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신학은 대화를 포기하는가?

조회 수 5183 추천 수 28 2008.05.27 22:30:20
민중신학은 대화를 포기하는가?

구로감리교회 조수현 목사님(이하 ‘조 목사’)은 필자가 <기독교사상> 4월호에 게재한 졸고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 -민중신학을 중심으로-”에 대한 반론을 5월호에 “신학은 민중신학이다 -정용섭 박사의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읽고서-”라는 제목으로 올리셨다. 조 목사는 민중신학에 대한 비판이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이런 비판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점을 세 가지로 지적했다. 크게 보면 두 가지이다. 하나는 민중신학에 대한 오해이며, 다른 하나는 그런 오해를 불러온 서구신학의 한계이다. 전자를 다시 세분하면 민중에 대한 오해와 민중 메시아성에 대한 오해이다.
조 목사의 글을 읽고 필자는 한편으로 조금 부끄럽고, 다른 한편으로 당혹스럽다. 민중신학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한 채 비판적 성찰이라는 글을 썼으니, 왜 부끄럽지 않겠는가. 조 목사의 글을 통해서 민중신학의 근본 토대를 조금 더 잘 알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글에서 오해가 풀렸다기보다는 대화가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왜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이런 말이 성립되는지 모르겠으나 조 목사에 의해서 해명된 민중신학은 부정의 신학에, 또는 방어의 신학에 가깝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게 보인다. 첫째, 조 목사의 설명에서 민중신학 이외에는 모든 신학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해방신학은 물론이고, 한국의 여러 토착화 신학마저 시대적 적합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있다. 둘째, 조 목사에 의해서 제시된 민중신학의 신학 방법론은 대화가 아니라 독단적 선포에 기울어진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필자의 오해였기를 바란다. 그래도 필자가 왜 그렇게 오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변명이라도 해야겠다.
조 목사의 글을 접하면서 가장 강렬하게 다가온 인상은 그가(또는 민중신학이) 서구신학을 극도로 불신한다는 사실이었다. 그건 그럴 수 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거야 누가 뭐라 하겠는가. 다만 그에 상응하는 논리가 제시되어야 하는데, 필자는 그의 글에서 그런 논리를 별로 발견할 수 없었다. 그는 툭 하면 당신은 서구신학에 경도되었다고 추궁한다. 조 목사의 그런 추궁을 듣고 있노라면 필자가 마치 신학적 사대주의에 묶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으로 주눅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조 목사가 서구신학의 사유방식을 거부하면서 본인이 바로 그 방식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민중신학에 대한 오해가 정통신학의 절대화에 연유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그는 갑자기 중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보편 논쟁을 거론했다. 참으로 뜬금없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민중신학이 정통신학과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게 아니라 ‘민중’보다는 ‘신학’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한 것뿐인데, 조 목사는 그 부분에서 조금 ‘오버’하신 것 같다. 그건 그렇다 하고, 사유의 ‘주체성’을 도에 넘칠 정도로 강조하는 분이 정통신학이 없다는 사실을 보편 논쟁에 기대서 제시하다니, 이건 바로 자기 부정이 아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그런 논리 자체가 엄청난 비약이다.
필자가 알기로 중세기 보편 논쟁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입장으로 전개되었다. 실제 안의 보편(universalia in re), 실제 앞의 보편(universalia ante rem), 실제 뒤의 보편(universalia post rem).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의 특성인 에이도스(eidos)를 질료와 묶여 있으면서 사물의 실체를 구성하는 형상으로 간주했다. 앞의 유형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된다. 이에 반해 플라톤은 에이도스를 세계를 초월하는 이데아라고 보았다. 그의 입장은 물론 두 번째 유형이다. 마지막이 소위 유명론인데, 이에 따르면 보편은 세상의 사물과 아무런 상관없이 사람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에 불과하다. 여기서 필자도 잘 알지 못하는 보편논쟁을 더 이상 상론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가지만 분명히 하자면, 기독교의 신론과 인간론에 각각 큰 영향을 끼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보편개념은 결코 간과될 수 없다. 그들 헬라철학자들을 거론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을 세계 창조자이며, 완성자로 믿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유명론자가 될 수 없다. 그런데 조 목사는 유명론에 기대서 보편 인간이 없으며, 보편 신학도 없고, 따라서 정통 신학도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라면 하나님의 존재론적 근거는 타파될 것이며, 따라서 경륜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의 변증법적 긴장관계를 놓치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조 목사는 이런 필자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지 모르겠다. 당신의 그런 논리는 전형적인 서구신학이라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필자는 조 목사가 보편논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독자들 중에서 중세철학을 전공하신 분이 계시다면 필자에게 도움을 주시기 바란다. 이 기회에 정확히 배워야겠다.
