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웅 목사님!

조회 수 5226 추천 수 48 2008.04.20 19:33:58
정세웅 목사님,
주일을 잘 지내고 계시지요?
‘목사님’ 맞지요?
내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혹시나 해서요.
저도 샘터교회 교우들과 예배를 잘 드리고
지금 아주 편안한 주일 저녁을 맞고 있습니다.
사랑채 2749번에 실린 꼭지글 '토마스 뮌처, 일대기' 대글에서
농민전쟁에 대해서 뮌처와 상반되는 루터의 입장을
호의적으로 해석하는 이유가 뭐냐고 질문하셨군요.
진리, 종교개혁, 복잡한 이해관계, 솔직한 성찰 등등의 관점을 주셨구요.
내가 루터를 호의적으로 해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래와 같이 두 가지 의미를 다 담고 있겠지요.
농민전쟁에 관한 루터의 입장을 혹시 오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라는 게 하나이고,
루터의 입장이 잘못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공연히 싸고도는 거 아닌지라는 게 다른 하나이겠지요.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우선,
종교개혁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솔직하게 성찰하는 게
진리에 더 가깝다는 정 목사님의 말씀이 무슨 뜻이에요?
무엇을 솔직하지 않게 숨겼다는 뜻인가요?
기독교의 정통에 대한 이런 방식의 문제 제기를 우리는 흔하게 듣습니다.
안티 기독교 사이트에서도 그렇고,
자칭 기독교에 속해 있다는 분들에게도 그렇지요.
그들은 기독교의 역사에 무언가 대단히 흉칙한 음모가 개입돼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지난 수년 동안 그런 책들이 많았잖아요.
무슨무슨 '코드'라나, 하는 유의 책들 말입니다.
예수의 진짜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걸 교황청이 쉬쉬 했다는 식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놓치고
개인적으로 심취했던 헬라철학의 영지주의로 기독교를 해석했다고도 말합니다.
어거스틴 같은 교부들의 삼위일체론을
이미 한물 간 사상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꽤나 있습니다.
플라톤의 실체론적 형이상학에 불과하다고 말입니다.
나는 그런 이들을 보면 참으로 경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행동도 경솔하고 사상도 경솔한 것 같더군요.
조금 강하게 말해서
그들은 바울 신학도 모르고,
어거스틴의 신학도 모르는 분들이에요.
아니 기독교 자체를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를 모른 채 주변 사상에 휩싸여 기독교에 시비를 거는 것뿐이지요.
내가 보기에 그들은
사이비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불과합니다.
모든 걸 해체하는 방식이지요.
그들에게는 진리도 없습니다.
진리가 존재론적으로, 인격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는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믿는 사람들이랍니다.
여기서 인격은 동성동형론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고유하고 존재론적 통치를 가리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바로 진리의 영입니다.
그 영은 인간의 뜻과 상관없이,
흡사 바람처럼 생명의 세계를 열고 이끌어 나가십니다.
우리는 그의 통치를 기다리고 거기에 참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성령과 진리의 관계가 과연 옳으냐, 아니냐 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입니다.
그게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면 되고,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 모든 건 종말에 드러나겠지요.
오해가 없었으면 합니다.
기독교 교리에 대한 비판은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한
도저히 불가능하냐, 하는 게 아니랍니다.
기독교는 이런 신학적 논쟁을 통해서 발전해왔으니까
그걸 부정할 수는 없어요.
문제는 일단 지난 2천년 기독교가 무얼 말했는지는 알고 비판해야겠지요.
안티-기독교 유의 결정적인 한계가 바로 그겁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알지도 못하고, 알 생각도 없이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한국교회의 표면적 현상으로
기독교 자체를 부정하는 거지요.
(지금 정 목사님이 그렇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아시겠지요?)

