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읽기

조회 수 7650 추천 수 141 2006.03.06 18:57:26
요한계시록 읽기

요한계시록이 오늘의 독자들에게 얼마나 이질적으로 다가오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굳이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관한 몇몇 신앙적 훈계를(1-3장) 제외하면 22장에 이르는 거의 대부분이 비현실적인 묘사로 가득하다. 일례로 4장 2절 이하를 잠시 보자.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12장 7-9절은 다음과 같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마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으로 더불어 싸울 쌔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라.” 요한계시록이 오늘 우리의 세계관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정도의 인용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극단적인 초현실주의 문학작품처럼 보이는 요한계시록은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왜 그것을 경전으로 선택했을까? 이런 질문은 오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과도 연결된다. 오늘의 요한계시록 읽기가 어느 정도로 왜곡되어 있는지는 이미 알만한 분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한쪽에서는 그것을 단순히 문자의 차원에서 이 세상을 규정하는 실증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오늘의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죽은 문서로 간주하고 있다. 전자의 입장을 따른다면 요한계시록은 현실을 파괴하는 문서로, 후자를 따른다면 현실과 무관한 문서로 남게 된다. 양쪽 모두 성서읽기의 탈선을 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정통교회에서도 강도의 차이만 두고 늘 나타나는 이런 탈선의 극단적인 현상은 사이비 이단의 출현이다. 예컨대 666이나 144,000의 숫자를 오늘의 국제질서나 구원받은 사람의 실증적 기호로 해석하는 일들이 없지 않다. 아주 특이한 경우에는 요한계시록에 근거해서 로마 가톨릭의 교황제도를 비판한다거나 자신들의 교주를 신성화하기도 한다.
이런 억지 논리가 나름으로 대중적인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특징이 담고 있는 특이성으로 인해 그 해석의 스펙트럼이 거의 무한대라는 사실에 놓여 있다. 요한계시록은 전체적으로 이스라엘 역사에서 신구약성서의 중간기 특징이라 할 묵시문학에 속한다. 묵시문학은 현재의 세상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하나님의 전권에 의해서 시작될 새로운 세계(에온)를 향한 강렬한 기다림에 그 무게를 두고 있다. 이들의 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선악이원론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악한 세력은 곧 새롭게 열릴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멸망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선악이원론에 근거해서 이 세상을 해석한 이유는 그들의 역사경험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 이스라엘 주변에서 막강한 힘을 행사한 여러 제국은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 없는 초능력의 세력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희망을 걸어둘 수 있는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은 이 세상의 가장 강력한 세력인 제국을 초토화시킬 수 있는 초능력을 소유한 존재이어야만 했다. 이런 초능력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초현실주의적 기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천사, 용, 일곱 촛대, 뿔 달린 짐승이 등장하는 건 이런 이유이다.
요한계시록 저자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을 바로 이런 묵시문학적인 선악대립의 이원론적 구도로 바라보았다. 초기 기독교의 순교역사를 감안한다면 요한계시록 기자의 이런 해석을 틀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 당시에 로마의 케사르에게만 해당되던 ‘퀴리오스’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돌린 기독교가 로마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결과이다. 물론 사도행전 기자 같은 이들은 로마와 기독교의 화해를 시도했으며, 사도 바울도 나름으로 로마 제국과의 극단적인 대립만은 피해보려고 했지만, 현실 역사에서 로마와 기독교의 대립이 해소될 수는 없었다. 특히 우리는 요한계시록 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가 얼마나 혹독했는가 하는 점을, 우리가 모두 파악할 수 없는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질문이 남았다. 첫째, 신약의 정경화가 결정된 397년(카르타고 회의)은 이미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자리 잡은 때인데 왜 요한계시록이 교회의 경전으로 채택되었을까? 그 당시의 기독교는 요한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악을 로마가 아니라 이방세계로 보았고, 또한 요한계시록에서 정치적인 것보다는 예수의 재림신앙을 강조함으로써 나름으로 로마 제국과의 적당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경전으로 채택되었을 것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의 세계관과 전혀 다른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비록 루터와 쯔빙글리가 요한계시록을 불신했지만, 오늘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도 괜찮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이 묘사하고 있는 그 묵시사상적 표상은 기독교의 종말론과 아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묵시사상도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고 있으며, 기독교도 역시 종말론적 희망을 안고 있다. 요한계시록의 문학적 특징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세계를 오늘의 현실에서 재해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뜻밖의 영적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핵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승리자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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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이상훈

