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학과 설교

조회 수 6626 추천 수 79 2007.11.03 23:57:14
해석학과 설교

필자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설교자에게 해석학 공부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외쳤다. 이에 대한 반론이 가능할 것 같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은혜롭게 전하기만 하면 충분하지 해석학은 필요 없다. 둘째, 모든 설교행위는 이미 해석을 전제하기 때문에 굳이 해석학이라는 전문적인 용어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 이런 반론들은 성서해석학이 무엇인지, 또한 설교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혼란이다. 성서텍스트를 그저 구색 맞추기 정도로 다루고 실제로는 자신의 신앙경험으로 설교를 도배하는 설교자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나름으로 성서 말씀에 집중한다는 소위 강해설교자들도 역시 언어를 통한 진리(알레테이아)의 탈(脫)은폐적 속성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반론에 대해서 필자는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대신 해석학이 무엇인가에 관한 간단한 개념정리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답하겠다.
해석학(Hermeneutik)이라는 단어는 헬라 신화의 헤르메스에서 유래했는데, 헤르메스는 신의 뜻을 전하는 사자이다. 헤르메스는 인간이 모르는 신의 이야기를 인간이 알아듣도록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이 일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니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직접적인 소통이 불가능하다. 사용하는 언어가 다를 경우에 사람 사이에도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마당에 전혀 다른 지평에 존재하는 신의 언어를 인간이 이해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번역, 통역, 해석이 필요하다. 설교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귀에 전달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헤르메스의 역할과 똑같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언어도 알아야 하고, 인간의 언어도 알아야 하며, 언어 존재론적 힘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조금 거칠게 말하는 걸 용서하시라. 한국의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언어도 잘 모르고, 사람의 언어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들은 언어의 존재론적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지 성서의 정보에만 치우쳐 있을 뿐이며, 또한 청중들의 종교적 요청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성서 언어의 존재론적 힘이 아니라 정보만 알고 있다는 말은 하나님을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필자가 경험한 많은 설교자들의 설교에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관심조차 없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방식, 하나님의 계시행위를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설교에는 해석학적 관점이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뜻인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설교가 해석학적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또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없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모세도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 시공간의 한계 안에 던져진 인간은 그것을 초월하는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여기서 직접적으로 모른다는 말은 ‘간접적’으로 알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이는 곧 성서텍스트의 은폐성을 의미한다. 성서는 하나님을 확연하게 드러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은폐시키는 문서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계시인데, 무슨 은폐냐 하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계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이다. 지금 하나님은 아직 ‘자기’를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으셨다. 그는 여전히 숨어 있는 분이다. 성서는 하나님을 노출시키면서 동시에 은폐시킨다. 하나님은 변증법적 차원에서 은폐의 하나님(Deus absconditus)이며 동시에 계시의 하나님(Deus revelatus)이라는 바르트의 주장이 바로 이것은 말한다. 은폐가 완전히 사라지고 계시가 완성되는 때를 가리켜 우리는 종말이라고 한다. 지금 우리는 그 종말이 오기 전의 은폐의 시간을 살고 있는데, 바울은 지금 우리가 거울로 보는 것처럼 실체를 확연하게 아는 게 아니라고 말했다. C.S. 루이스도 <Till We have faces>라는 책에서 먼 훗날이 되어야 우리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은폐성이라는 말을 설교 주제와 연관해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구원의 길이라고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보라. 그것이 인간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은 아직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십자가는 분명히 하나님의 무능력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예수의 운명이 실패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는 구원의 길로 믿는다. 왜 그런가? 여기에 실증이 있는가? 십자가 사건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으며, 따라서 여전히 해석되어야만 한다. 부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그 부활을 궁극적인 생명이라고 믿으며, 특히 예수의 부활을 그 궁극적 생명의 선취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 부활의 실체는 여전히 숨겨 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가? 아무도 하나님 나라를 명시적으로 규정할 수가 없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다. 기독교의 도그마가 불확실하다거나 진리의 길에서 벗어났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 통치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 자체이다. 다만 오늘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온전히 인식하거나 경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말에 가서야 그 모든 비밀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지금 설교자는 종말에 드러나게 될 그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시공간적 한계 안에서 살아가는 청중들에게 해명하는 사람이다. 도대체 우리에게 그럴 능력이 있을까? 결정론적으로 모든 진리를 소유하는 사람이 없듯이 우리 설교자들도 역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설교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설교자들에게 ‘소극적인 설교’를 하라고 권면한다. 설교자의 역할은 가능한대로 줄이고 진리의 영인 성령의 역할이 지배하는 설교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설교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설교는 가능하며, 설교자는 필요하다. 이른 위한 준비는 철저해야 한다. 영어 통역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 영어와 주변학문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야 하듯이 설교자가 되려는 사람은 이쪽으로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는 해석의 전문가가 아니라 단지 설교 기술자만 요구한다. 교회 강단에 성서 해석은 없고 단지 포장 기술만 차고 넘친다. 성서의 영적 깊이로 천착해 들어가는 설교자는 설 자리가 없고, 청중들의 감수성과 종교적 욕망을 놀라운 입담으로 자극하고 선동하는 설교자가 모든 자리를 독차지하는 실정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될는지는 불을 보듯 분명하다. 이로 인해서 스타 목사들을 향한 신자들의 쏠림현상은 나타나겠지만 한국교회 전체는 타이타닉 호처럼 어느 물밑으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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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11.05 11:35:58

