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제사장론과 설교권

조회 수 9285 추천 수 117 2006.06.06 23:23:59
만인제사장론과 설교권

평신도들에게도 설교권이 허락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주로 평신도 지도자들 사이에서 대화의 주제로 제기되는 것 같다. 원칙적으로만 말한다면 설교권이 목사에게 독점되면 안 된다는 주장은 옳다. 사도들이 전문적인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도 아니지만 설교했으며, 교회 역사에서도 평신도로서 위대한 설교자들이 된 이들이 적지 않다. 침례교회 같은 회중교회는 원래 전문적인 성직자가 아니라 평신도 중심의 체제를 운용했기 때문에 이런 주장이 나올 필요가 없을 정도로 평신도들의 설교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요즘 서울에는 이렇게 평신도 설교권이 보장된 교회도 여럿 있는 것 같은데, 실제로 말씀의 영성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진행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평신도의 설교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성직자에게 설교권이 배타적으로 주어졌다는 사실과 설교행위의 전문성을 내세운다. 그렇지만 이런 주장은 똑같은 반론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기름부음은 반드시 목사만이 아니라 장로들에게도 해당되며, 현재 설교하는 목사들에게 전문성이 확보되었다는 논리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다. 이에 관한 논란은 아직 정리되지 못한 실정일 뿐만 아니라 교회 직제와 관련된 보다 깊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는 접어두기로 하고, 주로 평신도의 설교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신학적 근거로 제시되는 만인제사장론이 과연 설교권의 개방성을 위한 중요한 신학적 토대가 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는 것으로 그치겠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마틴 루터가 주장한 만인제사장직은 종교개혁의 신학적 슬로건 중에서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을 온전히 교회 업무에 투자하는 사제들만이 아니라 세속 직업을 갖고 있는 평신도들도 역시 동일하게 사제라는 의미의 이 만인사제직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혁명적인 사상이다. 이런 사상이 결국 프랑스 혁명, 미국의 독립전쟁,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려는 수많은 사회 혁명운동의 단초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처럼 성직자와 일반 신자들 사이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는 만인제사장론에 근거해서 오늘 목사에게 독점되어 있는 설교권이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개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나름으로 설득력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가 제창한 만인제사장직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확실하게 정리해야만 한다. 그런 역사적 배경이 무시될 경우에 이런 신학개념은 왜곡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과연 루터가 평신도의 설교권까지를 배경에 두고 이런 용어를 사용했을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은 오직 사제의 사죄 선언을 통해서만 평신도들의 사죄가 가능하다는 로마 가톨릭의 주장을 비판하기 위해서 도입된 신학개념이다. 예컨대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하기 전에 사제 앞에서 가서 고해성사를 드리는 이유는 사제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의 역할을 한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루터는 각각의 신자들은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본인 스스로 직접 사죄의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만인제사장론을 주장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만인제사장론을 평신도의 설교권이 가능하다는 논리적 근거로 사용하는 데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물론 루터가 비록 설교권까지 염두에 둔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늘 우리의 상황에 따라서 이렇게 확대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건 아니다. 더구나 설교행위가 예배의 한 순서라고 한다면 사제 없이도 각자가 모두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론과 평신도에게도 설교권을 보장하라는 주장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확대해석하기 시작하면 그리스도교 교회는 완전히 무정부적 혼란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높다. 설교할만한 준비가 전혀 안된 평신도들까지 설교하겠다고 나선다면 그걸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사죄권의 남용해 대한 비판인 만인제사장론을 평신도의 설교권에 대한 근거로 삼는 건 신학적으로도 정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지혜로운 게 아니다.
그렇다면 설교권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하나? 그것은 교회의 카리스마(은사)에 속하는 문제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본질을 이런 카리스마론(論)에 근거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모든 지체가 몸에 붙어 있지만 각각의 기능이 다르듯이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신자들의 기능도 역시 다르다. 이런 구도에서 본다면 목사도 역시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지체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유한 기능을 감당해야 하는데, 그 기능이 곧 아우크스부르크 신조(?)에서 밝히고 있듯이 설교와 성례전 집행이다.
물론 여기서 또다시 왜 하필 목사에게만 이런 카리스마가 주어졌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겠다면 말이 되겠는지. 간호사가 아무리 임상경험이 많다 하더라도 의사를 제쳐놓고 수술을 집도하겠다면 말이 되겠는지. 일정한 신학교육과 목회임상을 거쳐 교회가 공식적으로 목사로 인정한 사람에게만 설교권을 보장하는 제도는 교회의 카리스마 원리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이다. 어쨌든지 평신도의 설교권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은 결국 명실상부한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한 목사의 자업자득이라는 건 분명하다.