글머리부터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시간을 끈 이유는 가장 실증적이어야 할 민중신학이 별로 학문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일관적이지도 못하다는 사실을 조 목사의 글에서 확인했기 때문이다. 오해는 마시라. 필자는 지금 민중신학 자체가 아니라 조 목사에 의해서 언급된 바로 그 민중신학을 거론하는 중이다. 필자의 글에 간혹 민중신학을 폄훼하는 듯한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일단 조 목사의 글에 한정된다는 점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다시 위의 글로 돌아가서, 이것은 단지 학문적 엄밀성의 결여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어떤 피치 못할 속사정이 여기에 개입되어 있는 게 아닐는지. 그것은 필자가 앞서의 글에서 제기한 민중신학의 관념성으로 돌아간다. 이런 관념성, 추상성이 개인의 감수성 및 교조성과 결합되면 종종 선정성으로 나타난다. 조 목사는 민중신학이 한국적 정황에서 배태된 여타 신학 중에서 독보적이라는 점을 변호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투쟁하던 사람들은 거의 다 감옥에 갔다. 우리가 지금 누리는 자유는 그때 그 사람들의 희생덕분이다. 서남동과 안병무도 감옥에 갔다. 그들은 거기서 민중을 만난 것이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서 투쟁하다가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났다. ‘조국근대화’의 희생양이 되어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살인적 저임금에 시달리다가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삶을 누려보고 싶다고 외치다가 감옥에 온 사람들을 만났다. 고달픈 하루를 막걸리 한 사발로 달래며 푸념을 늘어놓다가 ‘막걸리반공법’에 걸려 감옥에 온 사람도 만났다. 심지어 형사들의 범인검거실적을 위하여 속칭 ‘후리가리’로 붙잡혀 들어온 엿장수, 고물장수, 양아치들도 만났다. 서남동과 안병무는 감옥에서 이들을 만나면서 그리스도교의 구원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를 다시 묻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진술이 필자에게는 선정적으로 들린다. “나는 예수님을 영접한 뒤로 완전히 변했습니다.” 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복음주의 대중 설교자들의 그것과 닮아 보이기에 하는 말이다. 잘못 보았다면 용서를 바란다. 어쨌든지 위와 같은 민중경험만이 신학의 전거이고, 따라서 “서구신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는 논리는 아무리 신학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차원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단순하다. 청량리 홍등가의 실체를 이미 오래 전에 경험한 소위 ‘밥 퍼 주는 목사’는 그 일에 자신의 모든 삶을 투신하고 있다. 장기(臟器) 기증 운동을 하는 목사도 있고, 호스피스 운동을 하는 목사도 있다. 모두 귀한 활동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휴머니즘 운동에 민중신학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군사독재와의 투쟁만이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다는 말인지 잘 모르겠다. 만약 그런 각각의 경험에 이름을 붙여야 한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되겠는지 생각해보라. 며느리 신학, 외국 노동자 신학, 동성애 신학, 채식주의 신학 등등, 모든 게 이름 붙이기에 달렸다. 이것이 바로 조 목사의 인식론적 토대인 유명론의 실체란 말인지.
위에서 조 목사가 거론한 군사독재와 감옥의 경험은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악한 질서의 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했으며, 지금도 그 창조를 유지하고, 종말에 완성한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악한 질서와 투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세상을 바르게 직면하고 있는 보수 인사들도 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나름으로 그런 일에 참여하고 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조 목사는 군사독재와 감옥에서 일어난 민중경험만을 신학의 독단적 근거로 주장하는지, 잘 모르겠다.
앞에서 말한 대로 조 목사는 필자가 민중신학을 오해하고 있다 지적하면서 계몽시킬 작정으로 많은 말씀을 주셨는데, 그게 필자의 손에 전혀 잡히지 않는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첫째, 필자에게 난독증이 있다. 둘째, 조 목사가 설명하는 민중신학에는 민중의 실체가 없다.

