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타자

조회 수 7362 추천 수 84 2006.09.04 23:35:51
절대타자

약간의 신학훈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절대타자”(totaliter aliter)라는 신학 용어를 둘러싼 현대신학의 논쟁 역사를 기억할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절대타자”로 규정하고 있는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접촉점”이 없다고 생각한 반면에 자연신학적 경향을 보인 에밀 브룬너는 접촉점을 인정했다. 바르트는 인간이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보는 칼빈의 개혁주의 전통에 근거해서 브룬너의 신학을 로마 가톨릭의 자연신학이라고 몰아붙였다. 브룬너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하나님 형상의 질료적 의미는 파괴되었지만 형상적 의미는 남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여지를 인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적 의미와 질료적 의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 개념에 의한 것이다. 이 형상(form)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 때의 형상(image)과는 다른 용어이다. 1930년대 중반에 크게 일어났던 이 논쟁은 별로 오래가지 않았다. 서로의 신학적 토대가 다르며, 또한 그들이 나름으로 고유한 신학적 경지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의 승패로 갈릴 수 없었다. 바르트는 주로 하나님의 계시론적 우월성을 강조했다면 브룬너는 인간의 인식론적 가능성을 강조했다. 우리도 어느 한편의 손을 들어줄 수는 없다. 대신 이 절대타자 개념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인식론적 근거를 완전히 배제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그것이 말하려는 신학적 실질을 찾아보려고 한다.
절대타자 개념을 소극적인 차원과 적극적인 차원으로 나누어 검토하는 게 이해하기 좋을 것 같다. 우선 소극적으로, 절대타자 개념은 기본적으로 우리의 존재유비(analogia entis)를 부정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 세상의 어떤 사물이나 형태와 유비적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가장 전형적인 예는 하나님에 대한 아버지 상(像)이다. 페미니스트들이 가장 격렬하게 비판하는 이런 가부장적 하나님 상이 곧 존재유비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 페미니스트들에 의해서 제시되는 어머니 상도 따지고 보면 이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 땅의 사물, 형태,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해명하려는 태도는 기본적으로 존재유비이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적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건 아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설명하셨다. 탕자의 비유, 포도원 주인의 비유, 가라지의 비유 등등, 예수님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성격에 관한 것이지  존재에 대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아버지의 사랑, 또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비유할 수는 있지만 존재론적으로 일치시킬 수는 없다는 말이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일관된 주장은 바로 이런 존재유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이다.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 신은 가시적인 형태, 예컨대 암소나 황소 형상으로 구체화된다. 이스라엘의 광야시절에 그들도 한번 금으로 된 송아지를 만든 적 있다. 그런 일로 인해서 그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했다. 가나안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근동의 모든 종교와 그 뒤의 모든 종교들은 신을 위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모든 신들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교회의 신인동성동형론도 내용적으로는 그와 비슷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신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은 신을 자신의 능력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존재유비의 유혹을 끊임없이 받는다. 자본주의도 역시 돈을 절대화한다는 점에서 이런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어쨌든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는 구약성서의 근본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존재를 이 땅의 것과 일치하려는 모든 종교적 욕망의 제거이다.
절대타자 개념의 적극적인 차원은 하나님 계시의 우선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우선적으로 작동할 때만 우리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 인간은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 전체를 바로 직면할 수 없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는 세계의 실체가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인식론적 범주 안에서만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에 불과하다. 마치 물속에 들어가 있는 물고기에게 물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에게 이 세상은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인간의 이런 실존적인 상황을 전제한다면 불가지론은 옳은 관점이다. 세계를 창조한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가지, 즉 절대타자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하나의 태도는 불가지론자들처럼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언어로 진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하나의 태도는 불가지의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교가 취하는 태도인데, 특히 바르트의 입장에서 강조된 것이다. 우리가 무슨 길을 통해서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역사에 참여했고, 그렇게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알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이기는 하지만 예수 사건을 우리가 아직 실체적으로 아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 사건은 아직 우리에게 오지 않은 종말을 향해 열려있다. 오늘 우리는 종말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절대타자인 하나님과 이 역사 안에서 이미 일어난 예수 사건과의 관계를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레벨:4]New York

2006.09.06 08:14:18

Hi, I wrote before saying that I've discovered "보편적 언어." I sent you "쪽지" last week. In any case, "보편적 언어" can and does meet the responsibility:"오늘 우리는 종말에 완전하게 드러나게 될 절대타자인 하나님과 이 역사 안에서 이미 일어난 예수 사건과의 관계를 해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You know how huge a news that is. "보편적 언어" in a sense that when Wisgenstein said, "All the problems are reduced to a language problem." I used to come to Korea often last year and met some people in Korea to discuss how to go about making the discovery public in Korea as I am publishing it here in the US. And I am very happy to find you and this site, I must say. Thank you.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9.07 23:51:19

뉴욕 님,
님이 발견했다는 보편 언어가 무언지 알고 싶군요.
보내준 쪽지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깊숙히 들어가려고 하니까
아무래도 언어가 문제군요.
뉴욕 님은 영어가 편하고 나는 한글이 편하니까요.
그냥 서로 그런 길을 가다가
기회가 있으면 만나서 차를 마시면 대충 해결이 되지 않을는지요.
내가 영어가 강하면 무언가 진도를 나갈 수 있을텐데, 안타깝군요.
어쨌든지 우리 다비아를 좋게 봐준 걸, 감사드립니다.