바우로

2006.06.07 12:17:08

로마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하기 전에 사제 앞에서 가서 고해성사를 드리는 이유라고 하셨는데, 좀 옥에 티가 있는 문장 같습니다. 물론, 고해성사의 이유는 정목사님의 지적대로 사제가 죄의 용서를 선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이는 제가 섬기는 성공회 교회나 정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에서 고해성사는 미사전에 드리는게 아니라, 일년에 두 번 성탄주일과 부활주일에 합니다. 단,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교회처럼 고해성사에 강제성을 부여하지는 않지만요.

이길용

2006.06.07 17:17:56

개혁가들은 가톨릭의 미사를 강하게 비판, 거부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행위에 미사라는 의례에 참석함으로써 자동적으로 주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 앞에 단독자로서 오로지 신의 은총에 의해서 주어지는 믿음과 칭의를 강조하게 되었죠.

사실 가톨릭에서 이야기하는 미사는 단순한 의례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미사는 곧 신의 현존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개인의 선택 여부를 떠나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즉 성체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신의 현존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미사를 집전하는 제사장계급으로서 사제들의 위상은 상당한 정도의 중요성을 갖는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에 반해 개혁가들은 신의 은총을 깨닫지 못하는 이가 기계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거죠. 그보다는 그에게 칭의가 오로지 신의 은총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다 성서적인 신앙이라 주장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신과 인간의 통교를 이어주는 의례의 주관자로서 사제는 이제 계급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죠. 우리 모두 신 앞에 단독자로 나설 수 있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사제가 되는 거라고 볼 수 있겠죠(이 점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은 서구식 개인주의의 출발로도 볼 수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니체는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의미심장한 독일역사의 한 풍경이라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개신교의 목사는? 중세 가톨릭 교회의 사제와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미 이는 깔뱅도 주장한 바이기도 하죠. 개혁교회의 목사-장로-교사-집사 등의 직분은 역할의 분담이지, 이전 가톨릭이 주장하는 전혀 다른 계급의 신분은 아니라는 거죠. 그런 점에서 설교권이라는 것도 역할 분담이라는 측면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음.. 오늘 하루 종일 몸살끼로 끙끙거리고 있습니다. 다음 주 종강을 앞두고 기념 몸살이 왔나 봅니다. 그래서 글이 좀 횡설수설한 듯 싶네요.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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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6.07 23:15:00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가능한 자주 고해성사를 드린다고 생각했는데,
일년에 두번이라니,
내가 크게 착각했군요.
그러면 신부의 사죄 선언이 없는 보통 때 사죄는 어떻게 되나요?
미사 때 공개적으로 주는 사죄 선언으로 해결되나요?
옥에 티를 지적해준
바우로 님, 감사.

[레벨:4]이동주

2006.06.08 02:44:33

오늘의 주제가 만인제사장론과 설교권인데 주제에서 약간 비껴가는 형국이 되었네요.
저 역시 가톨릭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없어서 뭐라 말씀드리기는 곤란합니다만....
인터넷을 쭉 검색해보았습니다 . 성사만 해도 꽤나 복잡하고 구체적이더군요.
고백성사(고해성사)의 경우 고백을 위한 성찰의 예제로서 1, 2부로 나누어 100가지가 넘는 항목을 들었는데,
죄 고백의 대상으로 삼은 그 구체적인 부분에 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궁금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가톨릭을 이해해 보고자하는 마음은 있지만 솔직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음을 토로합니다. 과연 이런 것을 사제앞에서 고백하고 용서 받아야 할 만큼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그렇게 먼 사이인지? 우리 인간의 의지와 자유는 과연 그 어떤것도 용납되지 않는것인지? 무조건 다 죄 고백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저의 지극히 짧은 느낌으로는 밥을 오른손으로 먹어야 하느냐 아니면 왼손으로 먹어야 하느냐 게다가 그것도 60도 각도로 먹어야 하느냐 90도 각도로 먹어야 하느냐의 문제를 다룬다는 인상이었습니다만)

여기서는 댓글과 관련된 내용만 아래에 옮겨봅니다
(네이버 지식 검색에서 따왔습니다 출처: http://sacrament.catholic.or.kr/FAQ/Faq.htm)

Q.고해성사를 자주 받으면 좋겠지만, 의무적으로 일년에 몇 번을 받아야 하나요?