다시 루터에게 돌아와서,
저는 루터를 일부러 옹호할 생각은 없어요.
물론 제 신앙의 스승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교부에 버금갈 정도로 위대한 사상가라는 점에서
제 팔이 안으로 구부러지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나쁜 걸 좋다고 미화할 생각은 없습니다.
농민전쟁에 관한 루터의 입장을 제가 지지한다는 겁니다.
루터에 의해서 10만 명 이상의 무고한 농민이 살해당했는데,
그런 거까지 지지하냐고, 물을지 모르겠군요.
오늘 우리는 교회사의 전문적인 부분을 끌어들여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합니다.
농민들의 행동이 점점 과격해지고
더 이상 사회질서를 지켜낼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을 때
신학자가 어떤 입장을 취해야하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한 두 마디로 판단할 수 없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농민들이 당한 피해에 대한 책임도 역시 그렇습니다.
루터의 논문이 군주들에 의해서 이용될 수도 있었겠지만,
루터의 그런 논문이 없었다면 군주들이 농민전쟁을 화해의 방식으로 해결했을까요?
저는 지금 이런 문제를 아주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위치가 아닙니다.
이건 훨씬 전문적인 교회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니까요.
이번 기회에 제가 시간이 나는 대로
농민전쟁을 중심으로 한 뮌처와 루터의 신학적 반응에 대해서
공부를 좀 해볼까 생각합니다.
기다려주세요.
여기서는 저의 글이 학문적인 게 아니라 단순히 에세이에 불과하니까
아무래도 오늘의 문제와 연결해서 루터의 입장을 유추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작년 10월인가, 어느 때에 기상에서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정치 설교, 가능한가, 이런 제목이었을 겁니다.
물론 저는 가능하지 않다는 입장이었지요.
방청객 중의 한 분이 저에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공개적으로요.
당신의 설교비평을 보고 좋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회색분자(?)라고 말입니다.
회색분자인지 반동분자인지는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제가 대형교회의 대중설교자들의 탈역사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설교에 대해서
비판하는 걸 보고 좋게 생각했다가 실망한 것 같습니다.
위의 다른 대글에도 쓴 거지만
FTA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가 분신하신
고 허세욱 씨가 계십니다.
그분의 일주기를 맞아
뉴스앤조이에 추모의 글을 올리신 목사님이 계시더군요.
제가 보더라도 허세욱 씨 사건은 남의 일 같지가 않습니다.
그가 오죽 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FTA를 막아내자고 외친다는 건,
역사발전을 혁명으로 이뤄낼 수 있다고 믿는 사회운동가로서는 가능하겠지만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에 우선권을 두는 신학자요, 목회자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통치는 역사 패배주의가 아니랍니다.
진리의 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승리는 이미 성취되었다는 믿음으로
이 세상의 악과 투쟁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목사님도 아시겠지만
하나님의 통치라는 표현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면 생명이 완성될 수 없다는 성서의 세계관입니다.
그 말은 곧 인간에게는 아무리 선의라고 하더라도
악한 힘들이 개입된다는 뜻도 포함됩니다.  
위에서 어떤 분이 루터가 말하는 악마가 무엇이냐, 하고 대글을 주셨는데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를 부정하고 자기 의를 부추기는 힘이 그것이겠지요.
이런 점에서 사회운동가들에게도 악마적인 요소가 개입할 개연성이 아주 큽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힘으로 역사변혁을 이뤄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으니까요.
기독교의 입장에서 양비론이 옳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결국 판단하고 선택해야하지만
인간의 교만에서 나오는 악한 힘은 늘 경계해야겠지요.
만약 FTA에 관한, 그리고 고 허세욱 씨에 관한 저의 입장을 두고
어떤 사람이 정용섭 목사는 역사 앞에서 책임의식도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한다면,
저 사람은 자기 말과 행동이 다르다 하고 비판한다면
저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루터의 말을 하면서 자꾸 저 개인의 문제를 예로 들어서요.
농민전쟁과 루터에 관해서 정확한 문헌적인 정보를 확보하지 못한 저로서는
이렇게 비유적으로 말씀드릴 수밖에 없군요.
제가 알고 있는 루터 사상을, 주로 <두왕국론>을 바탕에 깔고 드리는 말이니까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역사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지만
설교와 목회에서만은 그것을 뛰어넘는 케리그마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기상 4월호에 게재한 <신보신학, 비판적 성찰>이라는 졸고에서 밝혔듯이
기독교의 종말론은 극단적인 진보 사상이거든요.
이 종말론을 사회과학으로 덧칠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뮌처와 대립하는 루터의 입장을 왜 호의적으로 해석하는가, 하는 목사님의 질문이
위의 설명으로 해소되었을까요?
충분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면 생각의 차이만 불거졌는지도 모르지요.
제가 젊은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에서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 자체에 대한 공부를 더 하라는 것입니다.
그게 없으면 사이비 학자들과 운동가들에게 속기 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이비라는 말은 그렇게 선정적인 뜻이 아닙니다.
모양이 비슷하지만 실질이 아닌 거를 말하지요.
기독교 안에는 극단적 보수 쪽의 사이비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극단적 진보 쪽의 사이비도 있습니다.
다시, 사이비는 어중간 하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으로 치고 들어갈 능력이 없어서
한편으로는 교회 관리과 부흥에만 치우치든지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과학에 치우치고 맙니다.
제가 설교비평 작업에서 그걸 재차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수주의자 목사님들의 문제는 한 눈에 보이지만
진보 쪽의 문제는 숨겨 있는 것 같더군요.
아니, 양쪽 모두 숨겨 있는 건 매 한가지라고 해야겠군요.
보수 쪽은 신앙적 용어 속에 숨어 있고,
진보 쪽은 휴머니즘 속에 숨어 있습니다.
그래도 휴머니즘이 낫다고 볼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학의 입장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뭘 말하는 거냐,
알맹이가 뭐냐, 하고 질문할 분들이 있겠지요.
그래서 제가 젊은 설교자들에게
기독교에 대해서 공부하라고 충고합니다.
기독교는 도덕주의도 아니고,
휴머니즘도 아니고,
상담도 아니고,
사회 운동도 아닙니다.
그럼 뭘까요?
목사님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대한 보편적 해석학이라고 할 수 있어요.
위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많은 설명이 필요하니까,
여기서는 그만 두겠습니다.

