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조회 수 5606 추천 수 83 2008.03.27 14:45:17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로고스인 신학(theo-logy) 앞에 진보라는 덧말을 붙이는 게 옳은지, 그게 가능한지 필자는 잘 모르겠다. 태양과 달을 어찌 진보와 보수로 나눌 수 있는가. 우리의 예상과는 상관없이 바람처럼 자기의 뜻대로 생명 세계를 일구어가는 성령을 어찌 진보와 보수로 편 가름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시고, 전적으로 새로운 세상(에온)을 종말론적으로 이루실 하나님은 그저 하나님일 뿐이며, 그 하나님의 계시에 반응하는 신학도 그저 신학일 뿐이다. 다만 신학 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삶의 태도나 경향이라는 범주 안에서만 보수와 진보라는 말은 가능하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신학’은 상수이며, ‘진보’는 변수일 뿐이다. 변수는 상수에 종속적인 자리에 있을 경우에만 소극적으로나마 의미가 있다.
한국의 신학과 교회 현장에서는 간혹 이 진보가 신학보다 상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 같다. 진보신학의 한 유형인 여성신학만 해도 그렇다. 주로 백인 남자 신학자들에 의해서 수행된 지난 2천년 기독교의 정통신학을 극복하기 위해서 여성의 당파적인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여성신학이 기독교 신학과 교회의 여성 차별적 질서를 일정 부분 교정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성신학이 단지 대안적 실효성이 있을 뿐이지 신학의 중심으로 들어올 수는 없다는 점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종속변수인 여‘성’이 전면에 드러난 탓이 크다. 전체 신학의 틀에서 볼 때 작은 부분에 불과한 정통신학의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적인 요소를 전체인 것처럼 몰고 갔다는 말이다. 예컨대 어거스틴의 여성 혐오적 발언을 인용하면서 그의 신학 전체를 매도하는 것은 그의 신학을 바로 보는 게 아니다. 어거스틴의 성차별적 진술은 옥의 티이거나 또는 시대적 한계에 불과한 반면에, 삼위일체를 비롯한 대부분의 진술은 기독교 신학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지금 필자는 한국교회에서 거의 조폭의 수준으로 작동되는 가부장적 행태를 변호하려는 게 아니다. 여성신학이 신학의 상수를 놓치고 변수에 불과한 ‘성’의 해석학에 머물러서 결국 신학의 왜소화를 불러오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에서 하는 말이다.  

