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의 뿌리

조회 수 4827 추천 수 84 2006.07.04 23:44:55
샬롬의 뿌리

그리스도교 교회는 기본적으로 샴롬(shalom) 공동체다. 그러나 지난 역사를 약간만 돌아본다면 교회는 인류 역사에서 평화를 진작시킨 공동체로 기억되기는 힘들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은 이후에 로마의 평화(Pax Romana)를 종교적으로 합리화하거나 자기 영역을 확대하는데 힘을 쏟았지, 실제로 그리스도의 평화(Pax Christina)에 충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여기서 로마의 평화는 제국주의적인 힘에 의해 강요된 평화인 반면에 그리스도의 평화는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부활하시어 이 세상에 궁극적인 생명을 허락하신 주님에 의해 주어진 평화를 의미한다. 전자는 억압된 평화지만 후자는 자발적인 평화이다. 전자는 불의하지만 후자는 정의롭다. 서로 방향을 달리하는 이 두 평화는 이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경쟁한다. 억압적이고 불의한 로마의 평화는 그리스도의 평화를 시기하며, 또한 두려워한다. 국가, 교회, 시민단체 등등, 모든 인간 공동체는 진정한 평화가 불가능한 이런 구조 안에 숙명적으로 빠져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포도원 주인”이라는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서 한번 짚어보자. 포도 수확 철을 맞은 주인은 품꾼을 썼다. 그 포도원에는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있고, 오후 시간만 일한 사람도 있으며, 심지어 저녁 시간에 와서 겨우 한 시간만 일한 사람도 있었다. 하루 노동이 끝나고 주인은 모두에게 그 당시 일당인 한 데나리온씩의 품삯을 지급했다. 그러자 하루 종일 일한 사람이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한 시간 일한 사람과 열 시간 일한 사람을 동일하게 대우하는 것은 결코 정의롭지 못하다는 논리였다.
이 비유가 보여주는 상황은 아주 미묘하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생산성과 상관없이 한 데나리온이 지급되었다는 사실은 주인의 입장에서는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땡볕에서 일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들은 돈은 둘째 치고 무능력한 사람들과 동일한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우리가 그런 입장에 놓였다고 하더라도 비슷하게 행동하지 않았겠는지. 필자가 보기에 예수님은 불평하던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게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설명하는 중이다. 열 시간의 노동력과 한 시간의 노동력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그런 세계가 곧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다. 이런 질서는 오늘 현실에서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현실은 오히려 사람 사이의 작은 차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렇게 볼 때 이 비유에는 두 개의 질서가 경쟁하는 셈이다. 인간 생존이 중심축으로 작동하는 질서와 인간의 경쟁력이 그것으로 작동하는 질서 말이다.
다시 평화 공동체로 자처하는 교회로 돌아가자. 그리스도교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평화 공동체라는 자리를 지키지 못한 것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긴 하다. 그러나 그런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위의 설명에서 볼 수 있듯이 불가항력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아무리 평화 지향적으로 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고 하더라도 약간만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우리 자신의 평화는 물론이고, 주변의 평화까지 파괴하기 마련이다. 그게 우리의 숙명이며 현실이다. 신앙만 돈독하면 이런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보는 것은 지나치게 안이한 발상이다.
결국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있다. 교회는 평화 지향적 공동체인데도 불구하고 오늘의 현실에서 그걸 실현할 가능성이 별로 없다. 과연 그리스도교는 샬롬 공동체로서의 자리를 확보하고 유지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너무나 당연한 대답 같지만 참된 평화를 얻는 길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뿐이다. 왜냐하면 평화는 우리가 생산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론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가장 결정적인 길은 죽음이라는 사실에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다. 우리가 죽지 않는 한 궁극적인 평화는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있는 한 하나님과의 불화를 일으키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작정 죽기를 바라고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가능한 빨리 죽은 게 평화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우리의 궁극적인 평화는 죽음 이후에 우리가 실제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후에 주어지지만 궁극 이전의 평화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주어진다. 여기서 말하는 궁극적인 평화는 완전한 기쁨과 자유의 상태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런 새 예루살렘에서 경험할 수 있는 완전한 생명의 상태이다. 이에 비해 궁극 이전의 평화는 이 땅에서 인간 실존이 감당해야할 모든 한계를, 즉 몸이 아프면 힘들고, 사람에게 배신당하면 슬프고, 왕따 당하면 외로운 그런 현실을 그대로 안고 있는 평화이다. 궁극 이전의 잠정적인 평화는 이 역사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능하다. 그런 평화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다.(요 14:27)
오늘 샬롬 공동체인 교회가 참여해야 할, 그리고 이 땅에서 구현해야 할 평화는 이런 궁극 이전의 것이다. 이 세상에서 완전한 평화를 우리가 만들어낼 것처럼 욕심을 낼 필요는 없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한계가 많은 평화만이 가능할 뿐이다. 물론 그런 평화마저 교회나 그리스도인 스스로의 능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선물이다. 그리스도에게 깊숙이 연결되어 있을 때만 교회는 그런 평화의 열매를 거둘 것이며, 같은 논리로 이런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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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서범기

2006.07.11 14:50:44

목사님 글을 읽으면서 어떤 분이 저에게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그 분은 교회에 가면 워낙에 하는 일이 많고 맡은 직분도 많아서 주중에 회사에 있을 때 보다
주일 교회에 있으면서 더 신경이 예민해지고 피곤해 합니다.
그래서 그는 주일이 아닌 쉬는 날에 등산을 하고 낚시를 하며 거기서 쉼을 얻는다고 합니다.
오히려 산 속 한적한 절에서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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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3.30 22:42:27

교회를 안가면 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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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8 07:23:20

샬롬의 뿌리?
우리가 평화를 원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득권을 포기해야 된다고 봅니다.
기득권을 가진채 평화를 외치는 것은 감성적이고 차별화만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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