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과 삶

조회 수 7007 추천 수 92 2006.05.02 23:33:21
부활신앙과 삶

그리스도교 신앙의 가장 독특한 요소는 부활 사상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삶에서 중요하다고 보는 윤리적인 삶, 사회개혁, 심리적 위로 같은 요소들은 굳이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강조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적 특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부활은 다르다. 역사적 실존 인물의 부활 사건에 자신들의 운명을 온전히 담보시킨 종교는 그리스도교 이외에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부활신앙은 이런 정도로 그리스도교에서 결정적인 요소일 뿐만 아니라 따라서 그런 정도의 위험을 수반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예수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앙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개의 설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신앙의 심각성을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이 부활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에 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의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갈 것이다. 그런데 부활절 때만 “부활을 믿습니다.” 하고 큰소리를 칠뿐이지 실제 삶에서는 부활에 관해서 마음을 닫아둔다. 왜 그럴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앞에서 전반적으로 자신들의 신앙에 관해 해명할만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전혀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는 이 세상의 학문과 세상질서에 완전히 함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변증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 대신에 그들은 자신들의 조직을 강화하거나 아니면 순전히 종교적인 체험 안으로 숨어든다. 예컨대 범(凡)그리스도교적 차원에서 벌이고 있는 사학법 반대투쟁이나 일부 그리스도교 대표자들이 벌이고 있는 뉴라이트 운동 같은 것들은 곧 교회가 자기 조직을 확대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며, ‘경배와 찬양’ 유의 신앙운동은 곧 세상과 교회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한 채 순전히 종교적인 영역으로 숨어드는 그리스도교 신앙 운동이다. 양자 모두 열광적인 양태로 나타나는 이유는 그것들이 기본적으로 나름으로 신앙의 실존적 불안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리스도교 신앙이 당연시되지 않는 시대사조 앞에서 겪게 되는 불안을 극복하거나 호도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욕망과 열정에 호소하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아직 합리성과 민주성이 아직 충분하게 정착하지 못하는 한 이런 흐름은 당분간 효력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들이 무의미해지는 일은 시간문제이다.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기초를 두지 않는 운동이라는 건 일시적으로 아무리 강력해보이더라도 오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대가 그리스도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해 일희일비 할 필요 없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해명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길밖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 결과에 대해서 하나님께 맡겨두고서 말이다.
이런 점에서 부활 신앙이 단지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통하는 은어(隱語)가 아니라 실제로 삶의 실질(實質)로 해명되고 변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선교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교회 지도자들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서와 교부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다루어진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오늘 필자는 교회의 전통이 말하고 있는 부활의 현실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 대신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이 부활신앙을 오늘의 삶에 실제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짧게 짚으려고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늘의 기계론적 생명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생명의 심층과 역동성을 들여다볼 수 있는 눈을 키워야 한다는 점이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21세기의 실증적 과학주의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쓸어내린다는 말처럼, 이미 19세기 중반에 진화론 논쟁으로 인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기를 경험한 적이 있기 때문에 게놈지도, 배아줄기, 돌리복제 등등의 용어로 상징되는 21세기의 유전공학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불안해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태 앞에서 변칙을 쓸 생각을 하지 말고 정곡을 치고 나가야 한다. 유전공학 프로그램이 생명의 실체를 완전하게 노출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다각도로 해명하는 데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 거꾸로 유전공학이 생명 현상을 완전하게 해명하게 된다면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신학자나 설교자들이 유전공학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 전문적인 문제는 그리스도인 유전공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부분이다. 신학자와 설교자는 자연과학이 아니라 신학적인, 성서적인 생명의 심층, 영적인 세계를 풀어내기만 하면 충분하다.
정작 우리에게 문제는 유전공학적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게 아니라 그것에 함몰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작 풍부하게 갖추어져 있어야 할 성서와 신학의 생명 세계에 대한 이해가 지나치게 척박하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생명의 영인 성령이 개인의 삶과 민족의 역사와 자연세계에 어떻게 활동하시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하는데, 실제는 “성령을 받으라!”는 구호를 외치는 일에만 바쁘다. 오늘 가난한 삶을 짊어지고 있는 이들에게 생명의 영이 어떻게 함께 하는지는 설명할 줄 모르고 단지 축복받는 일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이다. 민들레 한 송이에 은폐되어있는 생명의 충만함을 포착할 줄 모르고 그저 세계선교에 앞장 서야한다고 윽박지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교회가 부활 신앙을 실제의 삶으로 살아낸다고 할 수 있을까? 어림없다.  (2006년 4월30일)