민중, 역사변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진보신학이라고 하면 여성신학보다는 민중신학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텐데, 필자가 보기에 민중신학도 역시 여성신학과 비슷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민중사관의 시각으로 기존의 정통신학을 해체, 또는 재구성하자는 민중신학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성공적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신학’보다는 ‘민중’에 힘이 너무 강하게 들어갔기 때문이다. 테니스 같은 운동이나 피아노 같은 악기 연주에서도 그렇지만 무엇이든지 힘이 들어가면 기본자세가 허물어지는 법이다. 필자는 여기서 민중신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제기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하지는 않고, 그저 상식의 수준에서 필요한 대목만 짚겠다.
우선 민중신학과 연관된 논의에서 반복해서 거론된 것이겠지만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 개념이 기독교 신학에 상응하는 것인지 확신이 서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개념 자체가 정확하게 들어오지 않는다. 민중신학과 같은 계열에 속하는 해방신학이 말하는 해방개념은 상대적으로 명료하다. 그 해방은 정통신학이 말하는 구원과 맥이 닿기 때문인 것 같다. 출애굽의 해방으로부터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로부터의 해방,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이 감당해야 할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에 이르기까지 성서와 기독교 신학의 전통 안에서 우리는 해방신학의 해방개념을 찾을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그 해방은 창조와 부활과 종말 개념과도 연결된다. 정치신학이 말하는 정치 개념도 기독교 신학의 보편적인 근거가 된다. 오늘 모든 사람들의 삶이 정치와 직간접적으로 결탁해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해석학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해방과 정치가 보편적 개념인 반면에 민중은 특정한 계급에 대한 특수한 개념이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 구원을 지향하는 기독교 신학이 특정 계급에 몰입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민중이 없는 시대가 온다면 그때 민중신학은 무엇을 어찌할 것인가?
자, 우리의 질문은 이것이다. 민중은 누군가? 여성신학의 주체가 가부장적 질서에서 희생당하는 여성을 가리킨다면 민중신학의 민중은 군주의 봉건체제에서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여성이 남성을 대립개념으로 삼듯이 민중은 군주를 대립개념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오늘 대한민국은 봉건사회가 아니다. 그 질이야 어찌되었든지 일단 형식적으로는 민중이 주인으로 나선 민주사회이다. 군주가 없는 현대사회에서 민중 개념은 모호할 수밖에 없는 게 아닌가. 그래도 우리의 현실에서 소극적으로나마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민중은 농민, 도시빈민, 비정규직 종사자 등등, 중산층 이하에 속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깨어 있는 중산층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민중신학자도 있을지 모르겠다. 중산층 중에서도 연봉 5천만 원 이하만 포함되는지, 아니면 그 너머도 포함되는지 누가 구획정리를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모호한 대상*을 중심에 놓는 신학이라고 한다면 그 토대가 부실한 게 아닐는지.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지난 70,80년대에 도도한 흐름을 이루어 한국을 대표하는 신학으로 자리매김한 민중신학의 역사를 필자가 모르기 때문에 이렇듯 딴지걸기 식으로 막말을 쏟아내는 게 아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민중들의 삶이 여지없이 파손되는 이 현실 앞에서 기독교인이 감당해야 할 역사적 책임이 무엇인지 몰라서 하는 말도 아니다. 그런 현실진단과는 별개로 ‘민중’ 개념이 과연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될 수 있느냐, 하는 신학의 근본 문제를 제기하는 중이다. 왜냐하면 민중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서 결국 민중신학이 여성신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학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오기가 힘들다고 보기 때문이다.  

민중신학이 중요한 해석학적 목표로 삼고 있는 역사변혁과 연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역사변혁의 주체인가, 대상인가? 조금 더 풀어서, 민중이 바로 메시아적 능력을 담지하고 있는 주체인가, 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구원받아야 할 대상인가? 일단 양쪽 모두의 가능성을 열어놓을 수 있겠지만, 민중신학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당연히 전자에 무게를 두어야 한다. 후자에 무게를 둔다면 굳이 민중신학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도 없다. 민중이든, 군주이든, 히브리인이든, 헬라인이든, 할례파이든, 무할례파이든, 더 나아가서 예수를 믿든 믿지 않던 모든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대상이니 말이다.
민중을 구원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무게를 둘 때 민중신학의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또 하나의 아주 실제적인 근거는 다음과 같다. 민중신학과 대립적인 보수주의자들도 민중 구원을 위해서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양적인 면에서는 민중신학적 성향의 진보주의자들보다 보수주의자들이 훨씬 역동적으로 이 일에 참여하고 있을 것이다. 노숙자와 결식자들을 돌보는 일에서부터, 북한주민 돕기에서도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 못지않게, 아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CCC에서는 수년 전부터 북한에 젖 염소 보내기 운동을 벌이고 있으며, 홍 아무개 목사가 1992년부터 사무총장으로 관여하고 있는 남북돕기운동이 북한에 지원한 물자는 천문학적이다. 들리는 말로는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께서 평양에 심장전문병원을 짓기로 했다고 한다.
민중신학에 속한 인사들은 보수주의자들의 이런 실천을 자신들의 실천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보수주의자들의 이런 실천은 민중을 단지 동정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그래서 결국 역사의 진실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는 ‘민중의 아편’과 같다고 말이다. 이에 반해 민중신학의 실천은 민중을 각성시킴으로써 역사의 주체로 우뚝 서게 한다는 점에서 진정한 ‘민중의 구원’이라고 말이다. 이런 주장은 부분적으로는 옳을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 틀릴 수도 있으니, 여기서 더 이상의 논란은 그만두자. 대신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각성시킨다는 것이 바로 민중 메시아니즘이며, 그것을 통해서만 민중신학의 존립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이 민중 메시아니즘이 기독교 신학에서 타당한지에 대해서 질문하겠다.

