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없다>?

조회 수 7870 추천 수 96 2006.09.25 12:08:21
지성수 목사님께,

몸살이라니요.
그것도 글쓰기때문이라니요.
죄송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냥 이렇게 말뿐이죠.
가까이 계시면 근사한 데서 한잔 살 텐데....
건강 조심하세요.
대글로 안부만 전하려다가
오강남 교수 건이 나와서 아무래도 약간 길어질 것 같아서
따로 칸을 잡았습니다.
오늘은 오랜 만에 늦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몸과 마음이 훨씬 상쾌합니다.
가을바람이 아파트 베란다를 통해서 들어오고,
그 베란다에는 햇살이 가득합니다.
지난 3월인가, 4월인가에 핀 난 꽃이 아직도 지지 않으니 웬일인지요.
아침을 빵과 커피로 먹고,
한바탕 집안 청소를 했습니다.
방 4개, 거실, 부엌으로 구성된 집인데,
저는 거실과 막내딸 방과 부엌의 청소를 맡았습니다.
나머지는 집사람이 합니다.
일주일에 2번 내지 3번 정도 합니다.
설거지는 집사람이 반, 내가 반을 합니다.
그렇지만 집사람이 바쁠 때는 내가 주로 합니다.
대학교 3년인 큰 딸은 설거지거리가 보여도 끄떡도 하지 않죠.
“지예야, 오늘 설거지 좀 해야겠다.” 하면
마지못해 하니까 아예 웬만하면 시키지 않습니다.
집안 청소래야 어질러놓은 것 정리하고,
분리수거 정리하고,
진공청소기로 미는 거죠.
사실 물걸레질도 해야하는데, 그건 좀 힘들어서 잘 안 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청소할 때마다 걸레를 빨아서 발로 밀었는데,
얼마 전에 집사람이 스팀 청소기를 사 왔기에
핑개낌에 “당신이 그거 다해.”하고 걸레질에서는 손을 놓았습니다.
집사람은 사 놓기만 했지만
내가 알기로는 한번 밖에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마누라 흉만 보고 있군요.
빨래야 세탁기가 있으니까 어렵지 않습니다.
너는 게 문제인데,
이것도 나와 집 사람이 반쯤 합니다.
바쁘지 않은 사람이 하는 거죠.
큰 빨래는 널기가 편한데,
양말은 양에 비해서 숫자가 많아서 시간이 좀 걸립니다.
그래도 이렇게 햇볕이 좋은날 빨래 널기를 기분이 좋습니다.
깨끗이 빨린 빨래의 냄새도 좋고,
그걸 탁탁 털 때의 기분이나,
빨래와 햇볕이 사랑을 나눌 것 같은 기분이 들 때
기분이 좋지요.
집안 청소를 말끔하게 끝내고
점심을 먹기 전에 짜투리 시간이 나서
이렇게 기분 좋게 컴퓨터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습니다.
이상하게 말이 옆으로 샜군요.

