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성령 받았어?

조회 수 8764 추천 수 112 2006.10.22 18:39:14
당신, 성령 받았어?

요즘 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신앙의 주제는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스도교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활동에서 나타나는 현실들이다. 앨리스터 맥그래스는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기독교 영성은 진정으로 의미 있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에 대한 탐구이며, 기독교의 근본적인 개념들을 함께 묶어주어 삶과 연관시키는 것으로 기독교 신앙의 범위와 규범 안에서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 경험이다.”(기독교 영성 베이직, 대한기독교서회, 15 쪽)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총체적 경험이 영성이라고 한다면 영성을 말할 때 인간에 대한 질문을 제외할 수는 없다. 그 인간을 창조한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존재 양식에 대한 초기 그리스도교의 정통교리인 삼위일체도 역시 영성과 연관된다. 그뿐만 아니라 영성은 교회 공동체를 꾸려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과 연관되기 때문에 교회론에 관한 논의도 역시 필요하며, 그것의 역사적 과정을 검토하기 위해서 교회사에 대한 공부도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세례와 성만찬 영성을 다루지 않고 영성을 논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충분하게 다룰 수는 없다. 다만 성령과의 관계에서만 이를 정리하자. 우리의 영적인 삶은 늘 영적인 힘으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성령에 의해서만 창조적으로 영위된다는 점에서 우리의 영성과 성령은 불가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할 목사의 영성에서는 이 성령 체험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받아 기록된 말씀을 다시 풀어낸다는 것은 곧 영적인 활동이기 때문이다. 목사는 늘 이럴 질문 앞에 자신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당신, 성령 받았어?” 나는 성령 받은 설교자일까? 아니면 무늬만 성령 받은 사람일까? 아니면 성령이 누구인지에 대해서조차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설교자는 아닐까? 오늘 나는 성령을 받았는지 아닌지, 그 체험이 분명한지 아닌지 진솔하게 고백해야 한다. 우선 성령을 “받는다.”는 말의 타당성 여부부터 물어야겠다.