주일 설교에서 '나눔의 삶'의 주제로 들었을때, 참으로 좋은 말씀이라고 생각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공허한 마음만 잔뜩 듭니다.
듣기에 좋은 설교이지만, 우리 삶의 실천에서 교회는 아무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기에 그런가 봅니다.

아직도 눈에 착시현상의 안경을 쓰고 있는 제가 답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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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푸른숲

2007.11.05 19:38:47

어렵습니다. 쉴 틈 없이 옳바른 성서해석을 위해 노력하지만 정말 제자신을 돌아보면 한 숨 만 나옵니다. 어떨 땐 삯꾼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단상과 함께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지만 그것을 시도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점점 길어지고 도약하는데 많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정말 지금의 현실은 입담꾼?을 더욱 선호하며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설교자를 찾고, 그렇지 못하면 능력 없는 설교자라 생각하면서 얼굴을 돌리는 모습에서 어깨가 점점 무거워 집니다. 해석학, 이제껏 해석학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설교단에 섰던 것 같습니다. 해석학에 대해 깨닫게 하는 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늦게나마 깨달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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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김영진

2007.11.05 23:23:54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런 면이 엊그제 전주 한일장신학교에서 모였다는 설교학회 회원들과
정목사님과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설교학자들은 설교에서 적용을 참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진리의 영인 성령의 역할이 지배하는 설교를 지향해야 한다는' 말씀을
구체성이 없다고, 또는 애매모호 하다고 공격거리로 삼는 것 같고요.

그런데 그 적용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모습이길 원하다보니까
존재론적인 반응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 같습니다.
적용은 성서적인 것 같지만 도덕적(실제는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훈화로 시작하고,
또 결과는 눈에 보이는 부흥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설교학회 회원들이 보기에는 어째든(!!!) 대형교회 목사들이 설교를 잘한다는 것이죠.
그 분들에게서 공부를 한 탓인지 한국교회 대다수 목사님들 생각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똑같은 틀에서 똑같은 붕어빵을 찍어내듯이 말이죠...

그 분들이 비판하는 것을 저는 역으로 생각합니다.
그 분들은 조직신학자가 설교를 비판한다고 우습게 생각하지만
차라리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조직신학자들이 가르쳤으면 하고요.
제 자신도 설교학의 가르침을 대충 버리고 조직신학 속으로 좀 더 들어가니
강단에 서기가 훨씬 평안합니다.

다비아가 좀 더 활성화 되고 이 작은 흐름이 계속 흐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 흐름에 동참한 이들은 좀 더 작은 자들과 함께, 열심히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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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1.06 21:06:59

주영재(푸른숲) 전도사,
잘 지내나?
그런 문제의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자네는 귀한 길을 가고 있는 거네.
해석학에 관한 책을 소개하라고?
신학 자체가 해석학이라네.
성서신학은 성서텍스트를 해석하는 행위이고,
조직신학은 도그마를 해석하는 행위이며,
역사신학은 교회역사를 해석하는 행위라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고 싶으면
이 사이트 <온라인 강의실>로 들어가서
<기독교 해석학> 메뉴를 찾게나.
거기에 괜찮은 책들이 소개되어 있다네.
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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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푸른숲

2007.11.06 23:27:15

감사합니다! 목사님~^^*
제대로 해보고 싶습니다. 공부든 설교든 뭐든지 제가 있는 삶의 자리에서 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
정말 제대로 준비하고 해보고 싶습니다.
특히 여기에서 많은 준비와 폭 넓은 사유를 경험하고 있어 감사한 맘 가득입니다!

