이 지시하고 있는 세계 안으로 들어갔었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우리가 아주 감동적인 책을 읽은 다음에 한 동안 멍한 상태로 머물 수밖에 없는 상태와 비슷하다. 이런 예술적 경험은 한편으로는 고통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이다. 그것이 고통인 이유는 예술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 사이를 넘나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며, 그것이 기쁨인 이유는 현실 너머의 절대적인 세계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비 예술가는 고통도 없고, 따라서 참된 기쁨도 없다. 그런 이들은 예술적 감동 없이 청중들의 환호나 돈에만 반응할 뿐이다. 도대체 베르디의 <레퀴엠>에 열어가는 세계가 오늘의 현실과 무엇이, 또 어떻게 다르기에 아바도가 연주 후에 그런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었을까? 필자는 음악 자체는 잘 모르니까 그 노랫말이나 따라가야겠다.
베르디의 <레퀴엠>은 ‘영원한 안식’(Requiem aeternam)과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Kyrie eleison)로 시작해서 다시 ‘영원한 안식’과 ‘주님, 저를 구원하소서.’(Libera me, Domine)로 끝난다. 중간에 진노의 날, 비통의 날, 세상은 먼지가 되리라, 심판자가 심판하노라, 아무도 심판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주님이 모든 죽은 자들의 영혼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영광이 천지에 가득하네, 높은 곳에 호산나 등등의 합창과 중창 들이 울려 퍼진다.
첫구절인 키리에 엘레이송은 죽음에 직면한 인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절실한 기도이다. 우리의 삶은 아무리 성실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인 진리 앞에서 부끄러울 뿐이지 않은가. 이것은 막연하게 “당신의 죄인이야.” 하는 엄포가 아니라 우리 삶의 진면목을 뚫어본 이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는 진솔한 고백이며 명백한 해명이다. 우리는 평생 분노하고, 자기에게 집중하며, 남을 판단하다. 우리의 선한 의지가 경우에 따라서 아주 파괴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어찌 마지막 순간에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으며, 나를 구원해 달라(리베라 메 도미네)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어디를 향한 구원이란 말인가? 우리는 무슨 말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바로 <레퀴엠>의 토대인 묵시사상, 또는 묵시문학의 핵심이다. 구약성서에 면면히 흐르고 있으며, 신약성서의 종말론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끼친 묵시사상은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이원론적 관점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곧 해체되고 질적으로 전혀 다른 세상이 다가온다는 이 묵시사상에 따르면 구원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세상에서 구현된다. 여기서 중요한 건 현재와 미래의 질적인 단절이다. 그 미래의 세상은 지금의 세상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유비를 재현해낼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요한계시록 기자가 이 세상의 마지막과 새로운 세상에 대한 묘사를 극단적인 상징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요한에게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으로 말한 이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황금등경이 일곱 개 있었고, 그 일곱 등경 한 가운데에 사람같이 생긴 분이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발끝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또는 눈같이 희었으며 눈은 불꽃같았고 발은 풀무 불에 단 놋쇠 같았으며 음성은 큰 물소리 같았습니다. 오른손에는 일곱별을 쥐고 계셨으며 입에서는 날카로운 쌍날같이 나왔고 얼굴은 대낮의 태양처럼 빛났습니다.(계 1:12-16)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 재난의 시기에 많은 사람들을 죽여야 할 책임을 맡은 기마병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불빛 같은 붉은 색이나 보라색이나 유황색의 가슴 방패를 붙였고 말들은 그 머리가 사자의 머리 같았으며,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을 내 뿜고 있었습니다. 그 말들의 입에서 뿜어내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 재앙 때문에 사람들의 삼분의 일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말들의 힘의 근원은 그들의 입과 꼬리에 있었습니다. 그 꼬리는 뱀과 같으며 머리가 달려서 그 머리로 사람을 해칩니다.(계 9:17-19)  

위의 끔찍한 장면과 달리 새 예루살렘은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그 성벽의 주춧돌은 갖가지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첫째 주춧돌은 벽옥으로, 둘째 주춧돌은 사파이아로, 셋째는 옥수로, 넷째는 비취옥으로, ... 열두째는 자수정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또 열두 대문은 열두 진주로 되어 있었고 그 열두 대문이 각각 다른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도성의 거리는 투명한 유리 같은 순금이었습니다.(계 21:19-21)

