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길, 또는 지평?

조회 수 4952 추천 수 32 2008.05.02 18:33:04
사유의 길, 또는 지평?

신학의 자리인 하나님의 존재, 또는 그의 계시와 인간 인식의 변증법적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그 작용의 힘은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힘을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대답은 그렇게 명확하게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바로 하나님의 존재론이기 때문에 성령이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는 도구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주체로, 인간을 객체로 설정하고, 또는 그 반대로 설정한 채 그 사이에 성령이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결국 주객도식(Subjekt-Objekt-Schema)에 머물러 있는 입장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물을 객체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주체와 객체를 엄밀하게 대치시킴으로써 객체의 확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근대이후에는 더 이상 이런 주객도식의 구도는 설득력을 잃었다. 더구나 이런 사물의 구도를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는 하나님의 존재를 언급해야 하는 신학에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객체가 아니고 단지 인간의 주관적 의식 안에서만 작용할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말인가? 이런 식의 실존주의적 하나님 이해는 하나님을 인간학으로 끌어내릴 개연성이 있기 때문에 주객도식보다 훨씬 문제가 많을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신론과 계시론에 연관된 많은 문제들을 더 이상 다룰 수 없다. 다만 우리의 주관과 객관 의식이나 그런 개념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하나님이 신학의 주제이기는 하지만 결국 인간이 그 하나님을 어떻게 인식해낼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여전히 신학의 중심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인식 작용은 곧 인간의 사유능력에 달려 있다. 그 사유 능력이 도대체 얼마나 확실한가 하는 점은 또 다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이런 인간의 사유 활동이 없다면 신학은 무의미하다. 사람에 따라서 신학은 인간의 이성 작용이라 할 사유보다는 성서가 강조하고 있는 ‘믿음’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철학은 당연히 이성의 사유에 의존하지만 신학은 인간의 영적인 활동이라 할 신앙이라고 말이다. 교리사적인 점에서 볼 때 이성과 믿음의 관계는 교부 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 제기된 문제이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최소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믿음의 역할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람도 없으며, 그렇다고 이성의 활동을 근본적으로 부정할 사람은 없다. 일단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될 것 같다. 기독교의 복음이 믿을 만하다는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서 우리 신학자들은 이성적으로 사유해야만 한다. 다른 논리는 접어두고 이성적 존재인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면 ‘호모 사피엔스’인 인간의 사유활동을 부정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인간의 사유 능력이 곧 인간적 특징을 드러낸다는 말은 일단 옳다고 보아야 한다. 여기서 ‘일단’이라는 단서를 붙이는 이유는 고고학적으로 ‘호모 사피엔스’보다는 ‘호모 에렉투스’가 인간 종의 특성에서 우선적이기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첫 특성이 뇌의 발달로 인한 사유능력에 있는 것 같지만 이 뇌의 발달 자체가 직립 보행의 결과로 얻어졌다고 주장하는 고고학자들이 있다. 그들이 말하는 호모 에렉투스는 2백만년 전 인간과 침팬지의 공동 조상으로부터 최초로 분리되어 ‘직립 보행’을 성취한 인류 조상을 일컫는 용어이다. 침팬지와 인간의 공동조상이 살던 아프리카의 지리적 변화로 인해 초원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에 직립으로 보행하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서 뇌의 양적 성장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보행에서 자유롭게 된 팔과 손이 도구를 생산해낼 수 있을 정도의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또한 직립으로 인해서 성대가 발달했다는 것도 역시 인간의 언어발달에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런 고고학적 해명에 따라서 인간의 사유 능력이 추후적인 특성이라는 점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사유의 능력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인간 특성임에 틀림없다. 현재 인간은 이 사유의 능력을 통해서 인간 이외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그 존재를 가능하게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단지 눈앞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객관적 인식, 또는 그것에 대한 가치판단에 머무는 인간의 심리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cogito, ergo sum>이라는 명제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존재론적 깊이를 담지하고 있는 영적인 힘이다. 그래서 사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경험의 범주만이 아니라 선험적인(apriori) 세계까지 들어갈 수 있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한다. 그런 사유의 특성을 가리켜 ‘사유의 길’, 또는 ‘사유의 지평’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사유는 길을 간다. 사유는 지평을 연다. 인간은 사유를 통해서 진리의 길을 가며, 진리의 지평으로 개입한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사유는 인간이 가야 할 길로 우리에게 계시되며, 이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새로운 세계와 그 지평에 도달하게 한다. ‘사유의 길’을 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길’이라는 메타포이다. (강의안 <신학입문> 중에서)