[레벨:2]주님의 종

2007.11.11 16:57:37

정용섭 목사님 안녕하세요 ^_^
저는 평택대학교 신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조민철이라고 합니다.
1년 전 기독교 서점을 방문하게 되었을 때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이재철 목사님 비평을 해 놓으신 책이 있어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읽어야겠다 생각을 하고 덮어 두었는데, 어느 날 불현듯
설교비평집 1권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선 그 책을 펼쳐들고서
단숨에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용섭 목사님에게 신학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_^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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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1.11 18:06:46

주님의종 님,
지금은 내책을 통해서 느낀 감동이 큰 것 같지만
조금 세월이 지나면 별 거 아니라는 걸 알게 될거요.
이제 신학도의 길을 시작했으니
꾸준히 가보시오.
놀라움의 영성을 잃지 말고 말이오.

[레벨:1]산수유

2007.12.13 19:32:11

목사님 전주에서 같이 식사했던 김광철 목사입니다. 목사님 글 읽으면서 생각난 한 가지가 있는데 나에게 있어 숨겨진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해 준 분이 바로 르네 지라르입니다.(그때 감동으로 한국에 번역된 지라르의 책은 다 읽었더랬습니다.) 물론 지라르도 해석의 한 측면이겠지만 저에게는 어느 신학자보다도 풍부한 해석이었습니다.

[레벨:1]신학도

2007.12.17 04:45:57

교수님 여성신학을 이번학기 고민한 김성진 입니다.
교수님은 아니다고 거부하시지만 이시대가 어쩌면 가장 필요하는 신학의
한 장르를 힘겹게 꾸리는 우직한 소와 같은 분이 십니다. 허^^* 너무 심한표현인가<?>
저는 이번 학기 강의<여성신학>에는 솔직히 큰 관심 없었고 학자 정용섭이라는 사람의
사상 그리고 철학을 듣고자 수강 하게 되었고 그 생각이 어느덧 탁월 했고 교수님과의 생각의 공통분모를
느낀것이 보람됩니다.
제가 혹시 신학적 고찰 과 많은 역서 조은 사람들과 공유함이 없어 정교수님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스스로 아니라고 단정지워 봅니다.
다만 우리나라 현실적 소위 기독교계 금단의영역<대언자>라는 착시현상 사탕발림의 술수에 젖은 일부의 고독한 자 모두를 향한 최소한의 몸부림을 하고 계신 교수님께 성원그리고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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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2.17 17:57:59

김성진 군,
반갑소이다.
열정이 끓어오르는 신학도 아니오?
앞으로 계획하는 일이
좋은 열매로 맺어지기를 바라겠소이다.
대림절의 은총이.

[레벨:1]모퉁이돌

2007.12.18 15:42:26

안녕하십니까 정용섭 목사님!
이곳에 수시로 들려서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통해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사역을 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설교를 하는 사람으로서 목사님으로부터 큰 도움을 얻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목사님의 글 속에서 조금의 아쉬움을 느낀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저는 비록 대학원(Th.M) 과정밖에 마치지 못했지만 신대원부터 줄곧 바르트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제가 판렌베르크는 잘 모릅니다만) 바르트의 신학을 공부하셔서
목사님의 사상에 더욱 풍성함을 더하시면 어떻까 하는 말씀을 드려보고 싶습니다.
제 성향이 그 쪽이라서 그런지 꼭 한 두가지는 목사님에게서 아쉬움을 느낀 것이 있었거든요.
물론 저도 목사님으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해 판넨베르크 뿐 아니라 더 많은 것을 공부해보겠습니다.
한국교회에서 설교비평이란 유례없는 일에 선구자로 뛰어들어 수고하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또 후배들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주신 점에 대해서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비록 온라인상이기는 하겠지만 목사님께 많은 도움을 얻겠습니다.
항상 강건하시고, 승리하십시오. 샬롬!

홍시

2007.12.18 20:11:10

제가 보기에는 정목사님의 글과 신학단상, 아티클을 읽어보면
바르트적 요소가 녹아있다는 걸 느끼겠던데요.
모든 신학자가 반드시 바르트적일 필요는 없지만
정목사님의 어떤 부분에서 한 두 가지 아쉬움을 느낀다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해 보시면 어떨까요?
저도 한 수 배워 보고 싶어서 그럽니다.
이거 정목사님이 먼저 대글을 달아야 하는데
제가 주제넘는 일을 한 것 같군요.
나쁜 뜻은 없으니 오해는 마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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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2.18 23:58:53

내 대답을 홍시 님이 대신 정확하게 해주셨군요.
나는 바르트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하는데,
바르트 전공자이신 모퉁이돌 님에게는 무언가 아쉬운 게 보였나 보군요.
바르트의 어떤 사상을 말하는지 설명을 주시면 고맙겠군요.
감사.