민중은 살아있는 실체?
이제 구체적으로 민중에 관한 논의로 들어가자. 조 목사의 설명에 따르면 민중신학은 “민중이 누구냐?” 하고 묻지 않고 “누가 민중이냐?” 하고 묻는다고 한다. 기존의 신학이 안고 있는 관념성을 철저하게 극복하겠다는 민중신학이 이런 언어유희로 민중개념에 대한 질문을 회피한다는 것은 해석학적 토대가 극히 부실하다는 방증이다. 민중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이기에 “민중 신학자들은 민중에 대한 개념규정을 하지 않기로 하였다.”고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여성신학이 억압받는 여성에 대한 개념규정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똑같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민중’신학이라는 용어를 굳이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는 “민중에 대한 윤곽을 어느 정도 잡아야 할 것 아니냐는 요구에” 대답하겠다고 한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개념규정과 윤곽을 잡는다는 건 똑같은 말 아닌가. 여기에도 동일한 언어유희가 작동되고 있다. 민중신학이 이런 말장난으로 신학적 무게를 회피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하다. 신학의 역사를 정확히 직시하시라.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정통신학도, 아니 서구신학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통치에 관해서 윤곽을 잡을 뿐이다. 도대체 조 목사가 말하는 민중신학의 신학방법론과 정통신학의 그것이 뭐가 다른가?
조 목사는 서남동과 안병무를 이런 윤곽잡기의 대표적 신학자로 제시하고 있다. 서남동에 따르면 민중은 백성, 시민, 프롤레타리아, 대중과 구별되는데, 핵심적으로 시민대중이라고 한다. 특히 지식인은 민중이 될 수 없다고 단정한다. 그렇다면 민중 ‘신학자’라는 말이 근본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게 아닐는지. 서남동과 안병무의 언어는 모두 지식인의 그것이니 말이다. 조 목사는 왜 자기 행위 자체를 부정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안병무가 민중개념으로 제시한 오클로스에는 경제적 약자만이 아니라 민족감정에서 소외된 세리 같은 사람도 포함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한국의 친일명단에 오른 사람들도 역시 민중이라는 논리가 성립될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이제야 민중이 “살아있는 실체”라는 조 목사의 말에 이해가 간다. 민중은 어떤 계급이 아니라 늘 살아서 움직이기 때문에 매국노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그가 누구든지 현재 소외당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모조리 민중이다. 군사독재로 떵떵거리다가 민중들에 의해서 밀려나 초라하게 망명생활을 하는 이들도 역시 “살아있는 실체”로서 민중이 될 수 있다. 현재 억압당하는 민중만이 민중이 아니라 현재 민중을 억압하는 사람도 역시 민중이 될 가능성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민중이다. 지금 필자가 냉소적 태도를 취하는 이유는 군사독재, 감옥 운운 하는 목소리만 높았지 그 논리가 너무 부실하다는 사실 앞에서, 비교적 민중신학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화가 났기 때문이다. 신학은 설교가 아니지 않은가. 그의 논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자. 논리 이전에 터미놀로지(terminology)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네 대목으로 구분하겠다.
첫째, 조 목사는 민중이 역사의 주체라는 사실을 설명하면서 서구신학의 ‘주객도식’의 문제를 반복적으로 지적했다. 민중을 객체로 대하는 서구신학은 기본적으로 민중개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체와 대상을 엄격히 나누어 보는 시각은 서양의 사고방식이다. 민중신학은 주객도식을 싫어한다.” 개념규정을 터부시하는 조 목사가 왜 서구신학을 이렇게 일방적으로 개념화하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주객도식의 극복, 또는 해체를 말하는 사람이 “우리가 주체성 없이 서구신학을 정통으로 알고 .... 