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1)

조회 수 8295 추천 수 116 2006.10.02 23:44:24
방언(1)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언어로 드리는 기도를 방언이라고 한다. 한쪽에서는 이런 방언을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은사로 생각하는 반면에 다른 한쪽에서는 공연한 일이라고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과연 방언, 무엇이 문제인가? 여기에 관련된 몇 가지 논점을 정리해보자.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 분명한 경험으로 자리하고 있는 방언 현상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한 소리이다. 이런 이상한 소리로 나타나는 방언은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 신앙생활을 하던 경주감리교회에서는 중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방언을 제법 많이들 했다. 학생회장이었던 필자도 그들 틈에 끼어서 방언을 하려고 노력을 했지만 방언이 막 터지려는 그 순간에 절제하고 말았다. 왜냐하면 혀가 안으로 말려들면서 나오는 그런 소리라는 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부흥강사는 방언을 가르쳐준다고 하면서, 할렐루야를 수백 번 반복적으로 외치게 했다. 물론 교회 중강단에 무릎 꿇고 엎드려 다른 사람들과 같이 할렐루야를 외쳐대기도 했다. 내가 보기에 인간의 내면세계에서 우러나오는 열정과 그걸 소리로 만들어내야 할 구강기능이 그걸 따라가지 못할 경우에 이상한 소리가 나온다. 그런 게 가장 일반적인 방언 현상이다.
또 하나의 다른 방언 현상은 외국어로 터지는 기도이다. 이건 내가 직접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어쨌든 전해들은 말로는, 당사자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독일어, 일본어, 심지어 러시아어로 기도를 드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고 한다면 심층심리학의 도움이나 언어학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다. 이와 비슷한 신비한 일들은 우리 주변에서 얼마든지 흔하게 일어난다.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정확하게는 그런 설들이 있으며, 예수가 십자가에서 당한 고난의 스티그마가 직접 몸에 나타나는 이들도 있고, 마리아의 현현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외국어로 나타나는 방언이라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기독교적인 은사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방언이 생물학이나 심층심리학의 도움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가 그것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고린도 교회에도 방언이 있었으며, 바울도 그런 경험이 많았고, 사도행전이 보도하는 예루살렘 원시 공동체에서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방언 현상이 크게 일어났다는 건 분명하다. 도대체 방언에 관한 성서의 보도는 무엇을 말하는가?
일단 구약은 접어두어야 한다. 구약에서 사용되는 방언이라는 낱말은 지방의 토속 언어라는 의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약 중에서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가 이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데, 사도행전보다는 고린도전서가 우리의 논의에서 훨씬 더 유용하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 공동체의 초기 역사를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의 특별한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있는 문서이기 때문에 방언에 대한 보도의 역사적 진정성을 확보하기가 힘들다. 이에 비해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직접 진술한 내용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방언에 대해 언급한다. 특히 14장에서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다. 아마 그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런 신비한 현상들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된 것 같다. 바울이 거기서 말하려는 요점은 모든 은사가 교회의 덕을 위해서 행사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방언은 주로 여자 신자들에게서 자주 나타난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34절에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고 지침을 주었다. 오늘날 우리가 듣기에 낯 뜨거운 가르침이지만, 이것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고린도교회의 신비주의적 경향이 심각했다는 의미이다. 그것의 가장 큰 원인은 방언하는 여자들에게 있었다.
우리가 조금 꼼꼼히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의 문맥을 검토하면 바울이 방언 현상을 억제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방언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이 양적으로도 많다. “너희도 혀로써 알아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다.”(9절) 그리고 바울은 예언이 방언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을 누누이 강조하면서 이렇게 명시적으로 지적했다.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19절) 또한 그는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하지 말라고 했다.(28절)
바울이 결론 부분에서 예언도 사모하고, 방언도 금하지 말라고 충고했다는(39절) 점에서 방언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즉 바울이 방언을 허용했을까? 이건 그렇게 중요한 사안이 아니다. 그는 지금 방언 현상을 가타부타 말하려는 게 아니라 소극적인 입장에서 고린도 교회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다. 바울의 강조점은 방언이 신앙의 본질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의 덕을 심하게 훼손할 개연성이 높다는 사실에 대한 경계이다.
한국교회는 왜 구약성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 신약성서도 아주 일부에서만, 그것도 소극적으로, 실제로는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방언을, 더구나 예수는 전혀 언급하지도 않으신 방언을 그렇게 중요한 신앙 경험으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왜곡이다. 바울의 말을 빌려서 이렇게 결론을 내리자. 통역의 은사가 없으면 방언을 하지 마시라. 방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은 골방에서 혼자 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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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박진수

2006.10.03 06:41:37

중고등부시절 저를 비롯한 몇명빼고 수십명의 학생들이 거의 모두가 방언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토록 뜨겁게 방언하던 사람중 지금도 신앙을 가진 사람은 10분의 1정도? 주변에 예길 들어보아도 거의 비슷한 대답들이 나오더군요. 참 지금 저는 매일 엄청난 방언을 듣고 있습니다. 두돌된 아들의 구강기능을 넘어선 언어의열정!!!!