민중 메시아니즘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믿고 기다리는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민중 메시아니즘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인지, 필자의 입장에서 당혹스럽기 짝이 없다. 오늘의 교회 현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민중은 오히려 반(反)메시아적 경향을 강하게 보인다. 그들은 기복적이고, 자기중심이다. 그들이 바로 부동산투기를 하며, 위장전입과 탈세를 밥 먹듯이 하고, 새만금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돈만 된다면 생태문제는 안중에도 없다. 이런 행태를 중산층 이상의 문제로만 돌리면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위장전입과 탈세 등등, 수많은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데도 이명박 씨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데에는 민중들의 공범의식이 일정 부분 작용한 게 아닐까 생각된다.
오늘 한국교회의 부익부빈익빈 현상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대중적인 대형교회에 몰려드는 신자들이 모두 민중신학이 말하는 바로 그 민중들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조 목사께서는 자신의 목회를 민중목회라고 명시적으로 발언하기도 했다. 그들의 요구는 아주 분명한데, 핵심적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늘 현재의 삶에서 예수 믿고 복 받아 잘 먹고 잘 살아야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내세에 구원받아 천당 가자는 것이다. 이게 바로 민중의 적나라한 욕구이다. 민중신학이 중요한 전거로 삼고 있는 출애굽 공동체도 역시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그들은 물과 먹을거리가 떨어질 때마다 모세와 야훼 하나님을 원망했다. 성서기자는 이에 관한 사연을 대표적으로 몇 가지만 간추려서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광야횡단의 40년 동안 쉴 새 없이 불평불만이 쏟아졌을 것이다. 오죽했으면 모세는 한나절에 3천명(출 32:28)*이나 되는 사람을 칼로 베어죽였겠는가. 그 당시 근동의 하층민들을 통칭하는 히브리인들은 자유와 구원의 역사를 끌어갈만한 동력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었다. 민중을 이상화(idea)하면 신학은 관념화할 수밖에 없다.