모든 신자는 적어도 일년에 한 번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하는데(교회법 989조 참조) 통상적으로 부활시기에 이행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 시기를 재의 수요일부터 삼위일체 대축일까지로 연장하고 있습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이 시기에 성사를 받지 못한 신자는 성탄시기나 다른 때에 받으면 됩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에서는 부활시기와 성탄시기에 판공성사를 마련하는 것이 관습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횟수가 '적어도 일년에 한 번'이라는 의무 조항에 국한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큰 잘못이 있으면 빠른 시일 내에 고해성사를 받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또 큰 잘못이 없다고 해도 중요한 시기에, 예를 들어 자신의 생일이나 영명축일을 맞이해서, 혹은 결혼이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고해성사로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하느님의 은총을 구한다면 좋지 않을까요?

바우로

2006.06.09 16:57:23

참고로 저희 성공회의 경우는 미사(감사성찬례)를 하느님께 드리기전에 죄를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고백하는 합니다.이를 죄의 고백이라고 하는데, 기도서에 죄의 고백내용이 나와 있습니다.요약하면 하느님과 사람앞에 죄를 지었으며, 자주 (신자로서의)의무를 소홀히 하였다는 것으로,이를 읽으면서 마음속으로 하느님과 사람앞의 죄를 뉘우치는 것이지요.그럼 사제가 하느님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를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합니다.그래서 꼭 고해성사가 아니더라도 평소에도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길용

2006.06.09 19:14:37

그 부분은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참회의 기도와 사죄의 선언은 예배의 중심 요소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은총이 임하는 것을 기계론적으로 볼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차이일 겁니다. 초기 개혁가들은 가톨릭의 미사를 마술적인 것이라 날카롭게 비판하고 또 거부합니다. 개혁가들의 시각에 신을 체험하고, 또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없이 미사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자동적으로 신앙이 유지된다고는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최근에는 리마예전을 정하는 등.. 가톨릭과 개신교의 예전강화의 모습을 많이 보이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인 예전에 대하여 취하는 태도는 차이가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겠죠. 아무래도 이후 개혁가들은 말씀을 통한 칭의의 믿음을 강조하다보니.. 예배에서 전례적 요소보다는 성서를 주석하고 풀어주는 설교가 더 중시됩니다.

민들래

2006.06.12 13:58:13

여기에 주제가 만인제사장론과 설교권인데 주제에서 비껴가는 형국으로 전개되여 갔군요,
목사님의 논지는 지금껏 주장 해 오신 올곧은 말씀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씀 인것 같아서 몇자
적어 보겠습니다.


----물론 여기서 또다시 왜 하필 목사에게만 이런 카리스마가 주어졌는가 하는 반론이 가능하다.
생각해보라. 악보를 읽을 줄도 모르는 사람이 성가대원으로 활동하겠다면 말이 되겠는지----

목사님의 논리라면 악보를 읽을 수 있다면 가능 한 것이 아니겠느냐 이것입니다.

그 렇 다 라고 한다면 더 확실한 신학적 근거와 성경 말씀으로 많은 사람이 누구나 이해 할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든 지 할 수 없다 든 지 설명하여 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이런 문제를 다루셨으니 말입니다.

상기와 같은 설명으로는 역시 가제는 게 펀 이란 생각 등을 떨 처 버닐 수가 없을 거라 사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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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6.13 00:07:40

민들래 님,
제가 말하는 핵심은
평신도 설교 절대 불가가 아니라
아래의 두 가지입니다.
만인제사장론은 평신도의 설교권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아니다.
설교권은 카리스마의 질서로 해결해야 한다.
알보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성가대에서 봉사하고 싶은 사람은
성가대장과 지휘자의 허락을 받아 성가대원이 되면 됩니다.
성가대원으로 임명받지도 않았는데
성가대를 제쳐놓고 자기가 주일 성가대 찬양을 대신하겠다고 하면
교회의 카리스마 원리에서 벗어나는 거지요.
평시도 중에서 설교에 은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일정한 신학의 과정을 거쳐서
목사 안수를 받으면 해결이 됩니다.
목사의 영적인 권위가 평신도 보다 우월하다는 말이 아니라
순전히 카리스만의 질서에 의한다는 것입니다.
바울도 눈과 코와 손의 역할이 다르다고 했습니다.
손이 발의 역할을 하겠다거나
눈이 입의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면 몸이 망가집니다.
그러나 약한 지체가 더 소중하다는 바울의 가르침에 따른다면
목사의 설교보다 주일학교 교사의 가르치는 카리스마가 더 소중할 수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것은
목사의 설교나
꽃꽂이 봉사나
교회 청소나 모두 똑같은 카리스마라는 겁니다.
교회 사찰이나 장로나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주님의 교회를 섬기는 지체이며,
그 기능이 곧 카리스마입니다.
다만 이런 카리스마는 혼동이 아니라 질서 안에서 진행되어야 합니다.
주의 은총이.