이제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우리의 것”과 서구의 것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바로 주객도식이다. 유럽 사상사에서 데카르트의 “코기토 에르고 숨” 이후로 경험론과 합리론을 거치면서, 일종의 주관적 인식론이라 할 주객도식이 일정하게 작동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마치 서구신학이 바로 주객도식에서 헤어나지 못한 것처럼 주장한다는 것은 신학적 진술이 아니라 정파적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또한 안티-기독교 진영이 현재 한국의 대형교회에서 일어나는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현상들을 기독교 자체로 오해하는 것처럼 조 목사도 역시 지난 2천년의 신학역사를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일시적이고 부분적이었던 신학현상들을 전체로 오도하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둘째, 조 목사에 따르면 서구신학은 이론이 먼저이고 민중신학은 프락시스가 우위이며, 서구신학은 텍스트가 먼저이고, 민중신학은 콘텍스트가 먼저라고 한다. 이런 이원론적 구분은 신학과 역사에 대한 철저한 곡해에 연유한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이론이지만 인간의 노동과 그 소외 문제를 담고 있듯이 기독교의 종말론은 이론이지만 인간과 역사의 현실을 담고 있다. 화이트헤드가 말하는 “Reality is a process”가 이론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하이덱거가 말하는 ‘존재’나 노자의 ‘도’가 관념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기본적으로 철학을 모르는 사람이다. 삼위일체론을 사변적인 이론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학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론을 세우기 전에 이미 어떤 궁극적 현실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물론 조 목사가 의도하는 것을 이해하려면 얼마든지 이해할 수는 있다. 이론이 아무리 프락시스를 토대로 했다 하더라도 실제 교회 생활에서는 관념적 이론으로만 작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무기력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래서 프락시스의 우위를 강조하는 민중신학이야말로 명실상부한 신학이라고 말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그런 주장도 역시 주관적인 것에 불과하다. 오늘 미국의 가벼운 복음주의에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가 얼마나 철저하게 현장 중심적이며, 프락시스 우위적인지 우리는 눈으로 보고 있다. 신학무용론에 빠져서 청중의 종교적, 세속적 욕망에 치우친 한국교회의 정체성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는 아마 조 목사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민중신학의 프락시스 우위성을 그들의 그것과 구별하고 싶겠지만, 전자는 사회와 역사적 지평에 관심을 두는 반면에 후자는 개인과 실존적 지평에 관심을 둔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지 대중추수주의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전혀 없다.
셋째, 조 목사는 “온갖 교리를 만들어 신학을 어렵게 하고, 현실 문제를 외면하기 위하여 거룩을 빙자하게 된” 서구신학의 전형이 루터의 ‘두 왕국론’이라고 지적했다. 조 목사에 의하면 루터는 이중적인 처신을 했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자신의 개혁을 위하여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고, 귀족들이 재세례파를 탄압할 때 귀족들을 독려해주었다. ... 그들 농민들은 루터가 처음 개혁을 시작했을 때 열렬히 지지해주어 루터가 개혁을 완수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 사람들이다. ... 루터파 귀족들의 억압과 착취를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개혁에 나선 것인데, 루터파의 탄압으로 많은 이들이 죽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세계를 두 개로 나누어 보는 시각에서 생긴 참극이다. 이 여파로 루터가 개혁을 시작했던 독일 남부지방에는 지금까지 루터파가 별로 없다.