*금송아지 사건으로 인해서 촉발된 이 동족 살해는 히브리 민중을 이끌고 광야를 횡단해야 할 모세가 처한 ‘삶의 자리’가 얼마나 척박했으며,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준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과 약속보다는 이집트의 일상적 평안을 그리워하는 민중들과 극한으로 대립해야만 했다. 그의 처지는 지금 백척간두(百尺竿頭)와 같다. 금송아지 사건은 야훼로부터 이미 용서를 받았지만, 그는 진일보(進一步) 하는 심정으로 동족을 집단 살해했다. 그의 결정이 바른 것인지 아닌지 우리는 판단하기 어렵다. 먼 훗날 마지막 심판에서 모세는 자신의 이 행위에 관해서 추궁 받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중들은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현실적 금송아지에 큰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이기적이고 퇴폐적인 민중이 아니라 역사의 흐름을 분별할 줄 아는 ‘각성된 민중’이 바로 민중신학의 민중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안이한 발상이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것처럼 민중들이 일시적으로 혁명의 주체가 되어 역사의 진보를 이끌어낼 수는 있다. 그러나 성공한 혁명은 부지불식간에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status quo) 또 하나의 보수적 집단을 형성한다. 그것이 소비에트연방공화국에서는 부패한 관료주의로 나타났다. 지금 필자는 현실사회주의보다 자본주의가 더 우월한 이데올로기라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게 아니라 민중의 의식을 깨워서 역사 변혁의 주체로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안고 있는 인간학적 한계를 말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역사를 변혁시킬 수 있다는 낙관론적 사회과학보다는 인간의 죄를 존재론적 깊이에서 바라보는 성서의 인간이해가 근본적으로 옳다는 뜻이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현실주의적 윤리관이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닐는지.(도덕적인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 참조)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자. 여기 연봉 2천5백만 원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다고 하자. 그는 노조활동을 통해서 정규직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연봉도 훨씬 많이 받게 되었다. 이전에 비해서 삶의 조건이 크게 좋아진 것이다.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온다 하더라도 다른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서 강력하게 투쟁할 것인가? 개인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크지 않다. 우리가 한국의 노조에서 경험하듯이 노조는 조합 이기주의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민중을 위한 당으로 나선 민노당이 자주파와 평등파의 헤게모니 투쟁으로 결국 분당하고 말았다는 최근의 사건을 참고하시라. 또 다른 예로, 여기 한 동네에 치킨 집이 두 군데가 있다고 하자.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치열하게 경쟁할 뿐이다. 이들에게 역사변혁은 거리가 먼 이야기이다. 민중은, 아니 인간 전체는 그렇게 세상을 살아간다. 필자는 민중들의 이런 삶을 매도하는 게 아니라 그게 현실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뿐이다. 이런 점에서 민중 메시아니즘은 관념이지 현실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필자에게 민중신학의 주장은 관념으로 들린다. 그들은 역사를 말하는데, 그 역사가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들은 그 역사의 변혁을 말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변혁하자는 것인지 모호하다. 물론 소외받는 민중들이 주인처럼 대접받는 세상으로 바꾸자는 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양극화를 고쳐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문제는 민중신학의 민중 개념이 모호하고, 특히 민중 메시아니즘이 관념적이어서 역사 변혁, 또는 역사 진보라는 그들의 주장 자체가 공허하게 들려올 때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이 느낌이 필자의 어리석음이었으면 좋으련만.

민중신학의 관념성

지난 노무현 정권에서 민중신학 계열의 진보적 인사들이 강력하게 반대한 사건들이 제법 있었다.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문제, 이라크 파병, 그리고 한미 FTA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다른 건 접어두고 민중의 삶에 직결되는 한미 FTA를 중심으로 진보신학, 또는 진보운동가들의 주장이 필자에게 관념적으로 들리는 이유를 두 가지만 짚겠다.
첫째, 경제 전문가들에게도 첨예하게 논쟁거리가 되는 주제를 신학자, 또는 목회자가 나서서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그 사안의 실체를 놓치고 변죽을 울릴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마치 신학자가 진화론의 자연과학적 논의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과 같다. 기도회를 열고 시위를 벌이는 방식으로 진리를 획득해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런 상태에서 우리의 주장은 그야말로 설교가 되고 말 것이다. 그게 관념이 아니고 무엇인가.  
이 문제는 사실 한미 FTA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과 윤리학의 관계 전반에 미친다. 기독교 신앙이 개인과 사회의 윤리적 삶에 어느 정도로 개입할 수 있느냐, 하는 게 여기서 관건이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거라든지, 하나님의 나라는 말이 아니라 능력에 있다는 신약성서의 아포리즘을 거론할 것도 없이 기독교 신앙이 실제의 삶과 일치해야 한다는 것은 긴 말이 필요 없는 당위에 속한다. 그러나 교회가 신자들의 모든 삶을 일일이 간섭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은 하나이지만 거기에 접근하는 길은 여럿이기 때문이다. 삶에 관해서 자연과학자의 접근이 다르고, 시인의 접근이 다르듯이, 기독교 신앙의 접근도 역시 다르다. 가장 핵심적인 관점만 짚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통치에 전적으로 의존적이지만, 세속문화는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에 무게를 둔다. 교회와 세상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동시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하나님의 영광’ 신학에 근거해서 제네바의 세속정치까지 간섭했던 칼뱅보다는 세속정치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마틴 루터의 ‘두왕국설’(Zweireichlehre)이 원칙적으로는 더 옳은 게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 문제에 깊숙이 관여하는 진보 인사들의 행태는 개인 삶에 깊숙이 관여하는 보수 인사들의 행태와 비슷하다.* 일반적으로 보수 인사들은 신자들의 삶을 어린아이들에게 밥 먹는 방법을 가르치듯이 신앙적으로 일일이 재단해나간다. 십일조, 성수주일, 기도생활을 비롯해서 심지어 대통령 선거에 대한 지침까지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암시적으로 제시한다. 이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진보 인사들은 사회 문제에서 이렇게 일일이 훈수를 두려고 한다. 이 양자의 행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보수주의자들은 역사를 퇴행으로 몰아가고, 자신들은 진보시킨다고 말이다. 필자도 기본적으로는 이런 주장에 동의한다. 우파와 좌파의 역사 이해가 다르듯이 기독교 신앙에서도 보수와 진보가 다르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삶의 방식에 지나치게 간섭함으로써 기독교 신앙의 본령을 훼손시킬 개연성이 엿보인다는 점에서는 피장파장이다.