하늘과 땅

2008.05.24 03:39:43

기본적으로 한국적 목회와 신학에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의 필요성에 동의하며

94, 95, 97을 읽고 가지는 두 가지 질문
“예수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통치에 대한 '보편적 해석학'...”
정세웅 목사님! 목사님의 리플중
“더 중요한 건 그런 구체적인 역사도 역시 전체 '보편적인 역사' 안에서 해석되어야...”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리플중

첫 번째 질문
“보편적 해석학”, “보편적인 역사” 참 대단한 용기시다 이런 생각이 드는 군요(농담 아닙니다. 보통 다른 사람들이 이렇게 표현하면 제가 웃어넘겼겠지만, 목사님이 사용하시니 제가 궁금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 표현에 대한 합의가 어떻게 가능한 건지? 합의가 안된다면 어떻게 '보편'이 될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두 번째 질문
목사님이 흔히 비평하시는 ‘지나친 용기와 확신’ 가운데 나오는 ‘선동’ 이거 제가 공부한 교회사에 의하면 ‘보편’의 단어에 대한 애착에서 원초적으로 파생된 것 아닌지요? 제가 볼때, 정서적으로, 열광적으로 선동하는 사람도 부담스럽긴 하지만 하지만, 확고한 논리적 근거와 신학 또는 철학 가운데 차분하게 움직이는 파시즘이 훨씬 더 무섭던데요. 바늘도 안들어 가더라구요. ‘열정’에 철학적, 신학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더 부담스럽지 않으십니까? 이 ‘보편’ 개념 때문에 결국 목사님 스스로도 ‘정통’(기독교의 근본, 정통: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리플 중)이라는 단어를 목사님의 해석학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 아닌지요? 결국 '보편'의 개념을 가진 사람이 가지는 자기 확신은 '정통'아닙니까? 그 다음으로 오는 건, '분열' 또는 '비판' 일꺼구요.

글을 쓰다보니 과연 Russian orthodox('정통') Church 도 인간의 존재론적 깊이가 cogito ergo sum의 사유에 있다고 생각할지? 궁금해졌습니다.짧은 지식입니다만 그 orthodoxes 들이 생각할 때는 인간의 존재론적 깊이가 '마음'에 있는 것 같더라구요. 물론 그 '마음'의 단어에 '사유'의 개념이 빠져있는 건 아닙니다만(훨씬 총체적, 통전적 개념의 '마음'이더군요).
‘보편’이라는 개념과 ‘선동’에 대한 목사님의 ‘비평’이 목사님의 사유의 세계에선 어떻게 변증법적으로 작용하는지 궁금하군요? ‘선동’ 하시는 대부분 목사님들도 자기 나름대로는 ‘보편적 해석학’과 ‘보편적 역사관’을 가지고 자신들이 ‘정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제게는 이 '보편'이 참 오리무중이고, 때로 불편해 보입니다.

Cogito ergo sum의 철학적 사유(합리적 사고)그 깊은 기원엔 결국 헬라 철학이 숨쉬고,
아퀴나스의 신학안에 숨쉬고, 근대 철학 안에 자리잡고, 계몽주의 때부터 근대 신학 안에 꽃이 피어...왔는데, 결국 서구 문명의 핵심 안에 있는 것이 '헬라 철학' 아닌지요?
그러니 결국 소위 서방 기독교의 '정통'이란 것이 헬라 철학으로 해석하고 말한 '기독교' 아닌가요?