오강남 교수와 며칠을 함께 보내신 적이 있군요.
저도 한번 만나보고 싶은 분입니다.
몇 년 전 그의 <예수는 없다>를 읽었습니다.
옆에서 하두 읽어보라는 성화에 못 이겨 읽었습니다.
그런 책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빨리 읽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무슨 내용이기에 그렇게 대대적으로 광고를 했을까, 하는 궁금증으로
그 책을 읽었습니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다음에 다가오는 느낌은
“속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느낌을 설명하려면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네요.
별 것 아닌 걸 놓고
대단한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침소봉대!
오 교수가 다루고 있는 문제들은
지 목사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이미 신학에서 오래 전에 끝낸 문제들이거든요.
그런 것들을 흡사 남의 스캔들을 터뜨리듯이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에 그런 논의와 글쓰기가 종교학이라고 한다면,
이길용 박사도 종교학자이지만,
참 무의미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젠가 이런 문제를 이길용 박사와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도 나의 이런 생각에 전반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구미정 박사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긴 합니다.
나는 구 박사에게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를 그만 까요, 하고
반쯤 농담으로 말했습니다.
구약에 등장하는 아브라함, 다윗 같은 사람들에 대해서도
이쁘게 봐 주세요, 하고 말이죠.
이길용 박사나 구미정 박사나
제가 배울 게 많은 분들입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습니다.
그분들에 비해서 저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입니다.
마틴 루터가 비록 농민전쟁을 반대했지만
그 사람을 저는 아주 좋아합니다.
그의 가르침을 거의 그대로 인정하는 편입니다.
비록 이상하게 보이는 게 있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말한 것에 대해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기본적으로 나에 비해서 영적으로 훨씬 성숙한 사람이니까요.
바둑으로 치자면 그는 프로 9단인데,
나는 아마추어 1급 쯤 됩니다.
그러니 그가 한 마디 하면 내가 따라갈 수밖에요.
오강남 교수의 그 책에서 속았다는 느낌이 든 것은
그가 프로 9단의 생각을 기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면서
비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서와 신학이 말하는 중심을 놓치고 있습니다.
대신 곁가지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물고 늘어지는 것 같더군요.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 문제를 놓고
그게 신화다 뭐다 하면서 비판하는 건 무의한 일이에요.
신약성서에 나오는 기적적인 사건들에 대한 비난도 무의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이 세상을 이해하는 reality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이젠베르크의 양자역학을 물리학적 리얼리티로 생각하듯이,
그 당시는 그런 세계관이었지요.
자기들의 세계관으로 경험한 진리를 그런 방식으로 진술했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앞으로 1억년 후에 우리의 후손들은
지금 우리의 세계관을 미숙하다고 볼 겁니다.
이렇게 역사가 흘러가겠지요.
지금의 양자역학이 거짓말이 아니듯이
성서의 신화들도 거짓이 아닙니다.
문제는 해석이에요.
성서기자들은 자신들의 진리경험을 그렇게 진술한 것뿐이에요.
오늘 그걸 읽는 사람은 그들의 진리경험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신화다 뭐다 해서 근본자체를 무시한다면
모양이 좀 우습지요.
삼위일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교리가 플라톤에게서 왔기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설명하더군요.
초기 기독교 4-5세기의 신학자들이
궁극적인 문제를 그런 방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했다는 건
제가 보기에 최선이었습니다.
위에서 말한 동정녀 사건에 대해서 한 마디만 하지요.
그 신앙고백의 중심은 기본적으로 동정녀가 아니라
마리아에 있습니다.
예수의 역사적 실존을 확고하게 붙들려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예수는 없다>는 기독교 신앙의 근본과 신학의 현실을
깊이 알지 못한 채
교회에 현상하고 있는 문제들만 가볍게,
냉소적으로 건드리고 만 셈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대중들은 환호성을 올릴지 몰라도
학자의 외침으로는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 아닐까 생각되는군요.