*진보신학과 보수신학이 한국교회 안에서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특히 설교행위에서 그런 행태를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성서보다는 청중들을 지나치게 의식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양쪽 모두 일종의 포퓰리즘의 포로가 되었다는 말이다. 보수적인 목사들이 활동하는 대형교회의 설교는 청중들의 종교적 욕구에 과잉 반응하는 반면에, 진보적인 교회의 설교는 사회적 이슈에 몰두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양쪽 모두 성서의 세계를 소홀하게 다룬다는 점에서는, 그래서 결국 성서를 도구화한 채 대중과 영합한다는 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필자가 보기에 한미 FTA는 칼처럼 절대 악이거나 절대 선이 아니라 국지적 경제구조를 지구적 차원으로 돌리는 경제 시스템이다. 그것을 미국의 음모론으로 몰고 가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만약 그런 방식이라고 한다면 현실의 모든 체제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오늘과 같은 지구화 시대에 가치중립적인 한미 FTA를 기독교 신앙의 이름을 걸고 막아내야 할 절대 악으로 간주하는 민중신학의 시각이, 필자가 순진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관념적으로 다가온다.
둘째, 앞에서 민중신학의 정체성과 연관해서 언급한 것이지만, FTA가 민중의 삶을 현재보다 훨씬 열악하게 만든다고 하는 그 주장에서 그 민중의 실체가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미 FTA 협정을 큰 틀에서 단순히 경제 논리로만 본다면 미국 물품의 수입으로 타격을 받는 이들도 있겠지만, 우리 물품의 수출로 이득을 보는 이들도 있다. 전자는 주로 농산물에 관계되는 분들이고, 후자는 공산품에 관계되는 분들이다.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이 농민들뿐이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수출이 아니면 먹고 살기 힘든 공장 노동자들까지 포함한다면 한미 FTA 반대는 결국 대다수 수출 공단 노동자들의 삶을 흔드는 게 아니겠는가. 한미 FTA가 식량주권의 위기에 대처할 수 없게 한다거나, 결국에는 일반 수출산업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 등에 대해서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니까 입을 다물겠다.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오늘 여기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이며, 반민중적인 질서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능사라는 말은 아니다. 비록 한정적이라 하더라도 한미 FTA 반대투쟁이 필요하다는 사실 자체를 외면하려는 게 아니다. 필자도 개인적으로 한미 FTA 반대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것은 현재 한국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성인으로 선택한 것뿐이지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필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민중신학이 민중 프레임에 고착됨으로써 자신들이 극복하려 했던 정통 신학의 관념성에 다시 빠져들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기독교의 메시아니즘을 세속화했다는 사실이다.    

개량을 넘어 새로움으로!