루터의 말을 하다가 공연히 다른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이건 단순히 루터의 신학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조금 구질구질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그리고 두서가 없어 보이겠지만 나름으로 마음을 담고 썼습니다.  
좋은 주일 밤!

사족,
하비 콕스에 관한 저의 코멘트는
종교사회학자보다 신학자의 말에 더 큰 권위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중심을 이해하는 데는
일단 신학자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본질과 정체를 이해하는 데는
위의 까마귀 님이 인용한 바르트의 <복음주의신학 입문>이
콕스의 책보다 백배(?) 낫다는 뜻입니다.
독일의 루터 신학에서는 예수비평은 허용될지언정
루터비평은 안 된다는 까마귀 님의 코멘트가 재미있군요.
  

[레벨:1]정세웅

2008.04.24 09:09:57

제 이름이 제목이라 잠시 놀랐습니다.
제 댓글 질문도 지워버렸는데, 이렇게 길게 답변(?)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좀 더 본질적인 면을 이야기하시고자 하는데, 그 이야기는 길게 끌고가고 싶지 않군요.
단지 제가 단 댓글의 입장만 밝히려고 합니다.

제가 말한 핵심은 루터에 의한 뮌처가 아니냐 하는 것이었죠.
그 밑의 댓글에 루터의 신학의 깊이가 나와서 제가 제 댓글을 지워버렸구요.

제게 하신 말씀은 아니시겠지만,
음모설은 좀 황당합니다. 제 이름밑에 쓰신 것이라.
뮌처의 입장에서 보면, 그 당시 농민의 입장에서 보면 루터가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인가? 하는 것도
보아야 하지 않는가,가 제 입장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폄하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그가 초기의 입장을 바꿔, 뮌처와 극에 선 것은
종교개혁의 복잡한 이해관계,
다시 말하면, 그가 결국 독일의 왕과 제후의 지지가운데 있었다는,
반대로 농민들의 위치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는
그런 상황을 인정해야 하지 않는가를 이야기 한 것입니다.

그런면서에서 저는 루터에 의한 뮌처가 아니라,
뮌처에 의한 루터를 말하는 것도 진리를 찾는 바른 태도가 아닐까하는 것일뿐
기독교신앙에 대한 습관적 딴지를 걸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루터의 진심에 의혹을 거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많이 이야기해 왔으니까요.
하지만, 뮌처의 입장에서 보면 찾을 수 있는 다른 이해/시각도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일뿐.

남자의 진심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여자가 힘들다는데.
백인의 진심이 있으면 뭐합니까?
흑인이 힘들다는데.
뭐, 그런 입장입니다.



저도 사족하나,
목사님의 사족은 그게 그 말입니다.
저는 바르트와 콕스는 각자에게 주어진 길을 성실히 갔을 뿐이라 생각하기에
누구든지,
바르트를 통해 기독교의 진리를 만날 수도 있고,
콕스를 통해서도 저는 동일할 수 있다고 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4.24 15:06:16