무엇이 '정통' 일지?

헬라 철학에 의해 채색된 기독교를 혹시 보편적 '정통' 이라고
제한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 궁금하군요? 참고로 저는 서방 기독교의 몫을 '폄하'하지는 않습니다.
단지 서방 기독교를 '보편적' 정통으로 보는 시선, 그 시선 중심으로 기독교를 봐야 제대로 보인다는 생각에 '딴지'를 거는 것 뿐입니다.

저는 하나님을 객체(Object)로 보는 시선 안에서 '헬라적' 분위기를
하나님을 주체(Thou)로 보는 실존주의적 해석 안에서 오히려 '히브리적' 분위기, 성서적 분위기를 더 친근하게느낍니다.

'차이'보다 많은 '같음'을 발견하는 가운데 몇자 적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5.24 10:22:38

하늘과땅 님,
신학을 하신 분 같습니다.
저의 글을 꼼꼼하게 읽어주신 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위의 글은 그렇게 체계가 있는 게 아닌데요.
신학교 저학년들에게
신학의 맛을 보여주기 위한 '입문'에 나오는 단편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비약도 있구요.
오해의 소지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모든 글에 대한 책임이 저에게 있으니,
그리고 하늘과땅 님이 다른 저의 글도 참조하셨으니,
일단 질문에 대답을 드려야겠습니다.

1. 보편적 해석학
제가 사용하는 보편적(universal)이라는 단어의 개념은
도그마가 아니랍니다.
우주론적, 일반적, 상식적이라는 뜻이에요.
다비아 정신과 연결시켜서 말하면
인문학적이라는 뜻이에요.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전체의 지평을 가리킨답니다.
님이 오해하는 것은
제가 사용하는 보편이 절대불편의 어떤 원칙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게 절대 아니랍니다.
기독교의 종말론적 지평이 바로 보편적인 것이랍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는 거니까요.
여기서 보편은 이미 결정된 어떤 실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에요.
굳이 다른 철학자들의 개념과 연결한다면,
화이트해드의 과정이나
하이덱거의 존재나
노자와 장자의 도와 같은 거랍니다.
님이 합의 운운했는데요,
그건 합의할 필요가 없는 거랍니다.
합의 될 수도 없구요.
스스로 계시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합의가 가능하겠어요?
만약 내가 사용한 '보편' 개념이 위의 사실과 다른 구절이 있다면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기를 바랍니다.

2. 정통
저는 결코 정통과 비전통을 대립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았어요.
정통이 오점 하나 없는 완벽한 진리라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상처를 안고 있으면서 비틀거리면 거쳐온
기독교 신학의 역사적 흐름이 있는데요,
그런 큰 흐름을 저는 정통, 또는 전통이라고 부르는 거랍니다.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와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에도
그런 물줄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가 도대체 지난 2천년의 역사에서 무엇을
신학적 화두로 삼았느냐, 하는 걸 들여다 보자는 거지요.
그것이 옳으냐, 아니냐는 둘째 문제입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는
실증적 증거를 제시할 수도 없구요.
다만 우리는 그런 전통, 또는 정통을 선택한 거니까
거기에 천착하자는 거지요.
그런 전통, 또는 정통을 알지 못한채
다른 것을 기웃거린다는 것은
심하게 말해서 외도라는 거지요.