민들래

2006.06.13 11:43:23

목사님 이해가됩니다.
이렇게 해서라도 저같은 사람들에 의문이 풀려
보다 바른이해로 하나님 교회가 바로 세워 지는 계기가 되기바랩니다.
목사님 감사함니다
어제는 목사님의 좋은 목사님의 소개가 있어 모세골에 들어가 임 영수목사님의 설교을
들어 보았습니다 목사님을 이해 하는대 참으로 좋은 은혜깊은 설교를 접해보았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를 자주 접해보면서 정목사님의 생각과 사상 철학을 이해 하는데 도움을 얻도록 하려고 합니다.
저는 보고 느끼고 들은대로 질문할때 불쾌하신 점이 있더라도 용서하시고 깊이에 도달하지 못한 점들 을
잘설명 하여 주시면 감사 하겠습니다.
목사님 건강하시고 이 외로운길에 하나님의 은총이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길용

2006.06.13 17:26:05

개인적으로는 꼭 설교를 하기 위해서 신학과정을 거쳐야 필요가 있을까 생각은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자격이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이들에게 무작정 설교권을 허용해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전문적인 신학교육을 받지 않았다하더라도 설교를 위한 최소한의 과정을 마치게 되면 강단에 설 수 있는 자격을 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생각합니다. 사실 목사, 평신도(를 신분적으로) 구별하는 것 자체가 개혁신학의 전통에 어울리는 것인지는 잘 모르나, 집례의 전통을 목사직분이 유지 보존하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설교까지 독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따라서 유의미한 설교세미나나 설교대학 과정을 마치게 되면 예배시의 설교권도 자격있는 이들에게 개방하는 것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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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6.14 23:45:04

평신도 설교권이라...
지금도 무자격 목사직 남발로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군소교단에서는 6개월짜리, 1년짜리 속성 코스가 있다고 하며,
심지어는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가는 그것을 자격으로 인정한다는,
믿거나 말거나의 소문도 파다합니다.
정통 신학대학교에서도 신학의 질적인 문제가 많지요.
커리도 그렇고, 학습 내용도 그렇구요.
그런데 이 박사 말대로 설교를 위한 최소한의 과정으로
설교권을 허락한다면 그야말로 그 남용은 불을 보듯 뻔해요.
그렇게 되면 앞으로 개그맨들과 탤런트들이 그런 속성과정을 거쳐서
교회 강단을 지배하게 될 겁니다.
이 박사도 알다시피
설교라는 게 단지 설교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 전반과 연결되고
해석학 및 인문학 전반의 문제인데,
어떻게 단기 코스로 그게 가능하다는 말인지....

이길용

2006.06.15 08:00:50

그 교육과정이 한국에서 이루어진다면 확실히 적잖은 문제가 파생하겠네요.
전 그저 정상적인 커리 운영을 전제로 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이라는 구체적인 현실과 만나게 되면.. 좀 아찔해지는군요 ㅡ.ㅡ;;

이길용

2006.06.15 08:01:28

참고로 독일의 경우는 설교세미나 가정을 이수한 평신도에게 설교강단을 개방하고 있습니다.

민들래

2006.10.17 14:04:17

이길용님!
박사님이시라구요?
독일에는 이미그러한 과정이 있다구요?
박사님의 통닭이 참으로 먹음직 스럽습니다. (나중에 보니 통닭이아니라 사자머리군요)

베드로는 신학교을 안나왔어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후 3천명4천명을전도하는
능력있는 설교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구요

무디선생님도 조금은 신학적인 오류는 있였으나 세계적인 설교자 이였지 않씀니까?

문제를 지적 하기로 한다면야 신학교나온 문제있는 목사는 얼마나 많으며 거짓 독단 파렴치는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음없이 직업으로 목사한 엉터리 목사는 알마나 많은지요?
문제를 지적 한다면야 여백이 부족할거구요
믿음있으신 목사님이 배우시는것이야 물론 또 배우고 또 배우셔야 한다는 것에는 이론이 없구요

이런 문제점때문에 설교권 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을 마음으로 믿고 구원과 부활과
십자가고난과 동정녀 마리야에게서 나심과 성령님의 사역하심을
능히 증거 할수있다 면야 가능한 일이 아니 겠느냐 하는 솔직 한 저에 소견 이구요

정목사님의 우려 지금같은 제도 속에서도 이런 문제들이 난무 한데 평신도에게 개방이 되다면 야
그 심각성에 우려가 불보듯 환한한일이 아니겠느야 라고 이해 는 충분히 됩니다.