민중신학의 관념성과 그 신학이 보이는 메시아니즘의 세속화라는 필자의 주장을 일련의 민중신학 동지들은 동의하기 어려울지 모르겠다. 이런 문제는 이렇게 필자가 일방적으로 진술하는 이런 글로는 해결될 수 없지만 부분적인 소통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절대적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에서 삶을 훼손당하고 있는 민중들만이 아니라 물신숭배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부르주아적 계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가 제공해야 할 복음이 무엇인지를 이 글머리에서 언급한 ‘진보’ 개념과 연결해서 설명하는 것으로 필자의 주장을 마무리하겠다.  
첫째, 무엇이 진보인가?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진보신학이 제시하는 진보는 사회과학이 제시하는 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기독교 신학으로서는 자격미달이 아닐는지. 진보는 역사를 앞으로 끌고 나간다는 뜻인데, 구체적으로는 역사 변혁을 가리킨다. 그런데 변화와 개혁은 단지 진보신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금 신자유주의는 세계 경제구조를 전(全)방위적으로 바꿔나가려고 한다. 현실사회주의는 변화를 거부하다가 실제로 민중의 삶을 쇠락의 길로 빠뜨렸다는 게 역사의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이다. 북한체제도 그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역사의 끝과 관계된 기독교 신학의 종말론은 사회과학의 진보사관을 훨씬 뛰어넘는다. 역사의 끝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며, 은폐되었던 생명이 마치 꽃이 피듯이 활짝 드러난다고 보는 기독교의 종말론은 진보의 극치이다. 종말론의 모태인 묵시문학적 표상으로 진술된 요한계시록을 보라.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시작이 아니라면 결코 참된 생명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런 요한계시록의 종말 표상은 실질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는 기독교 신학을 더 공부해야 하며, 무엇이 실질인지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더 필요로 한다.  
둘째, 종말론적 지평에서 민중들의 구원을 선포한다고 할 때 우리는 어떤 실천을 필요로 하는가? 필자의 눈에 민중신학의 진보적 실천은 복지 프로그램과 다르지 않다. 정치 민주화, 경제 정의, 마이너리티 보호, 생태적 마인드 등등, 전반적으로 휴머니즘이 민중신학의 기초이다. 이런 귀한 가치들은 반드시 진보신학에서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다. 세상을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가 굳이 가르치지 않아도 복지와 휴머니즘을 삶의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복음, 또는 구원은 이런 복지향상과 휴머니즘 제고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팔복의 말씀을 따른다면 가난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게 하나님의 구원에 훨씬 가까운 삶이다. 하나님 이외에 아무 데도 희망을 걸 수 없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종말론적 구원을 간절히 기다릴 테니 말이다. 이런 설명이 어떤 분들에게는 말장난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기독교 신학은 근본적으로 왜곡된 역사 너머의 현실을 더 정확하게 직시해야만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없다면, 또는 그것이 상대화된다면 우리는 굳이 기독교 신학이라는 자리에 설 필요가 없다. 개혁적이고 친 민중적 시민단체나 정치결사 단체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교회는 시민운동으로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자리에 의해서만 존재 근거가 성립된다. 그것은 역사의 인간학적 개량이 아니라 역사의 전적인 새로움을 의미하는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라는 자리이다. 그 새로움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종말론적으로 기다린다. 이런 종말론적 기다림에는 실천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기독교 신학에 대한 큰 오해이다.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에게서 볼 수 있듯이, 사실 기다림보다 더 역동적인 실천은 없다.
당신의 주장은 일반론일 뿐이어서 이 가혹한 현실에 처해 있는 민중들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은 이 고약한 현실을 하나님 나라의 지평에서 전향적으로 바꿔나가기 위해서 예언자적 역사의식과 변혁적 실천을 전심전력으로 추구해야 한다고 말이다. 필자는 이런 생각에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물질 숭배적 시대정신과 야합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장에서는 신학의 본질에 천착하기보다는 일단 현실변혁에 우선권을 두는 게 시급한지도 모른다. 다만 가능하면 민중이나 진보보다는 신학에 더 무게를 놓고 사유하고 실천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민중(행위)은 신학(존재)에서 영적 자양분을 받아야만 생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통치를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기독교 경전인 성서의 세계와 그 성서에 대한 역사적 해석의 결과물인 정통신학과의 해석학적 소통*에 구도 정진할 때 민중신학의 진정한 진보성이 담보되는 게 아닐는지.