어떤 이들은 위의 묵시문학을 공상과학 영화처럼 기괴스러울 뿐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묘사된 내용은 분명히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이지만 그런 시각은 이상한 게 전혀 아니다. 지금 우리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사실 그 한 가지 이유로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요한은 현실 너머에 숨어 있는, 또는 아직 현실로 나오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오고 있는 어떤 세계를 바라보았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생명현상만을 참된 현실이라고 보는 이 확신은 그렇게 분명한 게 아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는 물이 위에로 밑으로 흐르는 게 현실이지만, 지구를 벗어나기만 하면 그게 완전히 허물어진다. 지구에서만 통용되는 현상을 참된 현실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지금 우리는 식물과 동물로 생명체를 구분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확실한 게 아니다. 반은 동물이고 반은 식물인 생명체가 불가능하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지금 이 세상에는 토끼가 있고, 또 거북이가 있을 뿐이지 토끼와 거북이 중간쯤 되는 동물은 없다. 그게 왜 없을까? 영원히 없을까? 하이데거의 교수 취임연설 제목이기도 한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고, 무는 없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끝까지 물어야 한다.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세계는 바로 우리의 현실에는 없지만 영원히 없는 것도 아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아직 없는 그것으로 인해서 오늘 이 세상이 이렇게 존재한다.
성서는 바로 현재 존재하는 세계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총체적으로 통치하시는 바로 그 하나님을 우리에게 계시한다. 특히 아직 우리에게 드러나지 않은 그 종말론적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오늘의 현실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적인 생명의 능력이다.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베르디의 <레퀴엠>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 그런 예술적, 영적 체험이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요청된다. 그것 없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레벨:14]닥터케이

2007.10.07 01:55:19

좋은 영상물을 감상하셨군요... 아바도가 그 연주를 할때는 위암으로 투병하면서 수술과 항암제 치료의 고통을 막 극복한 직후인지라 얼굴이 매우 수척해졌지요... 그 때문에 레퀴엠 미사곡의 의미가 그에게 더욱 깊이 와닫았었던 것이 아니었을지... 그것이 연주가 끝나고도 지휘봉을 내려놓지 못했던 감동의 이유가 아니었을지...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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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0.07 15:47:44

닥터 k 님,
그렇군요.
무위 님도 알고 있었네요.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위암 수술을 하고 투병 중이었단 말이지요.
어쩐지 2000년과 2001년의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꼭지글에서 내가 한 해석은 약간 오버한 느낌이 있군요.
아바도가 기분 나빠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모두에게 영원한 안식을...

[레벨:0]無名齋

2007.10.14 19:18:41

아바도는 베르디 레퀴엠을 잘 하는 지휘자 중 한 명입니다.
이미 동곡의 여러 음반들을 내놓았는데, 다 명반입니다.
그리고, 미사, 오라토리오 등 종교곡을 연주한 다음에는, 곧장 박수를 치지 않는 것이 통례이고,
특히, 연미사(위령미사)인 레퀴엠을 연주하고 나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아바도 선생이 건강이 너무 좋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음악 팬들이 많습니다.
비록 암을 이겨냈다 하지만,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은 지금도 역력하신 듯 합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그리고, 현행 천주교는,
현재는, 위령미사라 하더라도 보통의 미사통상문(예식서)을 사용하고,
레퀴엠 미사의 기도문들은 폐지했답니다.
레퀴엠에 깃든 가부장적이고 제왕적인 하느님 상, 진노와 심판의 종말 신앙이,
(사실, 이같은 신앙 양태는 뿌리깊은 것이고, 지금도 여전합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 복음에 배치된다는 각성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 미사 전례와 무관하게, 순수하게 음악으로서의 레퀴엠 미사곡은,
명곡도 많고, 뿌리 깊은 음악 양식이다 보니,
늘 자주 연주되고, 애청되며,
현대 작곡가들 또한 과거의 레퀴엠 미사의 기도문에 곡을 붙여
새로운 레퀴엠을 계속 작곡하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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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0.14 20:57:36

무명재 님의 설명을 듣고 많이 배웠습니다.
그렇군요.
베르디의 레퀴엠이 원래 아바도의 18번이군요.
어쩐지 음악과 지휘자가 하나처럼 느껴지더군요.
감사.

[레벨:7]키아누

2007.10.16 09:26:22

클라우디오 아바도
생전 처음 들어본 이름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그의 음악
그런데 목사님과 선생님들의 진심어린 안내는
실제 84분의 연주를 모두 듣고 맥이 풀린채
공연장의자에 앉아있는 저를 발견하게 합니다.

일흔 노구
그이의 평생의 18번을 듣는다?

나의 18번은 뭔지 다시금 나를 돌아보게도 합니다.

덕분에 가을아침 큰 은혜를 만끽합니다.
올 가을은 아바도로 여행을 떠나고 싶군요.

[레벨:1]찬양하라

2007.10.23 12:38:25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여러 배운 것이 많았는데..
홈페이지에서 더욱 많은 걸 배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음악의 깊은 세계~~바둑의 고수~~
강의때에도 많이 이야기 하셨던....^^
저도 신학을 하는 사람으로써 놓치지 않도록...
생각을 많이 넓히고 마음을 많이 넓혀야겠단 생각을 합니다.
-저도 등업 부탁드려요^^-

[레벨:2]운영자

2007.10.23 16:06:28

찬양하라 님,
등업해 드렸습니다~~

[레벨:1]그루터기

2008.03.28 17:19:46

제목이 눈에 띄여(신학적이지않은제목?) 글을 읽었는데
이런걸 우연이라고 해야 하나요? 교수님!!
하이데거 선생의 사유와존재를 읽으며 막혔던 물음
"왜 하필이면 존재자는 있고 도리어 무는 없는가?"
에 대하여 교수님께서 토끼와 거북이를 예로 설명하시니
좀 쉽게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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