조 목사는 역사의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말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역사의 깊이를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루터는 농민전쟁 초기에 농민의 입장에서 영주와 군주들을 향해서 타협하라고 권면하는 글을 썼다. 농민들의 폭력적 시위가 과격하게 발전되면서 루터의 입장이 달라졌고, 급기야 그들을 폭도로 규정함으로써 군주들이 그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농민들을 끝까지 지지하지 않았다는 사실만 놓고 본다면 루터의 역사의식은 문제가 크다. 그러나 오늘의 잣대로 그의 행동을 매도하는 것은 조 목사가 그렇게 강조하는 콘텍스트를 무시하는 것이다. 두 가지만 보자. 첫째, 우리가 농민전쟁에 관한 루터의 행태를 말하려면 뮌처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근본적이고 원리적 종교 개혁자였으며, 신학적으로는 세대주의적 천년왕국론자였던 뮌처에 의해서 농민들이 선동당하고 있을 때 현실적 종교 개혁자인 루터가 무슨 말을 하는 게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는 건지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둘째, 폭력적인 농민들을 폭도로 몰아붙인 루터의 논문이 없었다면 그 당시 군주들이 농민들의 주장을 순순히 받아들였을까 하는 점도 중요하다. 프랑스 혁명도 아주 요원한 16세기 초에, 독일의 봉건적 군주제가 추호도 흔들림이 없던 그 상황에서 루터가 걷잡을 수 없는 폭력으로 빠져들던 농민전쟁을 부추겼다면 훨씬 많은 희생자가 생겼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가 대놓고 종교 개혁사에 관해 말할 입장이 아니기에 그만 줄이겠다. 다만 농민해방의 카이로스가 아직 이르지 않았을 시점에는 극단적인 폭력투쟁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만은 인정해야하지 않겠는가.
더 근본적으로 루터가 두왕국론에 기대서 자기의 안일을 도모했다는 조 목사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두왕국론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세상을 그냥 직시해보라. 이 세상의 질서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구별된다는 것은 아무 명백한 게 아닌가. 예컨대 이 세상에는 과학의 질서가 있다. 양자역학에 대해서 교회가 왈가왈부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세상에는 실정법이라는 질서가 작동된다. 그것에 대해서 교회가 일일이 시비를 걸 수는 없다. 교회는 실정법이 아니라 오히려 칭의론으로 인간의 삶을 살리는 길을 찾는 공동체가 아닌가. 초기 기독교가 유대교의 율법을 완전히 거부하고 복음 공동체로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도 역시 법의 질서와 은총의 질서를 구분했다는 의미이다. 이 자리에서 악한 질서도 인정해야 하는지, 하고 질문하지는 마시라. 그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작은 사실관계를 하나만 더 확인하자. 위의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조 목사는 루터의 잘못으로 인해서 루터가 개혁을 시작한 독일의 남부지방에 루터파가 별로 없다고 설명했는데, 루터는 북부지방에서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종교개혁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95개 조항의 신학명제가 작성되었으며, 그 뒤로 루터가 죽을 때까지 적극적으로 지지해준 도시인 비텐베르크는 독일 동북부지방이다.
넷째, 조 목사가 성서를 인용하는 방식에도 논리적 결함이 보인다. 민중의 메시아 성을 설명하면서 그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인용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강도 만난 사람은 민중이다. 이 민중을 살려낸 사마리아 사람은 민중에게 고귀한 행위를 함으로써 구원받은 것이다. 결국 강도 만난 민중이 사마리아 사람을 구원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민중의 메시아 성”이라고 한다. 성서본문을 이렇게 읽다니, 참으로 해괴한 논리이다. 그런 논리라면 강도 만난 사람의 상황을 야기한 강도도 역시 메시아 역할을 한 것이라는 말이 된다. 예수를 판 가룟 유다나 예수를 고발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십자가 처형을 선고한 빌라도 총독 모두 메시아 성을 띤 이들이다. 이방인을 제외한 유대인들만을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을 향해서 “이웃이 되라.”고 주신 예수님의 소박한 비유를 근거로 이런 논리의 비약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당신은 서구 보수신학에 철저히 세뇌된 사람이래서 민중신학이 말하는 메시아니즘의 신비를 알 수 없어, 하면 할 말이 없다.  