이런 점에서 지금 내가 시도하고 있는 “설교비평”이라는 것도
위험성이 없지 않습니다.
비판의 대상이 되는 분들이 갖고 있는 신앙경험과 신학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
표면적으로 드러난 몇 가지 문제들을
그저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정도로,
선정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머문다면
무의하고 무책임한 일이겠지요.
또 하나의 염려스러운 일은
설교비평의 일반화입니다.
신자들이 너도나도 목사의 설교를 비평하기 시작하면
그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지 목사님,
건강 조심하십시오.
다비아 글쓰기 천천히 하셔도 좋습니다.
참고로,
다비안들을 위해서
몇 년 전에 쓴 글 중에서 <예수는 없다.>에 관련된 대목을
아래에 올립니다.
다비아 특강 메뉴 17번 “해석자로서의 설교자”의 일부입니다.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다비아에서 이 책을 중심으로 인터넷 좌담을 열어보면 어떨는지요.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
그런데 성서의 지평을 바르게 포착하지 못하고 단지 오늘의 목회 현장에 확대 재생산해낼 규범만 찾고 있는 근본주의자들만이 아니라 성서와 기독교의 역사를 단지 ‘종교사’의 차원에서만 접근하는 일종의 ‘종교다원주의자들’도 또 하나의 혼란을 야기한다. 이미 종교 다원주의는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왔는데, 이 자리에서는 그런 논란의 긴 줄기는 그만 두고 <예수는 없다>의 저자 오강남 교수의 주장만 간단하게 검토하겠다. 오강남 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필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철저하게 신화적인 신학과 세계관,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종교적 배타주의, 세속적 물량주의에 대해서는 아무리 큰 소리로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에 현상적으로 나타난 기독교 신앙의 왜곡을 교정하고 본질로 접근한다는 명분으로 기독교의 ‘근본’까지 훼손한다면 그것은 흡사 “이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우는”, 또는 “목욕물을 버리려다가 아기까지 버린” 꼴이 아닐까 염려스럽다. 예컨대 그는 타종교에 대한 기독교의 배타적인 태도를 고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까지 유보하고 있다. 그에게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신성을 훨씬 심층적으로 이해하고 체현한 인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우리를 구원할 자라기보다는 우리가 본받을 자에 불과하다. 결국 예수 부활의 역사성도 실종되고, 단지 초기 기독교인들의 마음에 예수의 가르침이 되살아난 것쯤으로 처리된다. 하나님의 역사가 철저하게 인간의 실존으로 떨어진 모습이다.  
종교학자 오강남의 종교사적인 접근은 교양인 기독교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만하고 나름으로 한국교회의 개혁에 일조를 할지 모르지만, 그가 기독교를 지나치게 표면적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심각한 한계다. 그가 대단한 것처럼 밝히고 있는 성서관, 기독론은 신학의 초보에 불과하다. 예컨대 동정녀 마리아를 문자적인 의미에서 믿는 기독교인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신학에서는 극복된 문제를 대단히 새로운 발견이나 되듯이 이렇게 침소봉대할 필요는 없었다. 본인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 <예수는 없다>는 자신의 형이나 누이에게 알아듣기 쉬운 말로 풀어 쓴 기독교 해설서라는 사실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깊이를 충분히 해석하지 못함으로써 기독교의 복음을 해체할 뿐이지 복음과 신학의 근본을 놓치고 있다. 그의 장황한 논리에 의하면 예수는 우리보다 빨리, 또는 좀더 깊이 하나님을 인식하고(頓悟) 살았던 사람에 불과하다. 과연 그럴까?
이런 예수상은 유대교의 주장과 비슷하다. 유대교 신학자인 마틴 부버(?)가 기독교 신학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면 예수 이후의 이 세상이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상하게 이 세상은 예수 이전이나 이후나 아무런 변화도 없다. 여전히 무죄한 사람들이 고난을 받고 폭력과 증오가 지배하고, 삶의 무의미가 우리를 감싸고 있다. 메시아가 왔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예수를 메시아로 믿으라는 말인가? 부버의 논리는 정당하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린다. 그들은 이 세상을 확실하게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메시아를, 그런 ‘유대인의 왕’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강남 교수도 역시 이 세상의 정치, 경제적 변화와 메시아 상을 일치시키고 있는 것일까? ‘지금, 여기’에서의 미션(misson)은 이 세상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변하도록 힘쓰는 것이라고 그는 힘주어 말한다. 그의 생각에 따른다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결국 ‘복지사회’ 건설과 다를 게 하나도 없게 된다. 이 세계를 조금씩 인간적으로, 생태학적으로 바꾸어나가는 꿈을 현실화하자는 말이다. 이런 꿈을 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익이나 좌익 이데올로기 모두 방식은 달랐지만 결국 이 사회의 변화를 추구했다. 교회 이기주의, 기독교 패권주의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필요하긴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새마을 운동’ 차원에서 일종의 개량적 도덕주의와 일치시키는 일은 기독교 영성을 기껏 도덕성 회복과 교회 민주화에서 확인하려다가 결국 그것을 놓치거나 훼손시키는 대중 설교자들의 행위와 다를 게 없다. 그래서 그런지 오강남 교수는 그 책에서 요즘 ‘뉴 라이트’ 운동의 선봉에 나서고 있는 김진홍 목사를 한껏 치켜세우고 있다. 물론 ‘뉴 라이트’ 운동은 <예수는 없다>와 시기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김진홍 목사가 옛날부터 부르짖었던 사회개혁론에는 기독교 영성을 천박하게 만들 요소가 놓여 있었다는 점에서 오강남 교수의 인식론적 한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오강남 교수는 “현각 스님의 책을 읽고 눈물 흘린 까닭은”이라는 제목의 글(부록1)에서 현각의 책 <만행: 하버드에서 화계사>와 현각의 행위를 매우 감동적으로 평하고 있었지만, 필자는 책광고와 그 제목에 끌려 그 책을 읽었다가 실망한 기억밖에 없다. 현각은 그 책에서 자기 깨달음의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는 게 아니라 단지 자기의 삶이 바뀌었다는 그 사실만 되풀이 하고 있었다. 흡사 짝사랑에 빠진 소녀가 자기 사랑의 내용과 깊이를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 남자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가출했다고 고백하는 정도였다.
필자는 여기서 오강남의 모든 주장을 냉소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그는 기독교라는 현상, 특히 한국 교회의 왜곡된 현상에 분노하느라 기독교와 역사적 교회의 심층을 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 현상적인 것을 통해서 근본까지 상대화하는, 또는 은폐시키는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결국 기독교 절대주의 못지않게 기독교 상대주의도 역시 ‘성서와 기독교 역사의 근본적인 지평’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매한가지인 것 같다.