*2008년 1월28일 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 주최로 열린 “진보신학의 미래- ‘진보신학’, 무엇이 진보인가?” 심포지엄 발제강연에서 김용복 선생은 생명해방운동이라는 한국적 신학, 아시아적 신학의 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서양기독교와의 해석학적 단절을 시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로 가부장적이고, 서구 중심적이며 주객도식적 세계관을 극복하자는 의미라고 생각되지만,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지평융해(Horizontverschmelzung)를 통해서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 위해서는 각각의 지평이 고유하게 살아나야 한다는 가담머의 해석학적 구도에서 볼 때 서구신학과의 해석학적 단절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바니>를 우리의 창(唱)으로 바꿔 불러야만 참된 노래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기독교 사상, 2008년 4월호에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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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08.03.27 15:49:20

제 블로그에 퍼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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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2008.03.28 05:57:53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이 글에 대해 어떤 말을 한다는 것에 주저함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민중 신학이나 여성 신학이 신학적 성찰에 보다 충실해야한다고 하신 부분에서 공감이 가기도 하고 가지 않기도 합니다. 신학의 본질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러자면 두 신학이 본래 제기된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이 되지 않나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한가지는, 사소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만, 민중의 개념을 군주제의 파생 개념으로 설명하신 부분에 대한 것입니다. 민중이라는 개념의 본래 의미는 그러하지만, 민중 신학이나 해방 신학이 나오는 역사적 맥락에서 민중의 개념이 정의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렇다면 20세기 이후 자본주의의 체제의 모순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로 규정되어야 하며 이것은 본질적으로 구약과 복음서에서 메시아적, 총체적 구원을 희구하는 가난한 사람들(반드시 경제적인 의미만이 아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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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3.28 23:39:34

이방인 님,
좋은 문제를 제기해주셨군요.
1. 여성신학과 민중신학의 역사성을 부정한 거 아니냐, 하고 문제를 제기하셨군요.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요,
남한의 70,80년대 상황을 간과했다는 뜻인가요?
그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거기에 너무 몰두해서 결국 그것보다 더 원초적인 신학의 자리를 잃었다는 뜻이지요.
2. 민중 개념에 대해서 말씀하셨군요.
그것도 1번과 비슷한 문제네요.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는 건 옳습니다.
그렇다면 역사적 맥락이 달라졌다면 그 신학도 달라져야하겠군요.
더 중요한 건 그런 구체적인 역사도 역시 전체 보편적인 역사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거겠지요.
3. 성서의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군요.
성서의 해방이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해서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니까 여기는 안 되겠구요.
기본적으로 정치, 경제 정의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라는 점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민중신학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들의 민중 메시야니즘과 더불어
민중 구원을 지나치게 사회과학적으로 접근한다는 것이에요.
그것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더 근본을 놓치고 주변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거지요.
보수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주의자들도
기독교의 근본, 정통, 그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는 거 같아서요.
좋은 주말!

[레벨:3]DOMA

2008.04.03 16:55:17

목사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청파교회에서 열린 한완상 박사님의 강연에서 느꼈던 의문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과연 무엇인가?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과학적으로 착취와 억압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오로지 영적인 세계일까? 그러나 결정적인 대답은 할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고 한다면 하나님을 우리의 인식체계로는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역시 우리가 어떻다고 정의할수 없기 때문일것입니다. 우리의 인식체계를 뛰어넘는 세계, 그 세계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수 없지만 다만 믿음으로 그 세계를 기다리는 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의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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