[레벨:1]신학도

2007.12.19 01:18:28

샬롬!!
이곳에 와서 대충 많은 글과 생각들을 꼽씹습니다.
그리고 조금의 위안을 찾아 봅니다.
위 내용과는 좀 동 떨어집니다만...!!!
그런데 좀 허기진 그 무엇인가? 2%부족한걸 느끼네요.
저만 그런지 다들 그런지 모르겠지만...
암튼 요즘 세상은 오늘 대선이 세상이 끝나고 결정 되는듯
하는 정치인 그리고 주변의 인간 군상들 보니 뭘 모르는 나도 좀
답답 해옵니다.
어차피 정치는 세력과협상그리고 플러스 이해집단들의 공존 투쟁
등등의 난무하는 곳에 기독교의 위치는 어디인가? 고민됩니다.
역사적으로도 크고 작게는 정파 당파 싸움은 있었지만 이제는
세상이 많이 오픈된 가운데 기독교 즉 우리나라의 3대 종교중 가장
기회주의인 기독교는 어떠한 깃발 어떠한 이념적 소통을 이나라에 심어야
조은지 심히 고민 됩니다.
저 개인적으로 70년대 부터 지금까지의 기독교의 실천은 기회주의적 이었다라고
생각 듭니다.
우리가 70년대 부터 90년대까지 기독교는 국가와 민족 보다 교세 확장이라는 허울
좋은 대의로 역사적 책임과 시대착오적 행동을 반성해야 합니다.
명동성당. 조계사에서 감싸준 투쟁하는 민중들이 간첩인줄 알았더니 지금은 사회 각계 지도층 사람이 다
되었더군요. 우리나라 어느 교회에서도 어느 처소에서도 시대의 외침을 감싸 주는 곳을
들어 보지 못했 습니다
대한민국의 천주교와 불교계는 시대의 간첩을 숨겨둔 대신 교세확장과 신학적 고찰들을
바꿔 버린것 같습니다.
어느 것이 진정으로 옳은 선택인 저도 잘 모르네요.
그러나 천주.불교계의 입장은 저는 잘 파악 못하지만 기독교에 몸담은 저로서는 기독교에 허기진
2%로는 언제쯤 이루어 채워 질까요.

**부족한 사람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오니 오해 마세요.ㅋㅋ

[레벨:2]산가람

2007.12.19 18:38:41

신학도님, 저는 잘 모르지만
기독교가 부족한 그 2%를 우리가 채워야 한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신 앞에서의 교만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기회주의였다거나 하는 말에 변명하려는 것은 아니구요
기독교가 어떠한 깃발 어떠한 이념적 소통을 이 나라에 심으려 하는 노력 또한 권력욕이 아닐까 싶구요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에 묶여 그 앞에 무릎꿇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뭐냐? 고 말하면 뭐라고 해야될지...

저는 설교자가 소극적 설교를 해야 된다는 정목사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목사의 설교는 거기까지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각 시대에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방법까지를 전하려 하는 것은
그리고 그 깃발을 높이쳐들고 그리로 모이라고 하는 것은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너무 무책임하다 말할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우리는 저들과 같은 인간일 뿐입니다. 목사는 신이 아니고
목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말하지요. 행동하는 것은 저들의 몫입니다.
저도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레벨:1]신학도

2007.12.20 20:52:10

먼저 산가람님의 조크를 이해합니다.
그런데 제가 말하고 싶은것은...