[레벨:0]잔칫집가는길

2006.10.10 22:31:30

전체적으로 방언에 대한 목사님의 생각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방언의 현상들이 기독적 은사가 아닌것으로도 나타나기 때문에
방언에 큰 관심을 갖지 말자는 말은 잘못된것 같습니다.

만약 방언외의 기도나 성서연구등이 타 종교나 일반적 현상으로 나타난다고해서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방언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성경을 통해 또 성도들을 통해
방언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지,
또 그것으로 우리가 선하게 누릴수 있는 측면은 없는지
이런 것들을 해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주변에서 방언에 대한 명확한 그 무엇인가를 전해 듣기가 참 어렵습니다.
또 방언이라는 현상을 이용해서 사리사욕을 채우는 인간들도 참 많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볼 때 방언에 대한 최소한의 성경적 해명이 있고
그것을 통한 유익이 증명이 되어야 방언을 오용하는 것도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저도 방언으로 가끔 기도하지만 여전히 모르겠어요..
혹시나 하고 여기 저기 기웃거려보고 방언의 대가(?)라는 분께 강의를 들었어도...
요즘 드는 생각은 방언은 남에게 물어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뭔가 잡힐때까지 계속 체험해보는 것밖에는 없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방언에 대해 선한 방향으로 많은 비밀들이 벗겨지기를 기대해봅니다..

[레벨:0]두지랑

2006.10.19 01:33:09

방언은 성령의 은사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저도 방언에 대한 경계심이 앞서는 사람입니다)

성령의 열매로 방언을 말하며 장래일을 예언하며 환자를 치유하거나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들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지는 이적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지금 이시간에도 기도원에 가면 말기 암환자들이 기도중에 기적처럼 치유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체험하기위해 밤잠을 자지않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도 귀신들린 자들과 불치병 환자들을 낫게하는 이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적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몇년 후 다시 죽을 몸뚱아리, 다시 썩어질 육체일뿐이죠.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마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표적으로 믿음의 확정이나 구원의 확신을 얻거나 스스로에 대한 신앙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된다면 이는 신앙의 본질에 접근해 있는 중요한 사건이 되겠지요.

방언과 같은 신비로운 체험은 지극히 주관적이며 비밀한 체험을 통하여 객관적 리얼리티에 접근하게되는 참으로 은혜로운 선물이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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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10.19 07:59:28

방언은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특수한 현상이겠지요.
제가 위의 글에서 지적했듯이
성서가 그것에 대해서 큰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하고,
다룬다고 하더라도 매우 소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성서와 2천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신앙 현상들은
아주 구체적이고 다양한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전체 기독교의 중심과 연결되어야만 합니다.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이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지 모르겠지만
부분적인 현상 자체가 독립적으로 진리를 독점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방언은 그것 자체로 어떤 기독교적 정당성을 획득한다기보다는
전체 신앙의 틀에서 아주 소극적으로, 부분적으로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현재 나타나는 신앙 현상에 대해서
전체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분야가 조직신학이랍니다.
이런 점에서 평신도들도 조직신학 공부가 필요하지 않을는지요.

[레벨:0]두지랑

2006.10.19 13:55:07

방언 그 자체는 개별적 특수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간과해서 안될 점은 방언은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방언을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는 분명한 영적인 작용이며 인간의 주관적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기에 보편화하기도 어렵다고 보여집니다.
방언의 중요성이나 강조점이 약하게 표현되는 것은 그것이 중요하지않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부작용과 폐단이 더 크기 때문이 아닐까 저나름으로 생각해보았습니다.

성령의 임재와 성령의 체험을 미약하게나마 드러낼 수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방언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보이지않는 것의 증거며, 소망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의지이며, 사랑은 줄 수 없는 것을 주고자하는 마음이라고 할 때, 이렇게 알 수 없는 것들을 깨달아 알게하는 것은 영적 작용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니 내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됨을 고백할 수 있게됨은 오직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자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성경을 제대로 읽는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성경전체가 비밀한 영적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판단되어집니다.

성령에 대한 영적 쎈스를 개발한다는 것은 퇴화된 신체기능을 되살리는 일과 같다고나 할까요?
성령의 깨달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신비주의나 사이비 소리를 듣게되겠지요.

[레벨:0]paul777

2007.06.26 06:54:20

방언을 성령충만의 한 증거로 보고 있습니다. 방언을 하면 성령을 받은 것으로 본다는 것이지요 물론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방언을 사모하며 받기를 구하고 받아야 성령충만으로 보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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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6.26 09:37:52

바울777 님,
방언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모릅니다.
그냥 고린도교회를 중심으로 나타났던 작은 카리스마 중의 하나로만 알고 있지요.
처음이신가요?
반갑습니다.
주의 은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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