정통신학은 용도폐기 되었나?
조 목사는 민중신학을 비판하려면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난 뒤에 하라고 충고한다. 그는 서구신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으면 민중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제 필자는 민중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비판했다는 그 비판을 그대로 조 목사에게 돌려드려야겠다. 조 목사도 역시 서구신학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 용어와 개념을 제 논 물대기 식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가 결론 부분에서 제시한 민중신학의 열 가지 특징도 별 대수롭지 않는 것을 침소봉대한 것이며, 더 나아가서 진정한 민중의 체험 없이는 이런 민중신학의 깊이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민중신학이 일종의 소종파적 밀의종교(密儀宗敎) 운동으로 떨어져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든다. 도대체 그가 말하는 민중체험이 뭔가? 신학적 성찰이 없는 기존의 교회 현장에서 “믿음이 없어서 그래.”라든지 “성령을 받지 못한 탓이야.” 하는 말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듯이 민중신학도 민중체험을 그렇게 사용하는 게 아닌지. 자칫 교조적 태도가 보여, 하는 말이다. 다시 묻자. 모든 걸 빼앗겨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상태를 경험해야만 가능한 신학이 민중신학이라면, 그런 자격이 있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오늘 집집마다 자가용을 굴리고, 핸드폰과 인터넷에 빠져 있는 대한민국 사람 중에서 누가 도대체 민중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민중은 관념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체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그 실체가 더 묘연해지고 말았다.  
예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배타적으로, 독점적으로 운용했듯이 조 목사가 말하는 민중신학도 역시 민중체험을 그렇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여타의 모든 신학과 같은 길을 못 가겠다고 한다. 민중신학만이 지고지선이라는 말이다. 믿거나 말거나, 민중신학은 서구신학에서 오염된 ‘사랑’이라는 말도 잘 쓰지 않겠다고 한다. 서구신학의 해석학적 전승과 완전히 단절하겠다는 포즈를 취한다. 그게 실제로 가능하다는 말인지, 아니면 단지 “우리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당위론에 빠져서 세계와 역사의 깊이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염려스럽다.
우리의 것을 찾겠다는 의도를 가타부타 말할 건 없지만, 문제는 세계 신학이 그걸 인정하는가에 있다. 이런 필자의 주장도 역시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비판받을지 모르겠다. 조 목사가 그렇게 강조하는 신학의 주체성 문제를 여기서 다시 거론하고 싶지 않다. 그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조 목사의 언어사용이 일관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서구신학의 주객도식을 거부한다고 하면서 서구신학을 대상으로 놓아야만 성립되는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다. 민중신학이 정통신학을 어디까지 부정하는지를 말이다. 신구약 경전과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등을 비롯한 역사적 문서들을 모두 용도 폐기시킬 생각인가? 필자가 시비 걸듯이 말한 이유는, 조 목사의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민중신학이 아예 신학적 대화를 거부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유럽신학에 대한 극도의 불신을 거둬들이기를 바란다. 유럽 신학의 한계를 본다 하더라도 유럽신학은 분명히 기독교의 역사이며 현실이다. 그들과의 대화가 없이 자폐적 상태에서 우리만의 고유한 신학을 제시하겠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축소시키는 길이며, 더구나 그 작업은 가능하지도 않다. 편견 없이 우리 앞에 놓인 신학의 역사를 직시할 필요가 있다. 한 가지만 예로 들고 글을 마쳐야겠다.
바울, 루터, 그리고 바르트로 이어지는 칭의론이 말하려는 그 핵심 안으로 들어가 보라. 왜 그들이 인간의 구원 문제를 칭의 개념으로 접근했는지, 그리고 의(義)를 실질적인 게 아니라 법적인 관점으로 해명하고 있는지를 알면 정통 신학이 인간과 역사를 아주 현실적으로, 조 목사의 표현으로 바꾸면 살아있는 실체로 본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그런 칭의론을 백날 가르쳐봐야 인간과 역사가 변하나, 하고 묻지는 마시라. 기독교 신앙에서 실제적인 변화는 그렇게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 뿐만 아니라, 어떤 점에서 보면 인간에게는 그런 변화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필자가 알기로는, 제1,2세대 민중신학자들은 이미 유럽신학과의 대화를 놓치지 않았다. 서남동과 김창락은 죄 문제에 집중되고 있는 칭의론을 극복하기 위해서 ‘한’ 개념을 도입했다. 필자도 얼마든지 동의할 수 있는 이런 시도는 정통 신학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이지 조 목사의 주장처럼 그것 자체를 부정 해체하는 것은 아니다. 서구의 정통신학이든지 민중신학이든지 서로 해석학적 토대를 인정하고 소통하며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를 존재와 행위의 근거로 삼아야 할 우리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땅한 영적 태도가 아니겠는가. 독일에서 부는 바람(루아흐)이나 한국에서 부는 바람이나 똑같은 바람이지 않은가.  
오늘 필자는 경솔하다는 말을 들을 각오로 약간 공격적으로 거칠게 글을 썼지만, 속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 조 목사께서도 그렇게 읽으실 줄로 믿는다. 좋은 자리에서 만나, 한잔 합시다. (기독교사상,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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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5.27 22:33:51