[레벨:0]왕눈이

2006.05.04 18:28:01

오늘의 교회는 부활을 담아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담아내는 생명공동체의 역할을 감당하기 보다 오히려 교회 안에는 자기 구원과 축복에 매달려 있는 종교인들로 가득하게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신학과 설교를 하는 목사에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예수믿고 구원얻고, 천국가면 된다는 내세 지향적인 것에 무게를 더 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책임적 존재로 살아야 할 것에 대하여 가볍게 여기게 된 것이다.
이제는 공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도록 바뀌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나 혼자 예수 잘 믿고 천국가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 아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바로 내게 한 것이라는 공간의 의미를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이 공간의 의미가 회복될 때 내 생명도 보장받는 것이다.
오늘도 말씀가운데 생명의 소리를 듣고 전하기 위하여 산고의 고통을 가지렵니다.

민들래

2006.05.24 11:00:05

저는 부활신앙과 삶 이란 주제를 접하면서 기대와 흥분으로 읽어보았습니다.
지금껏 설교비평을 통하여 목사님에 신학적 깊이를 경험했기 때문이지요
비펑이 아닌 순수한 신학적 지평을 뚫고 부활의 참 맛을 보지않을까하는 기대로 말입니다.

목사님은 아래와 같이말씀하셨습니다.

- 이런 점에서 부활 신앙이 단지 교회 안에서 우리끼리만 통하는 은어(隱語)가 아니라 실제로 삶의 실질(實質)로 해명되고 변증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선교적인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교회 지도자들은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해해야 한다. 신약성서와 교부들,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다루어진 이 문제를 철저하게 공부해야 할 것이다. 오늘 필자는 교회의 전통이 말하고 있는 (1)부활의 현실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할 생각은 없다. 그 대신에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태도로 이 (2)부활신앙을 오늘의 삶에 실제로 담아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만 한정적으로 짧게 짚으려고한다. -

이렇게 말씀하시고 목사님이 전제하신

- 그런데 대개의 설교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신앙의 심각성을 별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만약 그들이 부활신앙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에 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의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갈 것이다. -

라고 말씀하신 부활에 맛을 조금이라도 주관적이던 현학적이던 간에 그깊이를 토로해 주셨으면하는 기대가
여운으로 남아 이글을 올립니다.
작금의 교계의 현 상황 이나 문제만을 지적이아니라 목사님의 진지한 설교 한편을 접하고 싶습니다.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요 ?
끊임없이 질문하고 토의하면서 생각의 폭을 넓혀 가시겠다는 목사님의 진지하신 생각에 힘을 갖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개괄적 견지에서가아니라 좀더 구체적이고 론리적 표현에 깊이를 다시한번 체험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레벨:0]riveroad

2006.05.24 11:25:06

민들래 님, 홈페이지 위쪽의 메뉴 중 신학마당의 "온라인 강의실"을 한번 둘러보세요.
부활에 관한 글들이(*설교는 아니지만) 있답니다.

부활절 전후로 부활에 관한 설교를 하셨을 것도 같네요. 다비아 홈페이지의 검색 기능을 이용해 보세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5.24 23:34:46