2006.03.06 22:50:43

목사님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그렇지만, 요한계시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유와 은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요? 또한 이단과 관계없이 사람들로부터 거론되는 성서에 나오는 666이나, 144,000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시간과 계기가 된다면, 정 목사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늘 깨어있는 글, 좋은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벨:6]유희탁

2006.03.08 21:30:19

어떤 목사님의 글에서 144000에 대해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분의 말씀으로는 이것이 거룩하고 완전한 수(12)에 완전 수(10)를 곱한 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분의 해석에 따르면 세상이 다 재난 속에 휩쓸려도 하나님의 종들은 남김없이, 빠짐없이 구원에 참여케 하시겠다는 뜻이라고 해석을 하시더군요. 즉 하나님께서 택하고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구출될 것을 의미한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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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3.11 23:41:48

이상훈 님,
666과 144,000이라는 숫의 실체는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과
그것을 받아본 그 당시의 독자들만 정확하게 압니다.
물론 그 당시의 로마 황제 이름을 숫자로 계산하면 666이 된다고 하네요.
로마 글자는 알파벧마다 고유한 숫자로 표기될 수 있지요.
144,000은 내가 주석을 볼 여유가 없어서 지금 정확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아마 2천년 전 그들만이 아는 어떤 상징이겠지요.
이런 문제는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나온 <국제성서주석> 시리즈를 보면,
또는 바클레이 주석만 보더라도 쉽게 해결됩니다.
늦은 대답, 그리고 충분하지 못한 대답, 미안합니다.

[레벨:5]권요안

2006.03.21 16:53:23

앗, 이 글을 왜 이제서야 읽게 되었는지...ㅜ.ㅜ
요한계시록의 기자가 처한 삶의 자리를 염두에 두고 다시, 더 깊이 고민해야겠습니다.

[레벨:0]Joseph

2006.03.28 18:24:19

D. 본회퍼 목사님의 <Life Together>란 책 서문 부분에 계시록을 기록하던
당시에 사도 요한이 처해있던 고독한 상황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Thus the exiled disciple of Lord, John the Apocalyptist,
celebrates in the loneliness of Patmos the heavenly worship
with his cogregations "in the Spirit on the Lord's day" (Rev. 1:10).

계시록의 기자가 당시 처해있던 "삶의 자리"의 혹독함을 지적하신 정 박사님의 글을
통해, 혹독하리만큼 외롭고 고독한 현실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지체들과 함께
예배하고 찬양하던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요한에게 오히려 영원한 나라에서 드리게될
영광스런 예배의 가치와 그 거룩한 공동체의 완성된 모습을 열어 보여주신 주님의 신비와
자비를 다시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계시록의 기자 사도 요한의 그 간절함과 애틋함을 통해 '공동체와 예배'라는 관점에서
요한계시록의 의미와 매력을 재발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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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3.28 23:35:53

요셉 씨,
반갑습니다.
예수회에 속한 분인데도 본회퍼의 글을 읽으시는군요.
낯선 미국땅에서 건강하게 지내십시요.
주의 은총이.

[레벨:0]Joseph

2006.03.29 19:22:18

정 박사님, 반갑게 맞아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예수회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3년 정도 예수회에 속한 Seattle University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그저 예수회 교육기관을 통한 구교 영성을 개신교인으로써
간접적으로 연구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Seattle University에서는
예수회 본래의 정신과 영성을 고수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을 만나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회 자체가 종교개혁에 맞바람을 일으키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완전성(헛점)
역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과 같은 참된 Protestant
'행동하는 복음주의자' 역시 많이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책을 통해서지만 말입니다.)
Weston Jesuit에서는 신학적인 입장에서 사회공의와 정치학을
다루며 본회퍼의 <Ethics>를 주교과서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행동"이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니 에큐메니칼리즘의
본 취지와 어려움 역시 알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샬롬~!