위 기고문의 글빨이 좀 거칠어서
다비아에 올려야 되나, 하고 생각하다가
김동현 님이 까발리는 바람에
궁금해하실 분들이 있어서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올립니다.
그냥 '재미'로 읽어보세요.
94번 "진보신학, 비판적 성찰"의 속편이라고 보면 좋습니다.
조수현 목사님의 글도 찾아서 한번 올려보지요.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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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6]김동현

2008.05.27 23:01:07

까발린다! 정말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정목사님, 갑자기 너무 친근하게 다가오셔요. ㅋㅋㅋ

[레벨:1]초록새

2008.05.28 10:24:25

정 목사님은 조씨들과는 (신학적)사이가 별로 좋지 않군요.ㅋㅋㅋ
전에 한미 에프, 티, 에이 문제로 조아무개 목사님과 껄쩍지근하게 한판 하시더니
이번에도 역시 민중신학 문제로 조 목사님과 신학논쟁을 벌이셨군요.
저도 조 목사님의 글을 기독교 사상에서 읽었습니다.
첨에는 뭔가 때려잡을 듯이 대단한 기세로 나오는 것 같아 바짝 호기심을 갖고 있었는데
장문인 탓인지 중반부로 가면서 글에서 맥이 풀리기 시작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글쓰는 사람에게는 시종일관 긴장감을 유지한다는게 중요한데
조목사님에게는 그런 점이 취약해 보였습니다.
단거리 선수가 장거리에 약하다는 말이 이 자리에서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장문을 쓰는 동안 후반부로 가면서 긴장감, 기력 같은 것이 확실히 떨어져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목사님께서 지적을 잘 해 주셔서
또 한 번 잘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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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08.05.28 12:46:50

혀를 찌르는 정목사님..

주관주의를 넘지 못하는 한국교회의 한 단면이 아닐런지요...

2000년 신학역사에 대해 더 공부해야 하겠습니다..

멋쪄부러~~~~(코미디 중 유행어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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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8.05.28 17:27:38

어제 민중신학에 관한 책을 읽었습니다.
오늘 정목사님 글을 읽으니, 민중신학에 대해 관심이 가져지네요.
어느 분이 조목사님 글 좀 올려 주시죠.
그래야 정목사님의 반박론이 더 이해가 될 것 같네요.

[레벨:6]月光

2008.05.29 11:08:48

흐미~
요즘 그런 일이 좀체로 없었는데...
장문의 글을 쓴 후 글쓰기를 눌렀는데 사용권한이 없습니다와 함께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시 복기할 능력도 없고...
요즘은 그런 일이 없어서 복사도 해두지 않았는데...

[레벨:17]까마귀

2008.05.30 11:27:49

프린트해서,조용한곳을찾아서집중해서읽었습니다.밑줄그을만한글을찾기가힘든때에,밑줄을그으면서재미있게,흥분하며읽었습니다.좋은글써주신정목사님께다시감사드립니다.특히내용과더불어낙수들또한엄청나네요.포퓰리즘을대충추수주의라고하네요.허를찌르는글이네요.글끝까지,힘차게애착을갖고쓰신글이라더더욱애정이가는글인것같습니다.다른사람들에게도보이고싶지만,보고이해할만한사람들이주위에없네요점점자폐증세가심해져가는현실이안타깝지만하늘을향해서는더욱더문이열려지는것같은기분입니다.다시한번좋은내용소개해주신,정목사님께감사드립니다.경륜적삼위일체와내재적삼위일체도좀공부해야겠네요부끄럽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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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7]바우로

2008.05.30 14:15:19

제 블로그에 정 목사님이 민중신학에 대해 쓰신 글을 발췌하겠습니다.

[레벨:0]의연이

2008.05.30 14:22:39

2편의 한국교회를 위한 설교비평에서나 조목사님의 정 목사님의 비평부분은 모두, 역시 비평의도를 잘 못 이해했거나 오해에서 비롯한 말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계속해서 이런 비평 아닌 비평들로 이어간다는게 짜증(?)도 나고 반복되는 해명도 무감각해지려합니다. 비평하려는 사람들이나 글 읽는 사람들이나 지발 국어공부 다시 했으면 좋겠다고 봅니다.(저도 과격해지려나??)

오늘 기독교 사상 4-6월 호에 실린 진보신학 비평, 반론, 재반론 부분을 읽고 나서 다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받아치시는 정목사님..... 혼자 많이 웃었습니다. 뵈면 전혀 그럴 분위기는 아닌데 문장에서는 촌철살인이 느껴지니 말입니다.

정목사님! 계속해서 이런 비평들만 이어지는데, 이 기회에 설교는 이렇게 해야 된다는 식의 입에 넣어주고 삼겨주는 책한번 내시죠? 우하하하 또 같은 비평이 이어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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