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來世) (4)

조회 수 4577 추천 수 55 2008.02.04 15:22:09
내세(來世) (4)

인간의 운명이 내세에 각각 다르게 갈라진다는 주장은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 명백하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것은 일반 신자들에게 명백한 도그마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쪽의 사람들은 영생의 길로, 다른 한쪽의 사람들은 영벌의 길로 갈라진다고 말이다. 이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많지는 않다. 요한계시록이 이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근거이며, 복음서 내용 중에서 주로 묵시사상에 토대를 둔 자료가 이런 근거를 부분적으로 제공한다.
마태복음 25:31-46절은 마지막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이 세상의 마지막에 영광의 자리에 앉게 될 인자는 모든 민족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나누게 될 것이다. 오른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의인이다. 그들은 그 인자이신 주님이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고, 옥에 갇혔을 때 방문해서 위로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그렇게 섬겼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님은 형제들에게 행한 것이 바로 자신에게 행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왼편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불의한 사람들인데, 앞서 의로운 사람들과 달리 작은 사람에게 아무런 자선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명분이 있어야만 선을 행한 사람들일 것이다. 이 본문의 마지막 구절인 4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이 구절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인간의 내세가 이렇게 이중적으로 갈린다고 생각한다.  
본문을 선입관 없이 읽는다면 영생과 영벌이 중심 주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다. 영생과 영벌에 관한 직접적인 구절은 34절, 41절, 그리고 46절이다. 전체 16절 가운데서 세 절 불과하다. 그리고 문맥적으로 볼 때 영생과 영벌보다는 심판당하는 사람들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는 사실이 중심 주제라는 것도 분명하다. 오른편으로 영생의 자리에 들어간 사람들이나 외편으로 영벌의 자리로 들어간 사람이나 모두 자신들에게 내린 심판의 결과를 놀라워했다. 이건 곧 하나님이 마지막 때 행하시게 될 심판의 전복성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영생과 영벌의 교리가 기독교적인 게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자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창조를 완성하실 것이다. 창조의 완성은 생명의 완성이다. 그 생명을 완성하는 사건이 곧 심판이다. 가리자와 알곡이 나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여전히 악이 준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언젠가는 악이 완전히 박멸되는 때가 오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은 하나님의 창조를 거스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한다면 그가 다시 온다는 약속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세상을 심판할 자로 오신다. 그때 우리는 모든 진리와 허위를 얼굴로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마지막 심판이다. 이런 점에서 심판, 즉 영생과 영벌에 관한 가르침은 분명히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속한다고 말해도 좋다.
오늘 우리에게서 문제는 그 영생과 영벌을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사후에 상급이 차별적으로 주어진다고까지 주장하는 정도이다. 교회 개그로 불릴만한 이야기들이지만, 황금면류관을 쓸 사람과 개털모자를 쓸 사람이 분류된다는 말도 있다. 어떤 사람은 호화 주택에 살고, 어떤 사람은 오막살이에 산다고도 한다. 물론 일종의 종교적 상징이나 메타포로 그런 말을 할 수는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는 그런 주장이 실증적인 진술로 받아들여진다는 게 문제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속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경험한 행복의 기준을 저 세상에도 적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극단의 복지가 보장된 세상을 천당, 또는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통치하는 내세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소꿉놀이만을 삶의 모든 것으로 인식하는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다. 생명과 세계에 대한 유치한 인식론만이 아니라 소유를 향한 과도한 욕망이 상급의 차별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게 했다.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5장의 비유가 하나님 통치의 전복성을 가리킨다고 말했듯이 내세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생명은 우리의 예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는다. 씨앗의 세계와 꽃의 세계가, 애벌레와 나비의 세계가 연속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연속적이듯이 오늘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이 세상의 생명과 내세의 생명은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연속적이면서 동시에 불연속적이다.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그 어떤 세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이다. 창조자인 하나님만이 이룰 수 있는 그런 내세를 인간의 설계도 안으로 위축시키지 말자. 그것이 바로 불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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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4]임마누엘

2008.02.04 19:31:15

맞습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내세를 설계하실 수 있으십니다.
또한 현세또한 그분의 설계로만 바르게 이끌어집니다

[레벨:3]삶에서..

2008.02.05 16:33:59

많은 기독교인은 신앙의 대부분의 것들, 하나님의 나라, 구원, 믿음 이러한 신앙의 기본이라고 하는 것들조차도 모두 소유에 바탕을 둔다는 데 문제가 있겠지요..신앙의 대부분이 소유에 바탕을 둔 것이기보다 존재에 훨씬 바탕을 둔 것일텐데 말이죠..소유에 바탕을 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이라기보다는 천민 자본주의의 노예 혹은 정복주의의 주동세력쯤 되는 사람들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어요.. 목사님은 어찌도 그리 중요한걸 잘 짚어주시는지 매번 놀라울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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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2.08 22:15:25

내세 문제도 결국은 신앙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신앙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단순히 실용적인 차원에서 접근하는 태도는 건강하다고 볼 수 없겠지요.
여기서 신앙적인 차원이라는 것은 이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의 더 깊은 세계라 할 수 있지요.
그게 무엇인지는
이미 성서가 말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성서를 바르게 공부하는 게 필수적이랍니다.
내세는 분명히 이 세상 이후를 말하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깊이를 말하기도 하답니다.
도대체 오늘 이 세상에 내세가 어떻게 들어와 있을까요?
임마누엘 님과 삶에서 님은 모두 한창 젊으신 분이군요.
앞으로 계속해서 신앙의 성장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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