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구원

조회 수 7080 추천 수 138 2006.02.07 13:43:58
죄와 구원

이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에게 전도 받았을 때 가장 흔하게 주는 대답은 “죄가 많아서요.”일지 모른다. 이 말은 그가 실제로 자신의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기독교 신앙과 죄 문제를 동일시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두 가지 생각은 모두 틀렸다. 기독교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죄 때문에 교회에 나가지 못하겠다는 말에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죄가 기독교 신앙에서 그렇게 본질적인 게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이 말은 기독교 신앙에서 죄론이 구성요소이기는 하지만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차원과 다르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서 죄 문제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성서가 그것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실제로 본인들이 죄책감을 민감하게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초보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인간이 죄를 범함으로써 타락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다.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으며,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이제 그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구원받은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런 구원론의 중심에는 분명히 죄가 자리하고 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 사건과 카인의 형제 살해, 그리고 바벨탑 사건은 인간에게 놓인 죄의 본질적 성격을 가리킨다. 그 이외에도 인간의 실존에 놓인 죄 경향성에 대한 보도는 신구약성서에 지천으로 깔려 있다. 예언자들의 신탁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위로이기도 하지만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사람은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서도 우리는 인간의 죄에 대한 준엄한 경고를 듣는다.
기독교인들이 죄 문제에 집착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는 실제로 자신들의 삶에서 그런 경향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죄의 경향성으로부터 완전히 해방 받을 수 없다는 그 현실 앞에서 심한 자책감에 빠지기 일쑤다.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과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딜레마 안에서 방황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에 따라서 그런 딜레마를 무시하기도 하고, 그것에 완전히 휩싸이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지 영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는 건 분명하다.  
성서와 기독교가 인간의 죄를 그렇게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는지의 문제를 풀어가려면 매우 복잡한 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성서신학과 기독교 윤리학과 폭넓은 조직신학적 통찰이 여기에 필요할 것이다. 그런 전문적인 부분은 일단 접어두고, 최소한의 상식적 인식론에 근거해서 접근해보자. 여기서 우리는 일단 인간의 죄를 매우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 성서의 보도가 근본적으로 어떤 새로운 삶과 세계를 제시하기 위한 통로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민중들의 죄를 책망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런 행위로부터 돌아설 때 얻게 될 풍요로운 세계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의 말씀은 두말할 것도 없다. 예수님은 사람의 부도덕한 삶 자체를 직접적으로 거론해서 문제를 삼은 경우는 필자의 기억에는 한 번도 없다. 거꾸로 사람들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한, 아니 의롭다고 생각한 그런 요소들을 책망하셨다. 신약의 서신이 설명하고 있는 초기 기독교는 로마의 향락문화에 휩쓸리지 않는, 어떤 점에서 금욕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윤리적인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런 태도를 유지한 이유는 예수의 재림에 대한 대망이 매우 절실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그런 윤리적인 문제가 중요한 요소인 것 같지만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초기 기독교 공동체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에 자신들의 모든 존재 이유와 목표를 두고 있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무엇이 죄인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왜냐하면 죄의 본질과 실체를 무엇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죄는 기독교 신앙에서 중심으로 자리할 수도 있고, 주변부에 자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할 필요는 없다. 조직신학에서 원죄를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 말고는 인간의 죄악을 해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지 그것이 실증적 사실이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원죄 개념은 두 가지 이유에서 토대가 취약하다. 하나는 어떻게 자신이 실제로 범하지 않은 죄까지, 즉 아담의 죄까지 책임을 져야하는가, 하는 질문이며, 다른 하나는 결국 인간이 원죄에 의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다면 실제적인 죄의 책임을 인간에 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성서와 기독교가 죄에 관해서 문제를 삼는 것은 단 하나이다. 인간이 살아있는 한 죄는 빼도 박도 못하는 현실이다.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은 현재 살아있다. 이게 곧 인간에게 놓여 있는 자기분열의 기초이다. 죽어야만 해결되는 그 죄를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분열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어떤 길을 제시하는가? 예수의 의로움이 우리에게 전가되어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다. 그것이 곧 칭의론이다. 그런데 칭의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여전히 죄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칭의는 실체가 아니라 법적인 의미이다. 죽음을 통해서 죄가 해방될 때까지,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재림으로 이 세계가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으로서 살아간다. 이런 긴장을 억지로 무너뜨리려는 시도는 결국 이단의 길로 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용섭>

[레벨:23]브니엘남

2007.02.15 11:55:33

죄와 죄들은 다르게 성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5장 11절까지는 죄들(복수)을 그 이후로는 죄(단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로마서 5장 11절까지는 죄들(복수)은 우리가 지은 죄들을 그 이후로는 죄(단수)는 인격화된 죄로서 이 죄가 위로 하여금 죄들을 짓게 합니다.
우리의 지은 죄는 칭의 즉 법적인 구원으로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죄들을 짓고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짓지 않게 되는 상태를 성서는 몸의 구속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롬 8:23).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로마서 6:6절에 있습니다. "죄의 몸이 멸하여(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함)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죄는 우리 몸에 거하며 죄를지으라고 부추깁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장하고 성숙하여 몸의 구속에 이르면 몸에 있는 죄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지금은 우리가 비록 죄를 짓는 몸의 구속에 이르지 못한 사람이지만 언젠가 그 날을 바라보며 믿음 안에서 성장하여야 할 것으로 사려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께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오로지 몸의 구속에 이르기 까지 성장하고 성숙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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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6 13:49:16

죄와 구원?
현재 점검을 해보면, 죄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진리에 대한 갈망이 없어서이다.
구원받은 의인이면서도 동시에 죄인임을 망각하지 않아야 하는데, 현재의 삶에만 만족하려는 자신이 부끄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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