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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와 제사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예배가 자주 드려진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가르침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앙적 열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야 자주 드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배가 바르게 드려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서 오는 역작용인지 모르겠다. 주일에 진정한 마음으로 한번 예배를 드렸다면 사실 더 이상의 예배는 필요하지 않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자주 군것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자주 드리는 예배행위와 잘못된 예배는 일종의 악순환인 것 같다.
이런 악순환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배 개념의 왜곡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참된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신자들의 종교적 욕구인 은혜가 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말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말과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분명히 예배에 대한 몰이해이며, 변질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배에서 은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예배에서 결코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전통적 전례인 제사행위를 예로 들겠다. 우리의 전통적 제사행위가 조상신에 대한 숭배이며, 신약의 예배 및 구약의 제사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측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모든 걸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사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조상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제사행위에서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고 최선으로 그 행위에 천착할 뿐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요구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 한다.
제사는 엄격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진행된다. 제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이나 술 따르는 방법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의 방식이 이렇게 일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조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역시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이라고 한다. 그 예전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하나님에게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택한 종교적 의식이다. 기도, 찬송, 말씀봉독, 교독, 성찬, 설교 등등,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순서는 오직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게 맞춰져 있다.
그런 모든 예전도 역시 역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예전 예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쉽게 상대화하지도 말아야한다.
오늘 소위 <열린 예배>라는 방식의 예배는 이런 전통적 예전을 상대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이런 예배의 무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은혜에 놓인다.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혜 지상주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의 근본을 허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은혜까지도 세속화한다.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종속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해서, 은혜를 인간의 종교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으니, 은혜의 세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지금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빠지기 쉬운 형식주의나 엄숙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예배의 주체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청중들의 종교적 친교 모임인지, 아니면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doxology)인지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라. 모든 실상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한국교회의 신앙적 특징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아마 예배가 자주 드려진다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모이기에 힘쓰라는 가르침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며, 신앙적 열정의 발로이기도 하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보다야 자주 드리는 게 낫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배가 바르게 드려진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조금 비판적으로 본다면 우리가 너무 많은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참된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서 오는 역작용인지 모르겠다. 주일에 진정한 마음으로 한번 예배를 드렸다면 사실 더 이상의 예배는 필요하지 않다. 군것질을 많이 하는 아이들은 제대로 된 밥을 먹을 줄 모르고, 제대로 된 밥을 먹지 못하니까 결국 자주 군것질을 하게 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지나치게 자주 드리는 예배행위와 잘못된 예배는 일종의 악순환인 것 같다.
이런 악순환에서 가장 본질적인 문제는 예배 개념의 왜곡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만 참된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에서 신자들의 종교적 욕구인 은혜가 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다. 예배를 드리러 간다는 말이 “은혜를 받으러 간다.”는 말과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건 분명히 예배에 대한 몰이해이며, 변질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광을 돌린다는 말과 은혜를 받는다는 말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지평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진정한 예배를 드리면 당연히 은혜를 경험하겠지만,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진정한 예배를 드린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예배에서 은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은혜는 예배에서 결코 주제가 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일 뿐이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한민족의 전통적 전례인 제사행위를 예로 들겠다. 우리의 전통적 제사행위가 조상신에 대한 숭배이며, 신약의 예배 및 구약의 제사가 야훼 하나님에 대한 경배라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긴 하지만, 그 형태에서는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양측 모두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모든 걸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사행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오직 조상에게 집중한다. 그들은 제사행위에서 어떤 반대급부를 원하지 않고 최선으로 그 행위에 천착할 뿐이다. 예배도 마찬가지이다.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적 요구를 배제하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에만 집중해야 한다.
제사는 엄격한 절차와 의식에 따라서 진행된다. 제상에 음식을 올리는 방법이나 술 따르는 방법도 제사에 참여하는 사람의 기분에 따라서 달라지지 않는다. 제사의 방식이 이렇게 일정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조상에게 최대한의 예의를 드리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배도 역시 그런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것을 우리는 예전이라고 한다. 그 예전은 지난 2천년동안 교회가 하나님에게 최대한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택한 종교적 의식이다. 기도, 찬송, 말씀봉독, 교독, 성찬, 설교 등등, 예배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순서는 오직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에게 맞춰져 있다.
그런 모든 예전도 역시 역사 과정에서 사람들이 결정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게 아니라는, 그래서 그 시대에 맞도록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는 반론이 가능하다. 그 말은 옳다. 그러나 전통적 예전 예배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수많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완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을 쉽게 상대화하지도 말아야한다.