이길용

2006.09.25 18:03:54

저는 오강남 교수를 종교학자로 보지 않습니다. 저 역시 "예수는 없다"를 읽고 참 허탈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리고 그런 분들이 하는 종교학을 종교학으로 알고있을 한국의 독자들이 매우 안타깝다는 생각이 마구 들었습니다.

역시 한국은 도사의 나라인가 봅니다 ㅡ.ㅡ;;

이길용

2006.09.25 19:42:57

아.. 그러고보니.. 한국에는 의외로 검증적 학문으로서 종교학을 하시는 분들이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의외로 종교학회에 가보면 정상적인 종교학 연구자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눈에 뜨입니다.
경험학문도 한국만 들어오면 이념지향적이 되어서그런 건가요?

이길용

2006.09.25 19:50:52

그리고 종교의 세계에 대해서는 전 지극히 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접근을 지지합니다. 그러기에 섵불리 이념지향적인 접근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제가 아는 지식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종교현상에 대한 구조와 그것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대한 일단의 해석기재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일 뿐.. 그것이 곧바로 종교체험과 경험에 대한 본질 분석, 혹은 본질획득을 장담해준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전 신앙이라는 차원에 대해서는 여전히 배움을 묻는 아이입니다. 그리고 아마 이 물음의 여정은 제 명이 다하는 날까지 이어갈 듯 합니다.

하여 지금도 저는 칠십을 훌쩍 넘으신 국졸 출신 내 어머니의 신앙에서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웁니다.

다만 기대하기는..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법이.. 그분들의 그 소중한 경험을 훼손하지 않고.. 제대로 정리, 서술, 묘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레벨:7]늘오늘

2006.09.26 14:25:38

세 번째 댓글을 기쁜 마음으로 지지합니다. ^^

[레벨:1]정세웅

2006.10.03 17:40:14

이길용박사님, 멋있는 말입니다.
"제가 고민하고 있는 문법이 그분들의 그 소중한 경험을 훼손하지 않고.. 제대로 정리, 서술, 묘사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저와는 다른 편에 계신 것 같지만, 이 말의 결론에 대해서는 동지군요.

이길용

2006.10.03 18:42:40

다른 편이라 하시는 것은 어떤 편이시온지?

[레벨:1]정세웅

2006.10.03 20:12:37

어렵게 들으셨나 보네요.. 그런 것은 아닌데...
학문과 신앙체험을 구분하는 듯 해서요...(잘못 알고 있다면,,, 그냥 박사님의 글들의 뉘앙스가 그래서)
그게 의외로 무서운 폭력이 될 때가 많아서요..

이길용

2006.10.03 23:45:58

아.. 제가 그렇게 보이셨군요^^;;
profile

[레벨:13]토토

2007.03.31 16:00:13

동정녀가 아니었나요? 전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ㅠㅠ ................

[레벨:11]QED

2007.04.08 21:21:31

PSTM님 재미있는 영화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snatch라는 브레드 피트가 나오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주 무자비한 갱영화라 다 보실 필요는 없구요. 아마 앞의 한 5분 정도만 보시면 재미있는 유대교 랍비들의 대화가 있습니다. 그 장면에 귀하가 생각하시는 내용에 대한 답변이 코믹하게 묘사되어 나옵니다.

물론 그걸 믿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적어도 그 문제로 신앙의 향배가 달라지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그냥 쉽게 자유할 수 있는 개그를 보신다고 생각하세요.