그 렇치만 힘에 균형이란 점에서 본다면 목사님들에 자성과 발전에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
하고 생각해보구요

성을 쌓는 문화는 역사 속에서 결국 자멸하고 개방하여 길을 열어 가는 문화는 발전했던
가장 평범 한 역사의 교훈인데 말입니다.

어떤 문제점 때문에 장벽을 쌓으려는 구도는 구태한 페러다임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오히려 능력있는 평신도는 얼마든지 설교를 할수 있다라는 것이 합리적이 아닐런지요?
다만 준비 되지않은 엉더이 뿔들이 항상 걸림돌로 작용 되여지는 비참함에 깊은 우려는 공감합니다.

[레벨:2]돌맹이

2006.06.21 12:02:46

저는 이제 하나님의 감사함을 몸으로 조금씩 느껴가는 초신자구요..
항상 이사이트에 들어와서 정용섭박사님과 신완식목사님의 글을 읽는것이 저의 하루 일과가 되었읍니다.
모쪼록 이런 계기를 만들어 주신 하나님과 정용섭박사님과 신완식목사님께 감사합니다.
힘내시구요. 하나님을 무당화 시키고있는 저희들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게 도와주세여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2]서범기

2006.07.03 23:23:36

안녕하세요. 정용섭 목사님.
저는 궁금한게 너무 많아서 늘 생각속에 살아가는 청년입니다.
궁금한게 있는데요.
교회학교 교사들이 자기 반 학생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설교라 봐야 합니까? 교육이라 봐야합니까?
공과를 넘어선 다른 주제에 대해, 다른 말씀들에 대해 학생들에게 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것이 때로는 설교의 형식처럼 전할 때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과 선포하는 것에 차이가 있다면 교사가 넘지 말아야 할? 어떤 선도 있는가요?

[레벨:0]바람과 구름

2006.07.06 08:30:20

평신도 목회권은 공예배이외의 구역예배, 가정교회예배에서 목회를 하면서 전문성을 확보해나가고, 이들 평신도 목회자들과 교회목사들이 운영회의를 구성하게 되면 목사의 독단과 독주는 방지되리라 봅니다. 또한 공예배도 평신도목회자들이 어느정도 전문성을 확보하면 부목으로 격상시켜 월 1-2회를 허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전문성을 요하는 목회를 만인제사장론에만 의존하여 아무나 설교권을 행사하게 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행위이며, 교회의 카리스마에 의한 질서유지에도 별로 도움이 안되며, 교회의 발전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봅니다.

[레벨:3]코람데오

2006.07.25 10:23:51

좋은 글들 잘 읽었습니다. 저는 정용섭 목사님의 의견에 대부분 동감 합니다.
핵심은 신학교를 나왔건 나오지 않았건 하나님의 말씀과 그본질을 이해한 자는 설교할 수 있다는
것 이지요. 그러나 성경이 그리 쉬운책이 아니라는 생각 입니다.
신학교를 나오는 것이 설교를 위한 자격요건은 아니나 최소한 신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의 공부는
해야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최소한의 요건일 겁니다.

그러나 신학교의 가르침이 지금처럼 엉망인 수준이면 그 최소한의 수준도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초림때의 이스라엘 땅의 종교지도자들을 보면서 주님이 내리신 진단이 무었입니까?
이는 두마디로 요약하면.

1.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

2.술취하여 술친구로 더불어 동무종들을 때린다.

는 말씀이십니다.

주님은 이러한 말씀을 구약 이사야 에서 가져오셔서 말씀 하셨습니다.

[사 29:9]

너희는 놀라고 놀라라 너희는 소경이 되고 소경이 되라 그들의 취함이 포도주로 인함이 아니며 그들의 비틀거림이 독주로 인함이 아니라

[사 42:19]

소경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나의 보내는 나의 사자같이 귀머거리겠느냐 누가 나와 친한 자같이 소경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같이 소경이겠느냐

그러나 구약의 말세인 초림때에 이스라엘 땅에는 가브리엘을 비롯한 많은 소위 말하는 신학교가
있었으며 가르치는 자들(지금으로 말하면 목사님 이겠지요)이 많이 배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소경이 되었고 술취한 자들로 주님으로 부터 정죄 받았던 것 입니다.