오늘 소위 <열린 예배>라는 방식의 예배는 이런 전통적 예전을 상대화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이런 예배의 무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은혜에 놓인다. 예배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예배에 참여한 사람들의 영적 만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혜 지상주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예배의 근본을 허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은혜까지도 세속화한다. 은혜의 주체인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은혜에 종속되어야 할 인간에 대한 관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조금 더 심각하게 말해서, 은혜를 인간의 종교 심리적 차원으로 끌어내릴 위험성마저 보이고 있으니, 은혜의 세속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우리가 지금 로마 가톨릭의 미사가 빠지기 쉬운 형식주의나 엄숙주의로 돌아가자는 게 아니다. 예배의 주체를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 돌려야 한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단순히 청중들의 종교적 친교 모임인지, 아니면 참되게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doxology)인지 조금만 세심하게 살펴보라. 모든 실상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목사님의 말씀은 늘 뜻밖의 깨달음 입니다.
당연이 그런것이라고 아예단정지어놓고 고민도 해 보지 않은 채 걷는 신앙의 길에서
파문을 던지고 도전해 옵니다. 그것은 충격이요, 깨달음이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진리 입니다.
예배 홍수 속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질식될 지경 입니다.
그런 예배가 거의 하나님을 위한 경배가 아니라 인간의 안전을 위한 예배로 전락되고
예배의 본질이 이미 땅에 묻힌채 예배는 수도 없이 드려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비극인 것 입니다.
이런 고뇌 앞에 서면 저는 가슴이 터질것 같습니다.
당연이 그런것이라고 아예단정지어놓고 고민도 해 보지 않은 채 걷는 신앙의 길에서
파문을 던지고 도전해 옵니다. 그것은 충격이요, 깨달음이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은 진리 입니다.
예배 홍수 속에서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질식될 지경 입니다.
그런 예배가 거의 하나님을 위한 경배가 아니라 인간의 안전을 위한 예배로 전락되고
예배의 본질이 이미 땅에 묻힌채 예배는 수도 없이 드려지고 있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예배의 본질에 대해서 의문을 갖지 않고 있다는 것이 더 큰 비극인 것 입니다.
이런 고뇌 앞에 서면 저는 가슴이 터질것 같습니다.
한국 개신교 예배의 문제점
- 대다수 교파들이 말씀중심의 예배라는 구실로 설교에 치우쳐 있고, 성만찬(Holy Communion)을 소홀히 한다.
- 감리교회, 성공회, 루터교회를 제외하고는 기도서가 없기 때문에,예전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 성공회, 감리교회, 기독교장로회, 루터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력에 따라 성서말씀이 배치된 성서정과(Lectioanary)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가 자신의 구미에 따라 설교본문을 정하며, 예배시간에 읽는 성서말씀도 신약성서에만 치우쳐 있다.
-예배나 설교를 은혜받는 통로로 오해한다. 은혜받는 통로는 경배와 찬양이니, 열린예배이니 하는 열광적 예배나 청중의 종교적 감성을 자극하는 부흥사의 설교가 아니라 성사(Sacrament,성례전)이다.
- 대다수 교파들이 말씀중심의 예배라는 구실로 설교에 치우쳐 있고, 성만찬(Holy Communion)을 소홀히 한다.
- 감리교회, 성공회, 루터교회를 제외하고는 기도서가 없기 때문에,예전이 통일되어 있지 않다.
- 성공회, 감리교회, 기독교장로회, 루터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력에 따라 성서말씀이 배치된 성서정과(Lectioanary)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목사가 자신의 구미에 따라 설교본문을 정하며, 예배시간에 읽는 성서말씀도 신약성서에만 치우쳐 있다.
-예배나 설교를 은혜받는 통로로 오해한다. 은혜받는 통로는 경배와 찬양이니, 열린예배이니 하는 열광적 예배나 청중의 종교적 감성을 자극하는 부흥사의 설교가 아니라 성사(Sacrament,성례전)이다.
차량 구입예배, 입주예배, 시험 합격 기원예배, 안전 운전 감사 예배 등이 우리 전통의 고사와
무엇이 크게 다른지 의문이 갑니다.
주체는 하나님 인것 같지만, 인간의 길흉화복에 대한 맹목적인 미신이 아닌지 생각이 듭니다.
조금씩 알면 알수록 하나님의 대한 영성은 어렵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