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글 모음

조회 수 4339 추천 수 22 2008.06.25 14:34:42
설교비평집 <설교의 절망과 희망> 머리글

헬라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푸스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밀고 올라가는 징벌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힘들여 바위를 정상까지 끌어올린 그 순간에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곤 했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다시 바위와 씨름해야 할 시지푸스의 운명에서 까뮈는 인간 실존의 부조리를 보았다.
필자의 생각에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목사의 운명도 시지푸스의 그것과 같다. 말씀의 심연으로 몰입되는 황홀한 경험도 주어지지만, 동시에 한 발작 잘못 디디면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 내몰리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목사는 다시 말씀을 붙들고 끝없는 순례의 길을 가야하니, 그의 실존을 어찌 부조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씀 앞에서의 아득함과 청중 앞에서의 막막함은 아는 사람만이 알리라.
우리 설교자를 절대 고독으로, 거꾸로 절대 자유로 몰아가는 설교는 도대체 뭔가? 하나님의 존재론적 구원 사건을 은폐의 방식으로 계시하고 있는 성서 텍스트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하나님을 본 자는 죽는다는데, 바로 그 하나님의 존재와 통치를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할 설교자의 운명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영적으로 어린아이 같은 우리가 짊어지기에는 설교라는 짐이 너무 무겁지 않은가? 진리의 영인 성령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당장 질식하고 말지 않겠는가?
필자는 지난 몇 년 동안 월간지 <기독교사상>의 지면을 통해서 설교비평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썼다. 각각의 설교자들에게 서로 다른 평가를 내렸지만, 거기서 필자가 전하려고 한 것은 바로 위의 질문들을 함께 생각해보자는 것이었다. 같은 시대에 설교자로 부름 받은 말씀의 동지들과 함께 바로 이런 화두 안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는 말이다. 거기서 필자가 얻은 대답은 설교가 곧 설교자들에게 절망이며, 동시에 희망이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절망을 경험한 사람만이 새로운 세계로부터 비추는 희망의 빛에 눈을 돌릴 것이며, 이 희망에서만 절망이 더 이상 우리 설교자의 영혼에 상처를 내지 못하리라.  
앞서 나온 설교비평 1권과 2권에는 각각 열네 분씩의 설교자가 다루어졌고, 여기 3권으로 묶여 나오는 이 책에는 열 한분이 다루어졌다. 2007년 2월부터 12월까지 <기독교 사상>에 쓴 것이다. 부록으로 필자의 설교비평에 대한 반론이 실렸다는 게 특징이다. 반론을 주신 분들은 김영봉, 민영진, 박영선, 송기득, 조헌정, 이렇게 다섯 분이시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반론들이 있었지만, 직접 설교비평의 대상이 되셨던 분들의 글 중에서 <기독교 사상>에 게재된 것만 추렸다. 물론 이 글들이 모두 본격적인 반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글이 쓰인 동기도 조금씩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독자들께서 읽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서 옥고를 실을 수 있도록 허락해주신 위의 다섯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제 필자는 혼자 떠난 긴 여행을 끝낸 기분이다. 한편으로는 여러 시행착오로 인해서 아쉽지만, 솔직하게는 홀가분하다. 그 여행에서 만났던 많은 분들이 내 기억에 여전히 생생하다. 추억은 모두 아름답다 하는데, 모든 만남이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 여행을 잘 마칠 수 있도록 가까이서, 또는 멀리서 도와준 분들도 많다.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겠지만, 두루두루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08년 부활절에
환성산 아랫동네 하양에서
정용섭 목사



설교집 <그날이 오면> 머리글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살아야 할 목사의 운명은 그렇게 녹록치 않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현실이 놓여 있습니다. 한 개인인 목사의 인식과 경험이 하나님의 말씀을 감당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라는 사실이 하나이고, 우주론적 지평에서 존재론적으로 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목사가 지고가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사실이 다른 하나입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설교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어떤 설교자는 이런 사태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설교자는 그것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자에 속한 설교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화하는 것으로 설교의 책임을 감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청중에만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도구적으로 이용해서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치고, 더 나아가서 목회의 실효성을 높이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설교의 특징은 적용이 강조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강단에 예화가 많이 등장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텍스트는 변죽을 울리는 차원에 머물러 버리고 청중들의 종교적 반응이 설교행위를 총체적으로 지배합니다. 오늘의 대중 설교자들과 그들을 흉내 내고 있는 수많은 젊은 설교자들의 설교가 한결같이 이런 방식입니다.
저는 이제 한국교회의 설교가 근본적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소위 패러다임 쉬프트를 이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곧 청중으로부터 성서텍스트로의 회심입니다. 청중을 성서텍스트와 만나게 하는 게 중요한데, 어떻게 성서텍스트에만 집중할 수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성서텍스트가 바르게 선포되기만 한다면 자연히 청중과의 만남은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존재가 행위를 규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설교자의 영적 촉수는 청중이 아니라 하나님께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청중들의 흥미를 끌 수 없다는 걱정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청중들과의 만남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몫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령으로 감동된 성서텍스트의 놀라운 세계로 얼마나 깊이 들어갔느냐에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는 기본적으로 예언자들의 신탁(神託)과 동일한 경험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부끄럽지만 위와 같은 자세로 샘터교회에서 주일공동예배에서 행한 저의 설교를 여기 묶어냅니다. 2006년 12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행한 52편의 설교인데, 교회력의 시작인 대림절 첫 주일부터 그 끝인 창조절 열셋째 주일까지입니다. 52편이 모두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데도 모두 묶은 이유는 교회력을 살리고 싶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주일공동예배에서 교회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한국교회의 강단이 교회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건 설교자 자신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영성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편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교회력을 벗어나 설교자 구미에 맞는 성서본문에 치우치는 것 역시 영적 건강을 해치는 게 아닐는지요. 제가 도움을 받은 교회력의 성구집은 김종렬 목사님이 엮으신 <예배와 강단>입니다. 이 <예배와 강단>은 현재 세계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회 등 영어권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개정판 공동 성구집>을 따른다고 합니다. 매 설교 앞에 올린 성서본문은 <공동번역 개정판>이고, 설교 내용 중에 나오는 인명과 지명 등은 주로 <표준새번역>을 참조했습니다.
교정을 꼼꼼하게 봐 주신 홍종석 님께 감사드립니다. 전남정 님은 편집 계획으로부터 출판에 이르는 전반적인 일들을 도맡아 수고해주셨습니다. 저의 설교를 매주일 직접 들었던 샘터교회 교우들이야말로 이 설교모음집이 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입니다. 그 이외에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분들 모두에게 두루 감사드립니다.
이 책이 설교 사역의 외로운 길에 나서서 고투하고 있는 젊은 설교자들에게 작은 등불의 역할이나마 감당했으면 합니다. 성령이여, 저희를 도우소서!

2008년 6월 10일
환성산 아래 동네 하양에서
정용섭 목사



profile

[레벨:17]바우로

2008.08.21 18:19:55

정용섭 목사님, 머리말에 한가지 옥에 티가 있습니다.
세계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회 등 영어권 개신교회에서 사용하는 이라고 하셨는데,장로교, 감리교, 루터교회등의 영어권 개신교회와 세계성공회공동체(Anglican Communion)에서 사용하는 이라고 바꿔야 합니다. 왜냐면 성공회는 개신교나 로마가톨릭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포용하는 중용(Via Media)교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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