지금의 시대도 마찬가지 이겠지요^^ 신학교는 많이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에는 소경이요 술취한자
갇이 비틀거리는 거짓목자들이 수없이 많은 시대가 신약 이스라엘 교회시대의 지금의 모습 입니다.

그러니 릭워렌 같은 목사의 자선의 간증이 하나님의 말씀의 강단에 버젖이 복음으로 변질되어
올라와도 목사들 거기않아 아멘, 아멘을 연신 외치고 있는 거겠지요.
실로 답답하고 한심한 세대라는 생각 입니다.

[레벨:0]청년사랑

2006.10.28 00:14:44

설교가 권리인가는 약간 의무입니다. 그러면 평신도는(이용어도 싫어하지만 하여튼 씁니다) 설교를 들을 의무가 있는 것인가요. 설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고 생각되고 설교를 들어야 할 의무도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설교는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설교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물론 목사님만은 아닙니다. 목사님이 우선권을 가질 수는 있을 것입니다. 목사님만이 설교를 독점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많이 어리석은 생각이라 생각합니다. 평신도들이 설교를 하고 잘 할 수 있을 정도로 훈련을 시키지 못하는 오늘의 현실에서나 나올 수 있는 우문우답이라 생각합니다. 설교권이라.......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10.28 00:39:34

청년사랑 님,
벌써 몇 꼭지에 대글을 남기셨네요.
설교권이라는 표현이 이상하게 들렸나보군요.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축구경기를 하는데,
거기에는 선수들도 있고 심판도 있어요.
거기에는 룰이 있습니다.
선수들도 심판을 볼 수 있지만
심판 자격증을 따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볼 수 없어요.
어떤 선수가 심판을 향해서
당신 심판 실력이 형편 없으니까 내려와라, 내가 심판보겠다 하면,
조금 모양이 우스지거든요.
청년사랑 님은 변호사시죠?
거기에도 자격증이 있지요?
변호사 자격증이 없으면 아무리 법 조예가 깊어도 그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게 한 사회와 공동체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입니다.
실력있는 사람이면 목사이든 아니든 누구나 설교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아마 한국교회 강단은 신앙심 깊은 개그맨들과 탤런트들이 지배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실력이 있다 없다는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저의 위에 있는 글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지만
교회는 카리스마 원리가 작동됩니다.
각각의 은사는 독특하면서도 침범되지 않습니다.
목사가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로서 그에게 설교의 은사를 허락한 것 뿐입니다.
그런 질서가 사라진 교회의 미래는,
잠시 좋은 뜻으로 발전할 수 있는 있을지 몰라도
길게 보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게 벌어질 겁니다.
초대 교회는 아무도 신학교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설교하지 않았냐, 하는 논리는
여기서 무의미합니다.
모든 체제와 질서들은 역사 안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교회의 질서도 역시 역사 안에서 현재의 틀을 유지하고 있어요.
그게 잘못되었으면 고쳐야겠지요.

[레벨:0]baruch

2006.11.23 12:50:48

중요한 건, 공동체 또는 교회의 결정이라고 봅니다. 교회가 그 교회에 속한 어느 성도가 설교에 은사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설교권을 부여한다면, 그 성도가 신학교를 나왔든지 그렇지 않든지 그에게 설교권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목사가 아니더라도 주일 학교 교사들 중에서, 전도사들 중에서, 이미 설교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분들은 교회에서 그런 사역을 하도록 인정했기에 하는 것이지, 어떤 정규 과정을 공부해서가 아닙니다. 포인트는, 누가 설교할 것인가는 교회/공동체가 결정할 문제입니다. 그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은 교회의 결정에 왈가왈부할 일이 없습니다.

사랑나누기

2007.01.27 03:18:10

설교권의 논의는
정목사님이 말씀하신
'교회의 카리스마 원리를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가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제기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요인은
정목사님의 설교비평에
자세히 드러나 있습니다.

교회의 체제와 질서란 이유로
자격증(?)을 고집하기에는
심히 헝클어진 상태입니다.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딤전1:7).

아직도 바울의 경계가 유효함을
기뻐해야 할까요?

[레벨:23]브니엘남

2007.02.11 23:49:02

설교는 하나님이 주신 은사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는 "목사와 교사"가 하나의 은사입니다. 신학은 어떤 사람의 학문을 하는 곳이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설교는 하나님께 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므로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하여 은사가 있는 자는 누구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건은 신학을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이 다른 사람의 설교 비평을 한 것이 아닙니까? 평신도 사역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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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1]유목민

2007.02.12 20:52:39

만인제사장?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제사장? 만신자제사장이 신학적으로 맞지 않나요?