3. 코기토 에르고 숨
위에서 님이 러시아 정교회와 데카르트의 명제를 연결시켜서 설명한 이유를
저는 잘 모르겠군요.
사유만이 아니라 감정, 느낌도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의 생각을 잘 모르고 하신 말씀이군요.
데카르트의 사유하는 주체를 저는 별로 신봉하지 않는답니다.
주객도식이 어떤 위험성이 있는지도 알구요.
다만 위의 글에서는 신학적 사유의 중요성만을 제기한 거랍니다.
그 사유는 이성의 활동이고,
그것은 또한 계시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구요.
더 나아가서 그 사유의 주체가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의존해야되구요.
님이 마지막에 쓴 대목을 보세요.
<저는 하나님을 객체(Object)로 보는 시선 안에서 '헬라적' 분위기를
하나님을 주체(Thou)로 보는 실존주의적 해석 안에서
오히려 '히브리적' 분위기, 성서적 분위기를 더 친근하게느낍니다.>
실존주의가 하나님을 주체로 본다는 주장은 혹시 착각하신 말씀 아닌가요?
실존주의는 사유하는 인간을 주체로 보고
신을 객체로 본답니다.
아니 객체 자체가 별 의미가 없는 거겠지요.
님도 잘 알다시피
실존주의 신학의 대표자인 불트만에게는
하나님 나라, 또는 부활, 계시 등의 객관적 역사는 무의미하고
'지금 여기서'그것과 만나서 결단하는 인간만이 중요하지요.

차이보다 같음을 많이 발견하신다는 덕담을
다시 저도 하늘과땅 님에게 드립니다.
좋은 주말.

하늘과 땅

2008.05.24 14:13:45

우선 사과의 말씀 드립니다.
목사님의 글, 많은 부분을 읽다보면, 다 접하게 될 내용들인데

저의 '게으럼'으로, 미리 사용하시는 용어들의 의미를 알고자 하다보니 글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해석학', '정통' 이런 단어들을 목사님이 그렇게 사용하신다면
설명없이 언제든 오해를 불러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존주의 신학적 모델에 관하여

실존주의 또는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스펙트럼이 워낙 다양하다보니 목사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도 무방하시겠습니다만, 제가 읽기로는 인간만을 '주체'로 보는 듯 하지는 않습니다.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 다르겠습니다만,
'삶'과 '신학'을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다 담아 넣을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 시키는 것에 대한 항의, 과학적 인본주의에 대한 반동이 그 운동이다 보니 그들의 해석의 언어는 다분히 '인격적', '경험적' 친향성이 있는데, 그런 언어들의 표현 속에서 히브리적, 성서적 분위기를 더 친근하게 느낀다는 뜻입니다.
이런 넓은 경향 속에서는 "'지금 여기서' '그것'과 만나서 결단하는 인간"이 중요하긴 하지만 "인간만이" 중요하진 않고, 신이 해석의 '대상' 이나 '그것' 으로 머물지 않고 의미있는 관계가 되기 위하여 또 하나의 주체(Thou) 로 인식되는데, 그런 의미에서 이성주의나 인본주의 보다는 성서적이라는 의견이었습니다.


러시아 정교와 데카르트의 명제를 연결 시킨 것에 대하여

첫번째 이유
'정통', '보편'의 이런 언어를 사용하시길래
언어적 유희(Word play)로
스스로 '정통'이라부르는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신학과 신앙함에 있어서 목사님이 강조하시는 이성의 중요성에 동의할까... 써본 겁니다. 물론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 한국적 상황에서 Faith seeking understanding의 필요성에서는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 입니다. "하지만 더 넓은 스펙트럼이 필요하다." 이게 제 의도입니다.

두번째 이유
목사님의 논의에서 "전통 또는 정통"의 범위가
러시아 정교, 사막의 교부(목사님의 어떤 글에서 사막의 교부에 대해 폄하하는 글을 본적이 있음), Celtic, 캐톨릭, 앵글리칸 이런 쪽들의 견해는 소외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썼습니다(물론 저는 목사님의 이름과 글을 안지 몇 개월 안되서 아직 잘 모르고, 글 읽는 우선 순위에서는 아직 밀리다보니 시간이 좀 지나야 목사님의 '폭'을 알수 있겠습니다만). 단순히 '감정', '느낌'도 종교의 본질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쓴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 정교에서 '마음'은 '감정'과 '느낌'을 훨씬 넘어 '통전적 인간성'의 개념을 표현합니다.

