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바람

조회 수 3751 추천 수 5 2008.07.29 23:09:15
성령과 바람

고대 유대인들이 ‘영’과 ‘바람’을 하나의 단어로 일컬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 날카로운 통찰이다. 그 단어는 ‘루아흐’이다. 이는 곧 그들이 영을 바람과 동일한 어떤 현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오늘은 아무도 영을 바람으로, 또는 바람을 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기독교인들마저 그렇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지금 바람의 실체를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다는 데에 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공기의 이동으로 일어나는 바람을 영으로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기독론적인 차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자칫하면 그런 신앙은 태양신을 섬겼던 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자연숭배나 범신론으로 기울어질 염려도 없지 않다는 말이다.
이런 신학적 문제에 연루된 국면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우리는 고대 유대인들이 왜 바람을 영으로 이해했는지를 따라가야 한다. 오늘의 물리적 지식을 일단 내려놓고 고대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성서를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그 시대의 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고대인들의 눈은 바로 어린아이의 인식과 비슷하다. 예컨대 교육학자들 중에는 하루 종일 누워있는 신생아들의 얼굴 위에 모빌을 걸어두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아이들의 보는 능력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신생아 시절의 기억을 모두 망각해서 처음 사물을 보았을 때의 느낌에 관해 전혀 모르고 있을 뿐이지 무엇을 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현상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는 사물까지 정확하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실행된 수많은 반복 훈련 때문이다. 어쨌든지 고대인들은 신생아들처럼 세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감각적으로만 느꼈을 뿐이지 내면의 원리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을 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서 오해가 없었으면 한다. 오늘 현대인들이 바람이라는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잘 몰랐던 고대인들보다 훨씬 높은 인식의 수준에 도달했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알고 있을 뿐이지 절대적으로 많은 것을 아는 게 아니다. 어른들이 유아들보다 소리를 더 잘 들을 수 있지만 개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고, 시각의 능력도 독수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바람을 영과 하나로 인식한 고대인들이나 바람을 공기의 이동 현상으로 이해하는 현대인들이나 상대적인 차이만 있을 뿐이다. 특히 종교가 지향하고 있는 절대적인 사건 앞에서는 이런 차이가 무의미하다.
고대 유대인들에게 절대적인 것은 생명 사건이다.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는 그 어떤 힘이야말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 힘은 바로 하나님인데, 그 하나님의 보이는 통치 능력이 바로 ‘영’이다. 구약성서에서 그 영은 아주 다양한 장소와 사건에 개입해서 삶과 죽음을 결정한다. 창조, 전쟁, 질병 등등에 개입해서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이런 생명의 힘이 자연에서는 ‘바람’으로 경험될 수밖에 없다.
요즘 필자는 바람 경험이 참으로 황홀하다. 바람은 실체가 아닌데도 분명한 대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경험인지. 그것은 어디서부터 오는지를 알 수 없다. 산골짜기에서 오는가, 남태평양의 한 중심에서 오는가. 우리의 호흡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것이 무엇이기에 자연을 살리고 죽이며,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가. 필자는 바람을 영으로 인식한 고대 유대인들의 영적 통찰을 지금도 반복하고 있다.
영과 바람을 하나로 보는 영적 시각에서 중요한 점은 그것이 늘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이다. 영도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함께 하고, 바람도 역시 그렇다. 하나님의 영은 단지 우리의 심리 작용이 아니라 바람처럼 명백한 현실로 우리 생명에 개입해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바람을 현실(reality)로 느끼듯이 영을 지금 여기서 그렇게 경험할 수만 있다면 전혀 새로운 영적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이렇게 무더운 여름철, 거실에 앉아 창문을 모두 열어놓고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내 몸을 감미롭게 스치고 지나가는 이 바람이 바로 루아흐는 아닐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바람 자체가 영이라는 말이 아니라 바람을 통해서 생명을 일으키는 그 힘이 바로 영이라고 말이다.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대답은 종말에 주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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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08.07.30 12:26:24

"이 모든 것의 최종적인 대답은 종말에 주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끈질기게 기다려보자"

저도 목사님과 함께 끈질기게 함 기다려 보겠습니다.

[레벨:1]인봉

2008.08.18 14:55:19

목사님의 이 느낌이 참 좋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구약과 유대인에서 머물러야 하지요?

제가 구약을 읽으며 느꼈던 아쉬움이랄까... 하나님이 그런 유대인들의 하나님이어야만 한다는 것이 참으로 난감하더이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숨결이 미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건만 구약의 계약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왠지 그 계약이라는 것이 하나님을 우리가 구속시키고 핍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다가 신약의 복음이란 포괄적인 개념으로 돌아오면 다시 위안을 받았지요.

바람이 영이고 하나님의 숨결이고 손결인 것이 시공을 초월하여 있거늘 너무 기독교인이라는 울타리를 굳게 높게 세우려는 믿음이나 신앙의 체계가 좀 아쉽다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누구라도 좋습니다. 조언을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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