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신비

조회 수 6406 추천 수 84 2006.08.02 08:12:29
창조의 신비

구약성서의 첫 마디는 “태초에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구절이다. 매우 간략한 한 문장에 불과하지만 이 진술은 구약을 경전으로 삼는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토대이다. 이 세상은 저절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또한 현재도 유지되고, 종말론적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이 곧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기초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웬만큼 신앙의 연조가 있는 사람이라면 대개 알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창조 신앙이 근본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에 대한 속사정을 알고 있는, 또는 그것과 일치한 영성을 확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늘 창조 신앙의 본질을 그 신비라는 창을 통해서 들여다보려고 한다.    
창조 신앙은 기본적으로 무엇이 “있음”과 “없음”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그 중심에 놓고 있다.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하나님의 창조 행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의미이다. 이 주장은 신이 이미 이 세상에 있던 질료를 이용해서 모든 사물을 만들었다고 보는 고대 근동의 사상과 구별되는 성서의 고유한 창조 신앙이다. 어느 쪽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우선 모든 사물들의 생성 과정을 눈여겨본다면 무로부터의 창조보다 최소한 질료를 전제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더 높아 보인다. 인간을 포함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질료적인 원인이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헬라철학과 불교가 이 세상의 순환과 윤회를 주장하는 이유가 모두 여기에 놓여 있다.
이에 반해서 성서와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 세상의 근원을 선행하는 질료에 두는 게 아니라 인격적인 창조 행위에 두고 있다. 야훼 하나님의 창조는 무(無)로부터 시작된 행위이다. 그런데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게 말이 될까? 현재도 무로부터의 창조가 계속 일어나고 있을까? 완전 멸균 밀폐된 유리병을 땅속에 묻었다가 백년 후에 꺼내본다고 하더라도 그 병 안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이 세상의 질서에 의한다면 무와 유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심연이 가로놓여 있다. 이 심연을 건널 수 있는 자는 없다. 아니 우리는 무와 유의 차이를 인식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이렇게 “있는” 세계만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있는” 세계와 반대되는 세계가 곧 “없는” 세계라고 말할 수는 있다. 논리적으로는 그런 설명이 가능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우리는 인식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우리 지성의 근본적인 한계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가 건널 수 없는 이 심연에 다리를 놓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생각한다. 이게 자칫 말장난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무의 세계를 인식하지 못하면서도 어떻게 무와 유의 심연에 다리를 놓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를 우리는 아직 완전하게 해명할만한 영적인 인식론의 차원에 이르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무로부터의 창조는 신비이다. 여기서 말하는 신비는 이 세계를 바르게 설명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인식론적 도피처가 아니라, 물고기가 물 밖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듯이 이 세계에 던져진 인간이 이 세계 밖의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종말에 가서야 밝히 드러날 그 세계의 진면목은 현재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으며, 그런 점에서 신비라는 말이다.
창조의 신비문제는 단지 무로부터 유가 창조된 그 순간만이 아니라 현재 지속되는 이 세계와도 연결된다.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생명 현상은 궁극적으로는 신비이다. 우리가 탄소동화작용의 물리적 현상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왜 그렇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한 궁극적인 질문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대략 3백만 전에 인류의 조상은 ‘호모 에렉투스’(직립인)였다고 한다. 침팬지와 공동조상으로부터 직립인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결국 오늘의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하게 되었다. 인간 진화의 그림을 대충 그릴 수는 있지만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궁금증이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것은 현재 내가 마시고 있는 한 잔의 물이 어디서 왔는지를 찾는 것 정도로 불가능한 질문에 속할 것이다.
코엘료의 <연금술사>는 ‘산티아고’라는 이름의 양치기 소년이 자기 신화를 찾아서 여행길에 나섰다가 연금술사를 만나서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보편언어를 배운다는 이야기이다. 그 책의 중심주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상호 소통된다는, 어떻게 보면 불교의 유기적 만유일체 사상과 연결된다. 모든 물질은 자기의 시간이 있다. 그 시간을 채우면 해체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납이 금으로 변할 수도 있고, 금이 돌이 되기도 하고, 물이 나무가 되기도 하고, 나무가 나비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순환한다. 그 사이에서 작용하는 힘이 곧 정령이다. 이런 점에서 연금술사는 마술가라기보다는 정령과의 일치를 통해서 사물과 대화할 수 있는 보편적 언어를 가진 사람이다.
코엘료가 말하는 보편 언어는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상의 신비 안으로 들어가는 인식론적 통로와 비슷하다.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가 동물들과 대화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에서도 이 세상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그런 언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이나 사물과의 대화도 역시 가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도 기본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 포함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그런 보편 언어가 사라진 이유는 이 세상을 창조의 신비가 아니라 자신들의 편리한 삶을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레벨:4]New York

2006.08.26 09:48:22

Allow me to write in English. I've led to this site and your writing after reading your insightful critique of Pastor Lee Jea-Chul. I was happy and even relieved to meet such a high order of intelligence in Korean aside its subject matter. Thank you And I want to share a huge news with you who at least understand the question - the absence of "그런 보편 언어." I have discovered such a language and I do have a confidence in you that you'd have at least some understanding of how big a news that is when virtually everyone has to deal with his or her instinctive urge to struggle with the wrong shape of God. That is in the absence of "그런 보편 언어." You've moved to write this; thank you.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8.26 23:56:22

뉴욕 님,
반갑습니다.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비평을 좋게 읽으셨군요.
'보편언어'를 발견하셨다구요?
혹시 방언 같은 걸 염두에 두고 하는 말씀인가요?
제가 위에서 말한 건 어떤 구체적인 언어를 말한 게 아니었는데요.
오히려 시인들의 언어세계,
또는 미술가들의 그림세계 같은 걸 염두에 둔 겁니다.
물론 궁극적으로, 먼 미래에,
혹은 특별한 경우 현재에도
만물과 소통할 수 있는 어떤 영적 경험은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그건 그렇고,
뉴욕님은 한글을 이해는 하지만
쓰기는 영어가 편리한가 보네요.
말씀하고 싶은 게 있으면
조금 더 구체적을 해보세요.
좋은 주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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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8 08:22:00

창조의 신비?
모르지만, 창조의 역사가 절대 무에서 시작하여
절대무로 끝나는 것이 아닌지 궁금증이 생깁니다.
세상은 흑암도 없는 하나님의 수면위에 운행하신 것처럼,
이 세상의 종말도 하나님같이 아무것도 없는 것에 운행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혼자만의 엉뚱한 생각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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