민들래 님,
저는 님들래 님이 잠간 이 다비아를 들렸다고
그냥 나가시려나 했는데,
오랫 동안 머물러서 여기 저기 글을 읽고 계시는군요.
제가 잠시 생각을 짧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염려되는 것은
저의 글과 저의 신학사상, 신앙의 깊이에 대한 눈높이를
너무 높게 잡으신 건 아닌가 하고 조금 염려가 되는군요.
개괄적이고 개념적인 설명이 아니라
구체적인 말을 듣고 싶다고 하셨군요.
그런게 그게 말입니다.
간단한 게 아니거든요.
결국은 신비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나라, 부활, 종말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말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논리적이기는 해야겠지요.
그런 신학적 개념만이 아니라
사물의 경험도 역시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여기 토마토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것의 실체를 제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게 어떤 과정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거기에는 태양, 탄소, 물이 작용한 탄소동화작용도 있구요,
토마토의 싸앗이 땅에 떨어진 엄청난 사건도 관계됩니다.
간단한 사물도 이렇게 오묘할 진데,
예수님의 구원 사건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제가 부활에 대한 설명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아닙니다.
신앙의 문제는 2더하기 2는 4다 하는 식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부활에 관한 설교는 제 설교 모음으로 들어가면 몇 군데 나올 것 같군요.
위에서 리러로드 님이 설명한 검색창을 이용하시면 다른 출처도 나올 겁니다.
온라인 강의록의 조직신학에 들어가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제목으로 한 강좌가 있을 겁니다.
부활은 기본적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와 연결된니다.
종말에 일어나게 될 영원한 생명이
예수에게서 선취적으로 발생한 것이 곧 부활입니다.
너무 신학적이고 관념적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일단 다비아에 실린 부활에 관한 글을 더 읽으시고
말씀을 주세요.
주의 은총이.

민들래

2006.05.25 10:39:44

목사님 감사합니다.이렇게 깊이 신경쓰시여 바쁘신대도 긴 댓글로 이해를 시키려 설명하여 주시니
좀더 목사님의 글을 더많이 읽어보고 진정으로 이세대에 주시고자 하시는 뜻을 더듬어 보는되 더 노력해
보겟습니다. 목사님 화이팅 !!!

[레벨:3]코람데오

2006.05.27 00:58:58

정교수님의 글 항상 감명깊게 잘 읽고 있으며 항상프린트하여 주면사람들에게 많이 권해 드리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오늘의 말씀도 잘 읽었습니다. 부활의 두가지 측면 "죽고나서 다시 사는것" 과 "우리의 삶중에 나타나는 부활의 삶" 중 후자의 중요성에 관해 언급 하신 말씀이라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부활의 의미를 위의 두개념 모두 정확히 모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실로 하나님의 말씀에 소경된 목자들이 득실거리는 시대가 아닌가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사야는 초림때의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으리 무지을 예언하기 위해서 "소경"이란 용어를 사용했으며 주님께서도 이를 염두에 두시고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라는 표현을 사용 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먼 훗날의 교회세대를 바라보면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씀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소경이 되어버린 교회세대를 에언하셨습다.

종교수님게서 지적하신것처럼 기독교인들이 참 부활신앙을 오늘의 삶에 실제로 담아내지 못하는 삶을 사는 것도 매우 큰 문제이나 죽어서 다시사는 근본적인 부활의 의미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은 더큰 문제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봅니다.

너무도 엉터리 같이 가르쳐지는 부활의 개념은 희대의 사기극인 "천국은 있다"라는 뚱단지 같은 책이 버졋이 팔리는 옷기는 현상까지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잇지나 않나 생각해 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5.28 00:05:34

코람데오 님,
반갑습니다.
처음이군요.
집사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던데,
생각과 글이 보통이 아니네요.
앞부분에 있는 요한계시록에 관한 글에서도
그런 걸 느꼈습니다.
한국교회의 미래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연이 아닐 겁니다.
섬기시는 교회에서 좋은 일꾼이 되시기를 바라고,
여기 다비아 온라인에서도 좋은 사귐이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주일이...

[레벨:23]브니엘남

2007.02.14 23:29:58

부활을 한 마디로 한다면 생명 입니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생명있는 것은 부활합니다. "생명의 부활"인지 "사망의 부활"인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부활의 권능(능력)을 찬양합니다(빌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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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8 06:47:07

부활신앙과 삶?
고민해야 하는 삶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신학단상에서 여러번 반복된 이야기이지만 교회에서 하는 행사등에만 집착하지 말고,
내적 영적 깊이를 위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고민한다면
부활신앙이 고난의 십자가에서 부활로 이어 진다고 봅니다.(줄거리를 간략해보면)
무수히 던져진 질문을 던질 수있는 분들이 왠지모르게 부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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