[레벨:0]이상우

2006.04.21 00:33:26

묵시문학이라 표현하셨는데, 그렇다면 요한계시록의 계시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는 말씀인지 궁금합니다.
요한계시록이 요한의 작가적 상상력의 산물이란 말씀인가요?

[레벨:3]코람데오

2006.05.26 23:45:41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이란 견해에 동의 합니다. 그러나 문학적 특징으로 인해 해석이 무한대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빈약해 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묵시문학이란 것이 문학의 형태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그 근거가 하나님의 계시에 근본을 두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세상적이고 비 신앙적 용어인 "문학"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동의 하는 것은 주님이 계시를 보여주실때에 발씀을 받는 선지자들과 요한의 귀에대고 "요한아 지금부터 내가 부르는대로 받아적어라"라고 말하고 불러준 것이 아니라 이상을 통하여 자신의 말씀을 선지자들에게 계시하사고 그 계시를 선지자들은 자신의 인격성과 지성에 바탕을 두고 용어를 선정하고 기록할 순서를 정하고 배열하고 기록으로 남겼다는 의미에서 "묵시문학"이란 표현을 사용 할 수 있다는 것 입니다.
따라서 묵시문학은 완전한 계시에 의해 하나님으로 부터 그분의 백성들에게 쓰여진 편지인 것이며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 보기에 한점의 오차도 없는 것 입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6.05.27 00:03:49

666의 의미

성경을 조금만 깊이 이해하고 있고 성경의 언어의 뉘앙스를 정확히 느끼고 있다면 우리는 그 당시 일곱 교회에 편지로 주어진 요한 계시록을 이해하는데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불행이도 요한계시록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한 책들을 본인은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본인의 의견으로 666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언어 입니다. 성경에서 7이 완전한 숫자로 하나님의 완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되듯이 6은 하나님의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사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한 숫자인 것 입니다. 어쩌면 사도 요한은 "네로"를 의미하며 사용한 숫자라는 주장도 일견 타당 성이 있을찌 모르나 제가 아는 성경의 저자들은 세상의 인물은 표현하기 위하여 숫자를 상징하는 경우나 성경에 근거없이 숫자를 사용하는 경우를 본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성경은 완벽성과 통일성을 가지며 하나님의 신의 감동을 입은 저자들이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지요.

만약 내로의 숫자가 555였다면 사도요한이 555란 숫자를 사용하렸을까요? 타당성이 부족 합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6"이란 숫자를 사용하였을까요? 그리고 성경적으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을까요?

제 대답은 YES 입니다. 성경의 몇부분만 집어보면
새상적 으로 가장 성공하였으나 하나님앞에서는 이방의 수많은 후궁을 우상과 함께들여 이스라엘을 온통 우상숭배로 물들였던 솔로몬의 부의 상징인 세입금의 중수가 666금 달란트 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크게 대적하였던 골리앗의 창의 길이가 6 키가 6 입니다, 그리고 느부가 넷살왕이 보앗던 신상의 사이즈도 가로 6 깊이가 6이지요 이렇듯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에 대해 자주 사용되는 숫자가 "6"이라는 숫자인 것 입니다...

그럼 외 6을 세번 곂쳐 사용했을까요? 이것에 대해 심증은 있으나 물증^^은 다소 빈약합니다..
심증으로는 성자,성부,성령 삼위하나님의 흉내를 내면서 대적하는 사탄의 세력을 표현하기 위해서 666이란 숫자를 사용하지 않았나 생각 합니다. 요한이 계시록에 누누히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력으로 묘사한 "사탄=뱀" "짐승=적 그리스도" "거짓선지자"의 세부류를 표현하는 방식이 아니었나 생각해보며 거의 바른 생각이라 봅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6.05.27 00:13:38

144000의 의미

참 논란이 많은 숫자 이지요.
설명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 인지라 결론만 적고자 합니다. 144000도 위의 666과 마찬가지로 어떤 무리를 상징하는 언어 입니다.