[레벨:0]이반

2007.08.14 12:35:21

성경 기록 방식은 사실에 바탕한 의미를 기록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점에서 동정녀를 통한 아기 예수의 탄생이나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이란 사건,
모두 사실에 바탕한 기록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의 눈치를 보아가며
사실보다 의미가 더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이나 의미보다 사실이 더 중요하다는 식의 주장은 좀 못마땅합니다.
이들 주장들은 성경 비평 기준이 성경 기록 당시인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기준합니다.

이 사실은 과거가 현재보다 더 미개했다는 전제를 깝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미개한 시대에 산다고 여겨진 철학자들이 오늘의 철학자들보다 더 미련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의 철학은 그때의 철학의 덕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과학적 이론도 10년이면 무너집니다.
그런 이론으로 과거를 논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결국 인간의 일들은 늘 상대적입니다.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적인 것을 평하려는 자세는 곤란합니다.

그리고 이들 주장들은 기독교 성경을 다른 종교의 경전과 같은 류에서 흠있는 책으로 봅니다.
그러나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인간 저자의 약점을 카바하면서도 인간의 인격과 교육등등을 무시하지 않고
그들의 삶과 인격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게 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주장은 우리 스스로 성경의 진정한 저자인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 저자가 산 문화와 역사를 배경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그 시대의 문화와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가르침 즉 의미를 교회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가르침이 항상 변하는 시대를 통해 다양하게 표현됨을 보입니다.
이 점에서 사실과 의미는 모두 동일하게 성경에서 중요합니다.

성경 인간 저자가 다른 종교의 경전 저자들처럼 잘못할 수 있는 사람이므로
마찬 가지로 기독교 성경도 그럴 것이다라는 주장은
진정한 성경의 저자인 하나님의 초월성과 전능성을 무시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신앙의 근거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자신을 파괴하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이 필사되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인간 해석자의 잘못과 실수가 개입될 수 있습니다.

이를 감안하며 기독교 교회는 성경 해석과 결과인 주석이나 설교를 놓고 건전한 비평을 유도합니다.
성경 진리는 영원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인간과 그 결과는 불완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카도릭 교회만 이것을 막습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교회가 영원한 진리를 말하는 성경보다 더 우위를 점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역사가 보여 주듯이
잘못된 해석과 그에 따른 신앙 전통이 한 동안 교회와 신자의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독교나 성경 자체가 공격을 받는 것은 곤란합니다.
항상 사물 그대로 인식할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인간 신학자의 잘못입니다.

인간의 이런 약점을 잘 아는 개혁주의자들은 개혁 교회는 날마다 개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목회자는 사이비와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마리아의 잉태나 그리고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관한 기록은
인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증거하기 위한 기록입니다.
사복음서는 이런 목적으로 기록됩니다.

하나님의 전능성과 초월성및 내재성을 믿을 수 있다면
이들 사건들이 역사에 바탕한 것임을 충분히 믿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문자주의 신앙이라고 말한다면 우리 스스로 기독교 신앙 자체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이에 바탕한 신앙을 주술적이라고 보면 안됩니다.

가르침을 위해 사실을 이야기처럼 만들었다는 주장보다 더 우스운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게 주장하면 어디까지 성경의 역사성을 믿고 믿지 않느냐하는 판단 문제가 야기됩니다.

입으로는 하나님과 부활 주님이 만유의 주라고 주장하면서도
그의 역사 개입과 섭리를 믿지 못하는 모순을 우리 스스로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보로 취급하는 행위입니다.

성경의 초월성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이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거듭난 이성은 초월성을 믿고 압니다.

그리고 참 믿음은 이성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기독인의 이성은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을 확실히 믿습니다.

기독교 성경이 사실에 바탕한 의미를 철저히 말한다는 주장을 쉽게 비판하며 허물지 맙시다!!!
즉 기독교 성경이 말하는 신학은 철저히 역사에 바탕한다는 사실을 쉽게 무너트리지 맙시다!!!

[레벨:1]인봉

2008.08.20 14:13:09

정 목사님, 이쯤에서 간략하게 중간 정리를 합니다.
여러가지로 바쁘실텐데 제가 목사님을 방해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처음 목사님을 만난 것은 <방언>에 대한 글을 뉴스엔조이에서 봤을 때입니다.
그 때 한참 성경읽기에 심취해 있을 때인데, 주변에 어느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해 할 때였지요. 그런데 목사님의 방언에 대한 글을 읽고 처음으로 제 마음에 숨쉴 구멍을 찾았다고나 할까? 도움을 많이 얻었지요.
그리고 솔나무님을 만나 여기에 들어오기까지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래봐야 몇 개월이지만 제게는 몇 년에 해당되는 시간이었을 겁니다.