여튼 '다름'을 먼저 찾고, 강조했던 한국 신학과 목회 현장에서 마음이 상할때로 상해
비참하고 처절한 심정으로
'같음'에 대해, 같을 수 있음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서

목사님의 글쓰기와 신학함이
한국 개신교의 치부와 부조리, 무엇보다 '몰상식'에 대해
정신번쩍 들게 하는 가을날의 서릿발 같은 귀한 역할 하셨음에 대해
갈채를 보내드립니다만

부디 목사님의 활동이 또 다른 '다름'의 한축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지평'을 좀 더 넓혀 주십사하는 마음으로 몇자 남겼습니다.

저는 '성경' 텍스트 말고는
'신학'을 제대로 한 것이 없는, 그저 지난 10년 동안 교회 덩치 부풀리는 일에 노력동원되었다가
잠시 쉬고 있는(부목사 안식년 안주니 스스로라도 챙겨야지요 자비를 들여서라도 말이죠), 심각하게 보수적인 교단에 속해있는 한 목사입니다.

그저 자신의 당대에 다 해먹고 거덜나는 기독교 말고(프로그램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독교)
50년 ~ 100년 미래를 내다보며, 미래에도 한국 기독교가 겸손하고도 귀하게
쓰임받는 그런 '바램'으로 고민하고 있는 목삽니다.

가끔 '몰상식' 한 답변에 마음 고생 많으시겠습니다만
다비아의 운동이 마침내 '값'을 하기 위해선
'같음'에 대해 더 '천착'하고 더 넓게 귀기울여야 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것으로 다비아에서의 제 역할은 이제 끝난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모쪼록 건승하시고, 더 아름다운 사역되시길 기도합니다. 목사님의 용기과 '투혼' 에 박수를 보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5.24 16:27:41

하늘과땅 님,
한 가지 사실관계만 지적해도 되겠지요?
저는 사막의 교부를 추켜세우면 세웠지 폄훼한 적이 없답니다.
러시아 정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요.
연동교회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비평하는 글에서
오늘 우리 설교자들에게 필요한 영성이야말로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나와야하지 않느냐, 하는 논지로 글을 썼는데요.
사과하지 않으셔도
이미 그 생각이 전달되었으니,
안심하세요.
감사.

하늘과 땅

2008.05.25 00:17:21

"흡사 사막의 수도승들처럼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 신앙은 아니다. 영적인 게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지만, 일단 이 세상과 저 세상, 즉 차안과 피안을 이원론적으로 차단시키는 것은 바람직한 신학적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오늘의 신학과 실용주의-

사막의 수도승들과 사막의 교부들이 다른 모양이죠? 제가 또 오해했나 보군요?
여튼 님의 글을 충분히 읽지 못한 저의 불찰이라 여기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5.25 23:18:51

아이쿠,
내가 너무 단정적으로 말했군요.
사막의 수도승을 폄훼하지 않았다는 진술 말입니다.
하늘과땅 님이 꼭 집어내셨군요.
감사 합니다.
그런데요.
위에서 인용하신 그 대목은요,
사막의 수도승들을 폄훼한다기보다는
성속 이원론의 위험성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쉽게 머리에 떠올리는 사막의 교부(수도승)들을 인용한 것뿐이랍니다.
그들의 영성이 탈속적이라는 것만은 분명하겠지요.
이런 대목이 대화의 어려움이군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중심 주제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약간의 비약을 무릎쓰고 인용한 것뿐인데,
자칫하면 폄훼한 걸로 전달될 수도 있군요.
그런 걸 감안하고 글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한 주간을 보내세요.

하늘과 땅

2008.05.26 03:56:56

제가 읽은 사막의 교부들은 '탈속적'인 사람들 이었긴 하지만, 갈수록 기독교가 '제국'의 기독교로서 권력과 재력, 세상의 영화를 누리는 타락으로부터의 '탈속'이지 '성속 이원론'자들로서의 '탈속'은 아니라고 봅니다.