기독교가 심으려는 이념적 소통 또한 권력욕이 아닐까? 에대한 저의 소신은
님도 아시다 시피 인간은 본의든 타의든사회적 동물이자 정치적 동물입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라는 범주 안에서 기독교가 추구하는 "하나님 앞에서말씀 묶여
그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조은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대한민국에는 기독교 이외에 불교 천주교
유교.대종교등..많은 군소 종교가 있고 그중에서 기독교는 우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최소한의 시대의 정신과는 좀 빗나간 측면을 문제 제기 것입니다.
님의 지적 처럼 하나님말씀에 무릅꿇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기에서 머물러 버리면 그것은 시대를 향해 기독교는 이율배반 하는 것이라 저는 봅니다. 그렇다고 사회 정치 각계로 기독교지도자가 나서는것은 저도 반대 합니다. 그러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최소한의 시대적 양심도 기독교 지도계에서는 고갈되었다라는 것이지요. 어찌보면 정치계보다 교계가 좀 더 자정 능력을 잃은 건 아닌가 봅니다.2%로 부족은 최소한
입니다.
님 두서 없이 말했죠 그렇지만 저는 신학도로서 희망을 잃진 않습니다.ㅋㅋ
왜냐면 여긴 천상이 아니니까요 늘 불확실성을 인정합니다. 고로 주님께 감사하지요.

[레벨:1]모퉁이돌

2007.12.20 14:41:56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다면 죄송합니다.
목사님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길....

저는 아직 신학적인 초보 수준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은 정용섭 목사님의 글과 사상이
따뜻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신학적인 토론을 제안한 것이 아니므로 그냥 제 개인 느낌만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일단 목사님의 말씀대로 목사님의 글 속에서 바르트적인 요소들이 많이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르트적인 요소들은 대부분 바르트의 초기 신학, 즉 전적타자로서의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한쪽 극으로 밀어부치면서 주장할 때의 것들이 지배적입니다.
목사님의 글 속에서 대부분 바르트가 언급되는 부분은 아마도(제가 정확하게 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맥락에서 나오는 글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니 주권자로서의 하나님, 하나님의 뜻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
신비로서의 하나님의 세계나 하나님의 말씀 등이 자주 언급되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맞다고 저도 봅니다.
바르트도 "신학의 과제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그의 초기논문에서 다음의 유명한 말을 남겼죠.
"우리는 신학자로서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으로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의 '해야 한다'와 '할 수 없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하고, 바로 이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곤경이다."

위에서 인용한 바르트의 말은 곧 그의 초기 변증법적 신학의 핵심을 잘 짚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도 후에 인정할 뿐 아니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변증법적 신학에 대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바로 에릭 페터슨이었습니다.

그 이후 바르트는 변증법적 신학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신의 신학을 다시 시작하여
유비론적 신학으로 전향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의 신학 여정에서 그가 다다랐던 마지막 과정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정목사님께서 언급한 바르트에 관한 대부분의 언급들은 바르트의 초,중기의 신학에 한정된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들이 주로 정목사님께서 설교비평을 하시면서 주로 언급하는 내용들입니다.

거기에서 제가 가장 많이 인상깊게 남았던 말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신비"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뭔가 아쉬움을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그 점입니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신비에 직면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그저 변증법적 신학시기의 바르트처럼 그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고 말아야 합니까?
설교자는 도대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로 서있는 자입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가 직면하는 것이 물론 하나님의 신비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비보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가 압도당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설교자로서 우리가 부족한 자들이면서도 설교할 수 있는 이유,
그리고 그렇게 부족한 설교를 가지고도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이유가
바로 이 하나님의 넘치는 은총때문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서 다루어진 설교자들에 대한 비판은 전반적으로 다 옳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 설교비평이 하나님의 신비앞에서 인간의 무능력함과 어리석음을 주로 드러내기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무능력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들을 당신의 파트너 삼아 일하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더욱 많이 드러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개인적으로 가졌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신비, 주권의 차원보다는 하나님의 은총의 차원이 우리 신학자들의 글 속에서 더욱 많이 드러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후에 벌카우어가 바르트의 신학을 "은총의 승리"라는 말로 압축하였던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바르트의 신학은
무엇보다 은총의 신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은총의 신학이 가장 강력하게 빛을 발했던 것이 그의 교회교의학 4권 화해론일 것입니다.

정목사님앞에서 주제넘게 몇 말씀 올리게 되어 송구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 마음을 받아주시길 바라고요, 제가 정목사님께 제안드리는 것은 다름아니라 후기바르트 신학에서
지금의 정목사님의 사상을 보다 더욱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요소가 많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그 부분을 한 번 참고해주십사 하는 점입니다.

까마득한 후배가 송구스러움을 감수하고 감히 글을 올림을 용서하시고,
항상 강건하십시오.

제 생각에 부족한 점이 있다면 가르침을 기꺼이 받고자 합니다. 많은 지도편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샬롬!

싸이먼

2008.01.05 09:38:46

모퉁이 돌님.. 어려운 내용을 잘 설명해 주셨네요.. 또 그 용기에도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모퉁이 돌님의 글을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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