구약시대 묵시문학을 적은 선지자들은 144000을 표현하기 위해 곧잘 "남은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요한은 교회시대의 훗날을 바라보며 구원받은 사람들을 즉 666의 인을 받지 아니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하기 위해 144000 이란 언어를 사용한 것 입니다..

요한 계시록을 잘 보면 재림때 144000외에는 구원받을 자가 없지요^^

그럼 결론은 뻔 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알곡"을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양"을 열처녀 비유에서 "기름을 준비한 다섯 처녀"를 즉 주님의 재림 대에 신앙의 정절을 지킨 참 그리스도인들을 표현하기위해 구약교회인 이스라엘 백성을 표현한 열두지파중에서 12,000명씩 인치는 상황 묘사를 통하여 신약 교회 전부가 아니라 신약교회에서 알곡을 의미하는 144000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표 하고 있는 것 입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6.05.27 00:25:28

기독교란 무었인가? 구약에 대한 해석과 해석방식을 "예수와 사도들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의 모임이하고 할 수 있다. 구약을 유대교 식으로 해석하면 유대교가 되는 것이다.
과연 주님과 사도들은 구약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하였는지를 살펴보면 "666과 144,000이라는 숫의 실체는 요한계시록을 쓴 요한과 그것을 받아본 그 당시의 독자들만 정확하게 압니다. "는 정목사님의 말씀은 옛수와 사도들이 묵시묵학을 인용하고 적용한 방식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와 사도들은 묵시묵학을 포함한 구약의 모든 말씀을 "그 당시의 독자들만 정확히 안다"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묵시문학을 해ㅔ석하고 바라봄에 있어서 예언의 이중성을 항상 유념하고 보아야 한다, 주님과 재자들도 묵시문학의 언어들은 단순히 그 당대의 적용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주님과 재자들이 사는 현시점에 주어진 말씀으로 해석하고 적용하고 인용한 부분들을 수도 없이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묵시문학의 용어사용법과 주님과 사도들의 묵시문학에 대한 언어 사용법들은 잘 보면 요한 계시록이 얼마나 중요한 책이며 성경중의 성경이요 모든 성경은 계시록으로 통한다는것을 알 수 있다.

[레벨:3]코람데오

2006.05.27 00:36:11

구약 성경중 구약교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은 무었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사기의 선지자들로 명하신 묵시서의 말씀이자. 이사야서로부터 말라기서까지 묵시서의 말씀의 핵심은 범죄한 이스라엘이여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피로쓰신 하나님의 외침인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짓 재사장들과 선지자들에 의해서 너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니 축복 받는다 이스라에 민족은 일등 민족이 된다 라는 희망찬 메시지를 따르면서 모든 선지자들을 죽이고 핍박 하였다. 그 마지막에 세례요한이 있었고 이어 하나님은 아들의 죽음으로 그들을 심판하시고 이방인을 그분의 백성으로 삼으신 교회 시대를 여신 것이다. 초림의 주님과 함께 이스라엘은 심판받고 명말한 것 이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요한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서서 일곱교회로 대표되는 신약의 만세대 교회들에게 구약의 선치자들이 하신것 처럼 요한 게시록 1~3장을 통하여 경고 하시고 계신 것이다. 첫사랑을 잊어버린 교회는 버림 받는다, 사랑이 식어지면 버림 받는다 등등.. 그리고4장 이후는 이러한 경고를 무시하고 떠나가는 교회의 모습과 교회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구약의 묵시문학의 언어들을 빌려 표현 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묵시문학을 자세히 읽어보면 계시록의 언어들은 전혀생소할 것이 없는데 이는 구약의 묵시문학을 완전히 이해한 사도요한의 그 들안에서 하나님의 환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레벨:3]코람데오

2006.05.27 00:38:07

요한게시록은 성경중의 성경이요 사도요한이 증거한대로 다시 예언되지 않으면 안될만큼 진흑탕이 된 교회세대의 더러워진 하나님의 복음을 회복시키기의한 작은책의 말씀인 것이다..