사막의 수도승들을 "이 세상의 삶에 대해 전혀 관심없이 단지 영적인 세계만을 추구하는" 문맥에 사용하시려면 엄청난 학문적 위험과 용기를 감수하셔야 될것 같군요. 이 표현을 단정적으로 하지 않고, 부드럽게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세상 한 복판에 살았던 당대의 종교 권력자들보다, 훨씬 더 치열한 방식으로 세상 한 복판(다른 방식으로)에 살며, 황제의 기독교, 제국의 기독교에 영향을 미쳤던 사막의 교부들이 '성속 이원론'의 예시로 사용되다니요!

사막의 교부들이 사막 한 가운데서 얼마나 치열하게 당대의 기독교에 영향을 주며 소통하고 살았는지? (은둔하면 할수록, 더욱 세상 문제들의 한 가운데로 초청받는 성 안토니,.... )사막이라는 물리적 제한의 영역에 살았지만, '성속 이원론'의 혐의를 그들에게 붙이는 건 문제가 있지 않나 합니다.

바쁘시겠습니다만,
언제 시간 되시면 Thomas Merton이 쓴 “The wisdom of the Desert” 의 서론과 Athanasius가 쓴 “The Life of Antony”Robert Gregg(trans)의 일독을 권합니다(보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짧게 토마스 머튼을 제가 정리해서 인용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Why did they leave this world? Why did they go to the desert?
They left and went for seeking salvation. Then, what does the salvation mean to them?

First, "They didn't want to let themselves be passively guided and ruled by a decadent state and
didn't want to submit slavish dependence on accepted, conventional values. They, most of all,
wanted to find the true self rejecting the false self fabricated by social compulsions in the world."

Second, "They sought a way to God that was uncharted and freely chosen, not inherited from
others who had mapped it out beforehand. They sought a God whom they alone could find,
not one who was given. " ----- Tomas merton -----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5.26 22:36:00

하늘과땅 님은 사막의 교부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아시는군요.
저는 잘 모른답니다.
그래서 그들을 론한 나의 글이 님에게 서툴게 보이는가 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들의 영성에 대해서
좋은 글 좀 올려주세요.
토마스 머튼과 헨리 나우엔 같은 영성가들을 저도 좋아한답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많은 걸 배웠구요.
그러니 내가 사막의 교부들을 폄하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인정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님이 인용한 저의 꼭지글(오늘의 신학과 실용주의)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정말 지나가면서 한 마디 한 거지.
폄훼하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하더군요.
나는 그들의 영성에 까지 들어가는 말을 한 게 아니라
그들이 보여준 삶의 형태를 예로 들은 것뿐이랍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독거생활, 고행 같은 것이
유럽의 수도원 제도를 가능하게 한 원천이잖아요.
그 교부들과 수도원 영성은 서로 통하는 거지요.
그들은 분명히 탈속적이었지요.
세례 요한처럼 광야로 나간 거지요.
분명히 세속과 구분된 삶을 산 거에요.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 수가 없는 거구요.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되구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막의 교부들과 엣세나 파들과도 소통될 것 같습니다.
물론 교부들은 주로 독거인 반면에
엣세나 파는 공동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세속과 구분된 삶에 집중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겠지요.
하나님에게만 집중하기 위해서
세속의 모든 것들 포기한 사람들이라는 거겠지요.
불교의 예를 들면 성철 스님 같은 삶의 태도가 아니었을니지요.
독거의 삶에서 돈오에 이르는 길 말입니다.
귀하고 필요한 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광야의 세례요한과 달리
구정물이 많은 저자 거리에서 활동하셨어요.
저는 비록 부패하고 욕망이 득실거리지만
바로 그런 세속적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답니다.
신자유주의에 물들어가고 있지만
이런 시장의 한 복판에서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점에서 볼 때 광야로의 탈출이
오늘 이 시대에 현실성 있는 기독교 영성의 유일한 길이냐에 대해서는
약간 회의적으로 생각합니다.
쓸데없는 말이 많았군요.
다시
사막의 교부들이 성속 이원론에 빠진 것처럼 내가 말한 적이 있다면
그건 제 표현의 착오라는 것만 알아주세요.
덕분에 오늘 저녁에는
사막의 교부들이 저에게 말을 거는 듯해서
기분이 좋습니다.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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