싸이먼

2007.03.04 21:01:43

목사에게는 설교권이 있다면서..전혀 준비되지 않은 설교를 하시는데도...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입만 뻥긋하면 큰 일나는 분위깁니다..

은혜롭지 못한 설교로 상처받고 예배에 감동이 없는 경우에도
성도들은 속수무책입니다.. 이런 경우 어찌하면 좋습니까..??

그저.. 참고 기도하면서 목사님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 교회를 떠나주시기만 기다려야합니까..??
도대체 목사에게 설교권, 축복권, 저주권이 있다고 하시면서 성도들 겁주는데..
이거 신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로님들이 어쩌다 한 말씀씩 하시는 모양인데.. 인격 모독이나 교만으로 매도해 버리고 맙니다..
교회 안에 이런 문제가 있을때(실제로 많을거라고 생각하는데요..)
어떻게 지혜로운 방안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까..??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7.03.05 00:02:42

싸이먼 님,
안녕하세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저도 막막한 심정입니다.
많은 문제들이 얼키고 설켜 있어서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할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목사에게 저주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사이비 교주라고 보면 틀림이 없습니다.
싸이먼 님,
그래도 찾아보면 영적으로 수준 높은 설교를 하는 분들이 꽤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평신도들이 교회의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밖에서는 불평을 하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도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입니다.
사태를 너무 간단하게 보는지 모르지만
생각이 있는 평신도들이 불량한 설교자와 목회자에게, 그리고 그 교회에 그렇게 머물러 있는 한
교회 개혁은 불가능합니다.
조금 강하게 말씀드릴께요.
"지혜로운 방안"은 없습니다.
방안이 문제가 아니라 정직한 영성이 핵심입니다.
궁극적으로 한국교회가 개혁될 수 있는 지름길은
교인수가 반으로 뚝 떨어지는 것입니다.
한 주간이 시작됩니다.
행복하게 사십시오.
감사.

[레벨:0]섬돌

2007.04.09 23:24:15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한다면요..
교회의 장로님들에겐 설교권을 개방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어찌보면... 장로가 된다는 것이,,, 사실 목사된다는 것보다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되거든요.
많은 교인들이 동의가 있어야 되는 직분이기에... 상당한 기간의 내외공을 겸비해야 하거든요..
그런 분들 중에 교회의 동의하에... 개방을 해도 될 것으로 봅니다...
사실.. 교회 모 장로님이 말씀을 전할때... 구역예배나, 청년예배나, 중고등예배에서..더 은혜를 받기도 하거든요..

[레벨:2]소나기

2007.04.17 15:26:38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글을 재미나게 읽고
뻘소리를 달아 봅니다.ㅋ

누가 하는 지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ㅋ
설교자의 자리에 올라섰다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ㅋ
어떤 폭군이 이야기 자리를 마련하고.
재미없는 사람은 죽이겠노라.
한다면. 누가 그 자리에 쉽게 설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금은보화가 보장된다 하더라도 말이죠.
설교단에 서는 사람은 그래야 합니다.
설교자리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것이고.
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느냐 아니느냐를
자신이 책임질 수 있느냐
(어차피 책임 질 수 없지만 최소한 죽음이라도. 유치하지만)
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입니다.
저도 부끄럽지만 중고등부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있습니다만.
설교자리에 설 때마다 행여나 내 언어가 들어갈까.
행여나 내 마음색이 드러날까. 조심에 조심을 합니다.

신학교에서는 신학만을 배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 진중함을 배우고.
무엇보다 갑진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무수한 오류를
조금씩이나마 (기회차원에서) 줄여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에서. 최소한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 사랑의 주인공들에게.
오류없이 전달해야할 의무가
그 자리에 서는 순간.(또는 서기를 계획하는 순간)
주어지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 무서운 왕처럼 하나님이 벼락을 내리셨으면.
이같은 혼돈은 없었을 것입니다.ㅋ
또는 아주 현실적으로는.
신학교의 입학 자격을 아주 대폭적으로 높이는 것입니다.ㅋ
저도 좋은 성적 입학은 아니었습니다만.ㅋㅋㅋ
저는 붙었을 겁니다.ㅋㅋ 만점을 요구했었더라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웃어주십시오.ㅋㅋㅋ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움을 가지고 겸손하게
그 자리에 서는 사람을 사랑하시고.
누구보다 외로운줄을 아십니다.
그리고 책임지십니다.
이런게 바른 설교고.
바른 설교에 대한 이해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걸 어떻게 외적인 자격 요인으로 만들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설마 죽기야 하겠어. 이러고 설교단에 오르려고 한다면 무슨 기준으로 막는 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벼락이 진정 필요한 때입니다.
저도 벼락맞지 않을까 두렵긴 합니다만.
그런 죽음은 시작부터 각오한지라.ㅋㅋㅋ