[레벨:7]늘오늘

2006.05.28 01:58:19

묵사발을 만들고 계신 코람데오님,
구약의 예언서와 신구약중간기의 묵시문학은
전혀 다른 문학장르에 속합니다.
예언과 묵시는, 서로 바꿔 쓸 수 없는,
전혀 다른 개념이구요.
손 쓸 데 모를 ‘코람데오교’에서 빨리 벗어나시길...
- ‘늘오늘교’의 늘오늘 올림 ^^

[레벨:3]코람데오

2006.05.28 10:11:13

늘오늘님 토론과 뎃글에는 글쓴사람의 의도와 문맥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주요하다고 생각 합니다.제가쓴 뎃글의 의도와 주제가 묵시문학이 무었인가를 토론하기 위해 쓴 글이라 보시는지요. 신구약중간기의 묵시문학뿐만 아니라 구약의 예언서도 묵시문학의 한 분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늘오늘님 구약의 묵시서를 깊이 연구해 보셨다면 신약의 요한계시록이 얼마나 구약의 묵시서에 기반을 두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제가 계시록에대해 좀 언급했다고 해서 또 정목사님과는 혹은 이개시판에 개신분들의 의견과 좀 다른 의견을 개시한다고 해서 글내용에 대해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토론을 피하고 북사발을 만든다느니 "코람대오교"니 하는 유아기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 하지 않다고 봅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6.05.28 10:37:38

예언과 묵시는 전혀 다른 개념이 아니라 봅니다. 도한 구약의 다니엘서는 묵시문학에 포함되지요. 근본적으로 묵시문학은 구약 예언서를 그 근본에 두고 발생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예언서와 묵시서를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은 성경의 통일성과 완전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나다.

이해를 돕기위하여 이사야 54장을 예언을 예를 들어보면 예언당시 (BC 690) 보다 짧게는 약90여년이 지난 BC600의 포로귀한시대를 예언함과 동시에 구약의 종말 즉 심판의 날 즉 초림을 동시에 예언하면서 새시대 즉 이방인 교회시대를 노래하는 예언적인 요소와 묵시적인 요소르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알수 있으며

더 발전되어 백성을 보석으로 표현 하므로서 묵시문학인 계시록의 말기의 보석으로 치장된 거룩한성 새예루살렘을 노래하는 요한의 노래의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묵시서가 예언서의 바탕위에서 쓰여진 증거를 찾자면 수도없이 많습니다. 요한게시록의 언어의 대부분이 구약의 묵시서인 다니엘서 보다도 구약의 예언서인 이사야, 예레미아 등에서 인용되고 있음은 묵시서와 예언서를 간단히 분리할 수 없음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 입니다..

늘오늘님과 치열하면서도 진지하고 학문적이고 이성적인 토록과 나눔 기대해 봅니다.^^
주님안에서 강건하시길~~

[레벨:7]늘오늘

2006.05.28 15:30:38

코람데오님 좋은 글에 감사드리면서, 사과드립니다.
막연한 느낌만으로 님을 쉽게 재단했습니다.
거듭 사과드리며, 앞으로 님의 글에
진지한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주님의 평안이... ^^

[레벨:3]코람데오

2006.05.30 00:16:41

늘오늘님의 관용이 넘치는 몇줄의 글이 부족한 자의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이 되었음을 감사드립니다.
조그만 개척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시는 전도사로 시무하시는 저희 누나의 기도문이 제 마음을 책망하는것같아
함께 은혜나누었으면 합니다..