[레벨:4]New York

2006.09.08 07:10:27

제가 영어로 쓰는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첫째, 제가 지금 영어로 이 곳 미국에서 발표할 글을 쓰고 있기에 한국어로 글을 쓰면 리듬에 혼동이 올까봐 그런 것이고, 둘째, 지금 제가 영어로 몇 번 표현한 그 보편적 언어로 가능한 것들이 너무 엄청나서 영어로 쓰면 목사님이 그 충격(?)을 줄일 수 있으리라 생각되어서 그랬습니다. 한글로도 글을 씁니다. 어렵고 시인수준의 글은 영어가 더 효과적이라 영어로 씁니다. 제가 쪽지에 제 이메일 주소를 남겼습니다. 목사님 이메일 주소가 hanmail구좌라 제가 직접 보내면 안들어갑니다. 목사님이 저에게 이메일을 보내고 답장으로 보내야 들어갑니다. 목사님 이메일 기다리겠습니다. 그러면 이메일에서는 최대한도로 한글로 구체적으로 써보겠습니다. 목사님이 하시고 하시고자 하는 바를 느낄 만큼은 목사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러므로 목사님과 상당히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글을 읽으면서 참으로 같은 한국인과 기독교인으로 한국과 주님을 위해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감사합니다.

[레벨:11]권현주

2006.09.13 10:06:08

전체 내용을 모르는 가운데 짧은 글만 읽고 드는 생각이라 많이 조심스럽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우선성, 그리고 종말에 가서야 드러나게 될 하나님나라를 염두에 두면서
인간의 피조성, 소극적인 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기위하여
하나님을 절대타자로 표현하신 것 같은데,

"불가지의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우리가 그를 인식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교가 취하는 태도인데, 특히 바르트의 입장에서 강조된 것이다."

인용된 문장의 의미와
브룬너가 하나님의 형상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했을 때의 의미가 혹시
서로 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방식을
초월성과 역사내재성으로 강조해왔었는데 이런 관점이 절대타자개념과 양립가능한 것인지...
그리고 성령으로 존재하고있는 그래서 임재(omnipresent)하고있다고 하는 개념과는
절대타자개념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지...

그리고 전체는 아니더라도 일부만이라도 인식이 가능할 때,
절대타자라고 할 수 있는지...

순전히 초보자의 관점이긴 합니다만,
절대타자라고 표현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해명하는데 좀더 효과적인지...

궁금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9.13 23:24:22

권 선생,
바르트의 계시일원론적 입장과
브룬너의 자연신학적 입장이 서로 소통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핵심을 잘 짚은 겁니다.
신학과는 거리가 먼 영문학도가
간혹 신학생이나 목회자들보다 훨씬 빠르게 근본으로 다가갈 때가 있다는 사실을
권 선생에게서 확인하게 되는 군요.
절대타자라는 사실이 하나님을 우리가 전혀 인식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단지 우리의 인식론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하는 '피투적 존재'라는 말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인간은 세계에 던져졌기 때문에 세상을 대상으로 인식할 수 없어오.
내가 다른 데서도 말했듯이,
고기에게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는 현상과 비슷합니다.
하나님만이 절대타자가 아니라
세상 자체가 절대타자입니다.
우리는 결코 그것의 궁극적인 실체를 알 수 없는 거죠.
물론 여기서 세상을 무엇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말이 좀 복잡해지기는 하지요.
어쨌든지 전체적인 그림에서는 그렇다는 말이죠.
하나님은 계시하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계시에 반응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인식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은 종말에만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계시이면서 동시에 은혜를 안고 있어서
완전한 인식은 불가능하겠지요.
하나님의 계시에 우선권을 놓는다면 하나님은 절대타자이며,
그 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에 무게를 놓는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중점을 놓는가에 따라서 다를 뿐이지
근본적으로 다른 건 아닙니다.

[레벨:1]똑소리

2006.09.14 09:24:02

밑에서 일곱번째 줄
"계시이면서 동시에 은혜를 안고 있어서 "

혹시 <은폐>를 <은혜>로 잘못 기록하신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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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9.14 23:30:43

똑소리 님,
맞습니다.
대글의 오자까지 잡아주시니, 감사...
다음 화요일 모임에 참석하시나요?
웬만 하면 오세요.

[레벨:11]권현주

2006.09.16 11:07:51

목사님,

인간의 인식의 한계, 인정하지않을 수 없죠.

초신자인 제가 하나님을 이해하고있는 바를 말씀드려보죠.

하나님의 존재방식이
성령의 형태로 지금 여기에 있는데
예언자이거나 예민한 사람들은 그것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못느낀다는 식으로 이해하고있읍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명령하는 방식이 아니라 열린감각과 정신이 있는 사람들이
임재하고 있는 성령을 느끼고
그 깨달음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실천하는 방식이라고요.

이를테면 성서속의 예언자(Prophet)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고요.

그래서 크리스쳔들이 제각기 예언자(prophet)가 되어야하는 당위가 요구되는 것이기도하구요.

절대타자라고 표현해서 하나님의 속성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과

내부논리의 일관성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등등을 동시에 따져봄이 어떨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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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30 16:15:40

절대타자 (絶對他者 )?
생소한 단어라 사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철학> 인간이나 이 세계와는 절대적으로 다르며 독립된 초월적 존재자. 신과 인간 사이에는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가 있으며, 그 간격이 깊다고 본다.

혹시, 은폐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단어의 난이도가 높아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하나님의 절대성과 은폐된 하나님을 인간이 인식할수 있는가라고 생각해도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떨어진낙엽

2007.12.27 05:24:11

저의 무식함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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