설교자리는.
하나님이 내주셔야 서는 것입니다.
참고로 우리 교회는 교사들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하고.
교사들이 가능하다면 설교자리를 준비하도록 하고 있습니다.ㅋ
비록 중고등부안에서 뿐이지만.ㅋㅋㅋ

에이.ㅋㅋ 뭐 잘 모르겠습니다.ㅋ
워낙 제 언어가 체계적이지 못해서.ㅋㅋ 안쓰니만 못한 것 같지만.ㅋ
마음만 담아 주십시오~ㅋㅋㅋ
핑안~

[레벨:0]kantique

2007.07.14 00:18:44

가톨릭 신자로서 이 곳에서 주고받는 글을 보면서 좀더 본질적으로 접근하는 깊이를 보고싶은 아쉬움이 있군요.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9.28 07:15:07

만인제사장론과 설교권?
방향을 살짝 틀어서, 우리 교회 성가대는 많은 사람들이 악보를 볼 줄 모릅니다.
워낙에 성가대를 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서, 음치라도 무조건 대 환영입니다.
지휘자가 저와 동년배인데, 이세상에 음치가 없다고 주장하는 음악가입니다.
물론 저같은 음악에 무식한 음치는 결코 성가대에 들지 않습니다. (게으름때문에)
그냥 편하게 듣는것이 좋습니다.

떨어진낙엽

2007.12.27 05:43:24

길게 댓글을 달았기에 자세히 읽었습니다.
정목사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댓글을 읽으면서 설교하는 자로써 많이 부끄럽습니다.
별루이니까요. 많이 배웁니다

[레벨:1]인봉

2008.08.20 15:14:58

참아야 하는데...
설교라, 그것은 꼭 해야 합니까?
설교는 가르친다는 뜻인데, 가르치는 사람이 정말로 가르칠만 해서 가르친다는 이야기에요?
누가 누구를 가르쳐요?
성경을 보면 선생은 한 분 뿐이라고 했는데, 그 분이 가시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가르치고 배운다는 의미에서 볼 때 오직 한 길 아닐까요?

교황의 무오류성에 대해서도 많은 말을 합니다만,
같은 의미에서 목사의 무오류성도 똑같지 않을까요?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설교라는 말 자체가 부족하다는 것이고 푸닥거리하자는 이야기 아닌가요?
제대로 거기에 걸맞게 잘 하고 있는 사람도 자신을 돌아보면 부끄러운 일이 한 둘이 아닐 터,

얼마 전에 우리 교회 목사님께 그랬지요.
그만 그 무거운 짐 내려 놓으시고 친구로 내려오시라고요.
그리고 잘 모르는 이야기 애써서 웃기려고만 하지 말고 우리보다 훨씬 심각하게 오래 주님과 만나시지 않았냐고 그 경험담을 나누어 주시면 안되겠냐고... 그랬지요. 들을 리도 없지만, 그랬지요.
저도 참 건방지지요?
그런데 더 많이 혼이 나면서 그런 말을 들었으니 뭐라 말도 못하시더만요.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서로 말 몇 마디만 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믿음이고 신앙 아닌가요?
신학대학 나오고 꼭 박사를 따야 고수냐고요?
장난들 하고 있는 곳이 많은데... 일일히 다 참견할 수는 없고
교회 오래 다니시는 분들은 목사 마음에 안들으면 다른 교회로 미련없이 떠나시더라고요?
저는 그것도 참 이해할 수 없었어요?
설거지는 하나님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렇게 떠나면 되나요?
제가 하나님이어서 지금 설거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고요, 순진해서 잘 몰라, 목사님과 운영위원들 틀린 것에 대해 질문을 하면서 설거지를 하는데 다 자복하고도 안고치겠다고 합니다.
그 자복을 받아내는데 재미로 했겠어요?
저는 목숨걸고 했는데 그 높은 분들은 재미로 했는지, 가진 것이 그것 뿐이어서 그랬는지
게임은 싱거웠지만 꿀단지는 내놓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떠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뭐라고도 안하고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지요.
앞으로 게임은 저와 하나님이 함께 하는 것이지 그들은 없어졌지요.

이렇게 예수님이 던진 불이 곳곳에서 타고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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