[ 차라리 침묵하리 ]

< 차라리 침묵하리 >

차라리
침묵 하리,
진실의 언어로 기초를 놓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사랑의 언어로 기둥을 세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감사의 언어로 들보를 얹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소망의 언어로 창을 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화평의 언어로 문을 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위로의 언어로 지붕을 덮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칭찬과 격려의 언어로 꽃을 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온유한 견책의 언어로 나무를 심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용서와 용납의 언어로 정원을 가꾸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침묵 하리,
침묵의 언어로 벽을 쌓지만 않는다면

차라리
침묵 하리·····

그 침묵의 언어가

눈물이 되고,
인내가 되고,
감사가 되고,
찬송이 되어,

하늘을 향한 기도의 골방을 만들고
보이지 않는 성숙의 담장을 두르고
이웃을 향한 섬김의 대문을 열어서

아름다운 생명의 집으로
지어가도록

차라리
침묵 하리.

2006. 03. 14.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 (시39:1)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잠15:4)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3:2)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눅6:45)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약 3:8~10)

[레벨:0]서시

2007.01.28 11:59:19

요한계시록은 이시대에 사는 기독교인에게 매우 중요한 기별을 담고 있다. 단순히 묵시문학으로 이해하면 참뜻을 알기 어렵다.

지면상 666만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추기경들은 교황이 될 수 있는 후보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틴어 이름:비카리우스 휠리 데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그러나 실제로 교황이 되어야 그 이름이 살아나서 로마교회를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가 되는 것이다.
교황의 관에 쓰여진 글자는 VICARIUS FILII DEI(비카리우스 휠리 데이)인데 라틴어로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는 말이다” <일요방문자 / OUR SUNDAY VISITOR, 1915년 4월 18일>

“하나님의 아들의 대리자”라는 이름의 라틴어 표기[VICARIUS FILII DEI]를 수치로 나타나면 666이 된다.
계시록 13장의 첫째 짐승인 로마교회를 대표하는 교황의 이름의 수가 666임이 확인되었다.

장차 교황권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그의 전략을 시행해 가는 과정에서 방해요소가 될 하나님의 참 백성들을 굴복시키거나 제거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행동하게 될 것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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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1.28 23:43:58

서시 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위의 대글은 독특한 내용이군요.
666을 교황권의 음모로 보는 시각에 무슨 근거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위의 대글은 다른 데서 인용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 인용한 글이 잘못되었다는 뜻으로 올리신 건지,
아니면 동의하신다는 뜻으로 올리신 건지 궁금하군요.

[레벨:23]브니엘남

2007.02.15 00:07:36

666의 의미와 144000의 의미에 대한 코람데오님의 고견을 잘 보았습니다.
666: 짐승의 수=사람의 수=장차 올 적 그리스도인 시이저 네로; 히브리어의 시이저 네로의 수 666
6: 제 6일에 창조된 사람; 창조되고 타락한 사람의 수; 사람이 타락하면 짐승과 같다(단 4:16, 33,34)

144000: 이 수는 성경에서 두 번 나옵니다. 계 7장과 14장에서
7장: 대 환난 기간 동안 인 맞은 이스라엘 자손의 수
14장: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는(부활한) 신약의 믿는 이들 중의 첫 열매들
그러므로 두 144000은 유대인과 그리스찬을 말하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144000:12×12×1000의 상징적인 수
12: 3×4; 12제자, 12사도

[레벨:23]브니엘남

2007.02.15 00:13:40

"차라리 침묵하리"란 시가 은혜가 많이 됩니다.
성경의 결론은 요한계시록인것 같습니다.
우리가 영화나 책을 보아도 결론을 모르면 기승전의 사건을 확실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마찬 가지로 계시록을 모르면 성경 전체의 해석이 달라지기 십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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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3.30 14:26:17

간결하게 편집하면 좋은 시가 될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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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8 01:19:41

요한계시록 읽기?
저는 성경 중 요한계시록은 한번 읽기식으로 대충 넘어갑니다.
요한계시록에 너무 포커스를 맞추는 것에 반발 심리로 그러는 것 같습니다.
여하간에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으면 좋을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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