정세웅 목사님,
꼭지글의 제목을 자연인 정세웅에게 보내는 걸로 달아서 미안합니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제가 다비안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이런 계기로 쓴 것 뿐이랍니다.
혹시 이름 오른 것이 불편하시면
제목을 바꿔볼테니
의견을 주세요.
요즘 뮌처와 루터에 관한 글을 짬짬이 읽었습니다.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것보다
그 두 사람 사이의 신학적 틈이 훨씬 크더군요.
서로 잡아먹을 듯이 싸웠어요.
일종의 이단논쟁인거지요.
인간은 어쩔 수 없나봅니다.
생각이 깊은 사람들도 작은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네요.
민노당에서 엔엘과 피디파가 결국 갈라진 것에서도 그걸 볼 수 있지요.
내가 보기에는 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루터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런 판단이야 시각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겠지만요.
루터도 농민전쟁 초기에는 농민들을 지지했더군요.
군주들에게 어떤 타협안을 내놓도록 권고하기도 했구요.
그런데 역사라는 게 그렇게 뜻대로만 굴러가는 게 아니지요.
농민전쟁이 이제 겉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빠져들어간 겁니다.
마치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일어난 볼쉐비키 혁명처럼이요.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하더라도 그걸 폭력적으로 달성하려고 할 때
신학자는 어떤 입장을 보여야 할지 그게 쉽지 않습니다.
루터는 마귀와의 투쟁이라는 기본적인 신학적 착상에 근거해서,
그리고 두왕국론이라는 인식에 근거해서
폭력으로 에스커레이트되고 있는 농민전쟁을 반대하게 된 거지요.
농민들의 폭력적 항거에 뮌처의 책임이 크다고 본 겁니다.
그래도 루터가 농민들을 잔악한 무리로 지칭하고
마귀를 대하듯이 제거하라고 부추긴 것은 잘못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 당시에 루터의 과민해진 어떤 심리적 상황이 영향을 미친게 아닐까 합니다.
이건 제가 잘 모르는 이야기니까 그만두겠어요.
뮌처도 처음부터 농민전쟁을 지지한 건 아닙니다.
그는 그것보다는 종교개혁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많은 종교개혁자들 중에서 뮌처는 좌파입니다.
극단주의자, 근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에 민중들은 군주의 신앙에 따라서 종교를 선택해야만 했는데요.
뮌처는 복음적 교회인 자기 교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는 군주들을 향해서
극단적으로 저항했습니다.
민중들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면
무력으로라도 그걸 해결해내겠다고 말입니다.
그런 움직임들이 실제로 많아졌지요.
결국 뮌처는 처음 종교개혁을 수행하던 곳에서 쫓겨나고
농민전쟁이 과격해지고 있는
남부독일, 소위 "쉬바르쯔 발트"(검은 숲) 지역으로 갑니다.
기기서 결국 본격적으로 농민전쟁에 개입하게 되지요.
거기에도 우여곡절은 많더군요.
뮌처는 어떤 분명한 신학적 좌표를 갖고 농민전쟁을 수행한 건 아닙니다.
역사의 흐름에 떠밀린 흔적이 많더군요.
그래도 결국에는 그의 신학이 거기에 작용했다고 봐야겠지요.
신학적으로 본다면 뮌처는 천년왕국주의자입니다.
묵시적인 세대주의자이기도 하구요.
그는 농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실제로 실현된다는 확신을 했습니다.
열광주의적 기질도 많이 나타납니다.
승산이 없는 마지막 전투에서도
농민들에게 자신들이 기드온과 같은 선택된 백성이니까
이 전쟁에서 분명히 승리한다고 부추겼습니다.
그는 여러 글에 자신이 엘리야이며, 세례 요한이라고 주장하더군요.
그런 확신이 아주 강했습니다.
그의 확신대로 농민전쟁에서 승리를 했다면
독일의 역사는, 유럽의 역사는 어떻게 발전했을까요?
러시아의 볼쉐비키 혁명이 대략 400년 이전에 성공한 것과 비슷하겠지요.
뮌처는 16세기의 레닌이 되었을지도 모르구요.
루터는 이런 열광적이고 폭력적인 혁명에 반대한 겁니다.
그가 군주들의 잘못을 모른 게 아니었어요.
그 당시의 혁명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한 거였구요.
프랑스혁명도 그 뒤로 거의 3백년 후에 일어났지요?
뮌처와 같은 혁명가들은 지난 인류 역사에 많았습니다.
일종의 열광주의적인 메시야니즘이지요.
예수 당시에도 적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갈릴리에서 그런 천년왕국 운동을 벌였습니다.
모든 혁명이 다 실패했습니다.
아직 카이로스가 온 게 아니었으니까요.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교회사 이야기를 떠들어댔군요.
이 글이 정세웅 목사님의 대글에 대한 반론은 전혀 아니랍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다비아 운동도 기본적으로
루터와 뮌처의 차이에서 어떤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네요.
다비아가 별개 아니지만
그래도 지난 날의 사건들을 통해서 앞으로의 길을 찾는다는 점에서 한 마디 한다면,
루터의 길이 옳을 것 같습니다.
사회 구조의 변화보다는 존재의 변화가 더 우선한다는 거지요.
한국교회의 구조 보다는 인식의 변화에 치중한다는 말이지요.
이런 점에서 다비아는 신학운동입니다.
벌써 목요일입니다.
참 시간이 빠르군요.
주일 준비 잘 하시고,
건강하세요.
정용섭.

[레벨:1]정세웅

2008.04.24 16:20:43

긴 글로 진지하게 생각을 풀어주시는 것 항상 존경합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생각에는 다 동의할 수 없겠네요.

한 가지만,
존재의 변화냐 구조의 변화냐라는 말이 제게 거시기하게 들립니다.
그게 그렇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지,
어떤 이/들의 운동을 그렇게 구분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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