지금은 목사님의 글을 거슬러 올라가며 읽고 있으니 시간 측면에서는 거꾸로 가는 것이지요.
성질이 급하여 마음이 땡기는 곳에 흔적을 남깁니다만, 가벼운 터치였지요. 그렇다고 무슨 정답이 있겠습니까? 성격이겠지요.

오늘 읽은 이 글은 저와 개인적으로 많이 일치하는 것 같아서 흡족합니다.
<예수는 없다>를 읽지는 못했지만 제목만 봐도 별로 내키지 않는 제목인데요?
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답니다.

'구약'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실까?
그동안 제가 읽으며 상고해 놓고 묵상을 해온 많은 주제들 중, 확인해 보고 싶은 그래서 제가 방향을 잡아가는데 도움을 구하는 방향타 콜입니다.
모두가 구약도 사랑이라고만 합니다.
그런데 전 사랑보다 아픔이었지요. 그래서 실제로 많이 아팠답니다. 처음 읽는데 도저히 더 읽을 수 없었을 때, 그 나머지를 읽을 수 있었던 힘은 목사님에게 물었던 "구약에서 하나님의 손붙이심을 입은 자들이 무작위 착출이냐? 계획된 착출이냐?" 에 대한 답변이 "무작위 착출"이었답니다.
여기서 저는 힘을 내어 한번 읽었지요. 그리고는 신약을 분명히 깨달을 때까지 반복해서 읽자, 그 후에 구약은 다시 생각하자 였지요. 그리고 신약을 계속해서 십여차례 반복했지요.
짧은 시간이지만 저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다 교회 안에 좋지 못한 일이 생겼고 그 일로 저의 끝없는 질문으로 목사님과 운영위원들의 허망한 자존심 싸움에 저의 성경공부에 대한 첫 시험을 받는 단위에 세워졌으며 저도 다수결이나 심정적 동정심에 타협할 수 없는 어려움으로 시험보면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하나씩 확인해가는 놀라운 은총을 받았답니다.

너무 길어지면 안될 것 같은데...
결론은 제가 믿어야 하는 당위는 신약의 복음의 메세지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구약은 여전히 제게 아픔입니다. 나중에 언젠가 바뀔지 모르겠으나 아직까지 아픔입니다.
그것이 설교를 하고 교회를 이끌어가시는 목사님들에게는 다를 지 몰라도 제겐 아픔이 틀림없어요.
그래서 청소년부 교사인 집사님에게 그런 적도 있지요.
그 학교공부도 해야하고 돈도 벌어야 하는 학생들에게 그 어렵고 예수가 와서 다 없앴다고 하는 율법을 애들과 씨름하느라 애쓰는 시간이면 즐겁게 복음의 이야기만 해도 부족한 시간을 구약에 쓰느냐고, 나 같으면 그런 구약이 있다고 너희도 나중에 커서 시간이 나면 따로 공부하라고 하면서 복음 안에서 함께 놀겠다고요. ㅎㅎㅎ 재미있지 않으세요?
그 때도 저 혼자만 재미있고 그 말을 듣는 사람들- 목사님, 사모님, 그 교사 등-은 아무 말도 안하고 그냥 심각하게 듣기만 하더라고요? 초신자가 마구 내뱉는 말이 거슬렸을까요?
지금도 그럴려나?

성경에 신약의 증거로 쓰려고 붙여논 구약을 신약과 동일하게 똑같이 마구 쓴다면, 예수가 뭐하러 그렇게 어렵게 와서 힘들게 죽어가면서까지 보여주고 간 이유가 뭐겠는가?
제 생각입니다.
그런 예수를 믿는다면서 왜 그렇게 구약에 집착을 할까?
누군가의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쓰라고 붙여놓은 것이라면 모를까... 그럴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 정말 말할 수 없는 이유가 신학대학에서는 서로 말하면서 거룩하다며 성도들만 모르게 짜고 치는 이상한 놀이는 아니겠지? 싶었답니다.

정목사님의 크리어한 답변을 들으면 안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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