성령 받아라!
간혹 우리 주변에는 소위 ‘성령집회’라는 모임도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모임이 어떤 성격인지는 내가 직접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옛날에 내가 참석했던 부흥회를 연상하면 대충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특히 은사 중심의 부흥회 말이다. 어떤 부흥강사는 청중들을 향해서 “성령 받아라!”하고 외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고함을 칠 뿐만 아니라 “쉿, 쉿” 하는 바람소리 같은 소리까지 냈다. 이에 뒤질세라 청중들은 흡사 날아오는 럭비공을 가슴으로 받는 운동선수처럼 두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아멘!”으로 맞장구를 쳤다. 이런 열광적인 상태에서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하고, 입신도 하며, 진동도 한다. 강단의 십자가로부터 큰 불덩이가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와서 불을 태우는 것 같은 경험도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안수를 하기도 한다.
성령을 “받는다.”는 말은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자동차나 컴퓨터처럼 우리가 마음대로 다루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기를 받는다.”는 동양 전통의 세계관이며, 다른 하나는 성령을 받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성서의 보도이다. 여기서 조금 더 실천적인 이유를 한 가지 더 든다면, 교회의 신앙생활에 나타나는 은사중심의 현상들이다. 동양 전통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여기서 언급하지 말자. 그리고 우리 글쓰기의 중심이 산만해질 염려가 있으니까 교회생활에 나타나는 전반적인 현상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말고, 성서의 보도만 조금 따라가기로 하자. 신앙 논의에서 성서보다 더 중요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에 관한 성서의 수많은 보도를 종합적으로 다룰 수도 없다. 성령의 책이라고 일컬어지는 사도행전의 몇 대목만 검토하는 것으로 만족하자.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사도행전 초반부에 이미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진술함으로써 사도행전의 전체적인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2장은 그 유명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이후 예루살렘 공동체는 세상을 향해서 역동적인 태도를 보인다. 베드로가 고넬로 집에서 설교하자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내렸다.(행 10:44) 바울이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19:2) 그들은 성령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단지 세례 요한의 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19:6,7) 위의 인용에서 우리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 주체가 바로 성령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성령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극복해주는 시금석이며, 세례요한 공동체를 넘어설 수 있는 토대이기도 했다. 특별히 19장의 진술을 근거로 본다면 성령은 분명히 “받는” 것이며, 안수를 통해서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성령을 받았다는 가장 분명한 흔적은 방언이었다.
사도행전의 저자가 이런 보도를 통해서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런 보도를 어떻게 해석해야할까? 이게 바로 성서 텍스트에 직면한 설교자들이 붙들고 씨름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다. 해석은 무슨 해석이냐, 보도된 말씀 그대로 믿으면 되는 거 아니냐, 하고 주장할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성서의 해석학적 요청에 대해서 깊이 들어가지 말자. 우리는 성서가 2천 년 전에 기록된 문서라는 사실만이라도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도 그런 시간적인 차이를 아무런 해석학적 도움 없이 극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질문하자. 누가는 왜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물었으며, 성령이 흡사 안수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처럼,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방언인 것처럼 진술하고 있을까?
사도행전의 저자인 누가에게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의 사실성 여부는 그렇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원후 80년대에 활동한 누가에게는 그에 대한 확실한 정보도 별로 없었다. 이런 건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와 바울의 이방인 선교 활동을 역사에 남겨야겠다고 생각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누가의 관심은 사도 바울의 헬라 선교가 바로 성령의 활동이었으며,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정통성을 확보한 사도 중의 사도라는 사실에 대한 변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이런 집필 목적에 따라서 교회전승과 개인적인 정보를 적절하게 편집하고, 때로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사도행전을 기록했다. 그렇다면 사도행전은 아무런 신앙적 토대도 없는 문서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다. 고대인들은 장애인의 치유, 초자연적 현상, 방언 같은 것들을 매우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사도행전에 등장한다고 해서 사도행전의 무게가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런 보도와 진술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해석이 필요할 뿐이다.
결국 사도행전이 보도하고 있는 성령에 관한 묘사는 그것자체로 받아들여지는 게 아니라 다른 성서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리고 신학 전반과의 관계를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처한 삶의 자리에 한정되는 게 아니라 성서 전체와 연관되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행전은 바울을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 최소한 한 세대 이후에, 근본적으로는 바울을 직접 만나보지 못한 사람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사도행전이 묘사하고 있는 바울의 신학과 바울의 편지에 드러난 신학 사이에 차이가 보일 때 우리는 바울의 편지에 무게를 두는 게 옳을 것이며, 더 나아가서 바울의 편지도 역시 성서 전체와 연관해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영과 바람
“당신, 성령 받았어?”에 대한 중간 대답을 일단 내려야겠다. 나는 성령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여기서 성령을 “받았다.”는 진술은 흡사 조수미 콘서트 입장권을 받았다는 말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성령을 받으라는 성서의 표현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콘서트 입장권은 내 지갑에 잘 간직하기만 하면 그대로 보존되지만 성령은 그렇게 간직해서 보존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권은 내가 기분 나쁘면 찢어버린다거나 시간이 안 나는 경우에 남에게 줄 수도 있지만 성령은 아예 그런 영역과는 다른 차원이다.
내가 방언에 대해서 조금 부정적인 뉘앙스로 언급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이런 은사들을 소유의 차원에서만 받아들이고, 결과적으로 성령 역시 그런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위험성을 경고하려는 것이었다. 근본적으로만 본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두가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사실 언어는 기본적으로 신비한 언어 체험인 방언이다. 하나님에게 기도를 드린다는 행위는 세상에서 볼 때 분명히 방언이며, 사랑의 언어로 기도하고 찬송을 부른다는 것도 역시 경쟁과 폭력의 질서에서 보면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모든 제각각의 언어들이 폐기되고 오직 성령의 본질인 사랑이 우리를 사로잡게 될 것이다. 그 이전의 시간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방언의 본질을 가능한 대로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방언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던 성령은 우리가 소유하거나 처리할 수 있는 사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과 관계 맺는 존재방식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러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바로 사도신경에 그대로 고백되어 있다. “성령을 믿사오며!” 그렇다.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이시지 우리가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이런 성령의 특성은 곧 인격성으로 고백된다. 하나님의 인격, 예수의 인격, 그리고 성령의 인격이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다. 여기서 인격이라는 말은 조금 어색하기는 하다. 자칫 이런 용어로 인해서 신인동성동형론에 빠질 염려가 있을지 모르겠다. 인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위격이나 신격이라고 표현하는 훨씬 적합하다. 성령의 인격은 무슨 의미인가? 크게 보면 이것은 두 가지 의미이다.
하나는 성령은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서 활동한다는 뜻이다. 앞에서 콘서트의 입장권은 단지 하나의 사물로 내 지갑 속에 들어 있을 뿐이지 나와 인격적인 관계로 소통되는 게 아니다. 입장권은 콘서트 날까지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어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은 늘 나와 영적인 관계를 맺는다. 생명의 관계를 맺는다. 만약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마음을 닫아둔다면 그 즉시 성령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한다. 다른 하나는 성령이 주체적으로 활동한다는 뜻이다. 입장권은 내 지갑 속에서 수동적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은 주체적으로 작용하지 주체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은 내 의지를 넘어서는 인격이시다. 그는 바로 창조의 영이시며, 종말의 영이시다.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깊이 하는 인격이 바로 성령이시다. 그런 분을 내가 소유할 수 있을까? 그런 분을 내가 감이 “받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바람처럼 임의로 부는 영을 내가 무슨 수로 계량하고 처리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는 성령을 받았다.”는 위의 진술은 무슨 뜻인가? 내 언어의 한계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그런 말로 표현했을 뿐이지 실제로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여러 은사 중에서 몇 가지가 내 삶에서 부분적으로 나타난다는 말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성령에 관한 성서적, 신학적 설명을 알아들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이렇게 고쳐야겠다. 나는 성령의 활동을 맛보았다. 또는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 내가 성령을 받아서 소유하게는 게 아니라 그의 생명활동에 내가 기대있을 뿐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성령과의 관계에서 나는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루아흐’가 바람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나는 하나님의 영과 바람을 소유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을 맞을 뿐이다. 이런 의미를 밑에 깔고 말해도 된다면, 나는 성령을 받은 사람이다.
위의 설명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성령을 받았든지, 아니면 성령에 참여하든지 여기서 우리에게 제기되는 또 하나의 본질적인 문제는 영의 활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성서는 이에 대해서 매우 여러 종류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구약성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은 인간이 창조될 때 인간 몸 안에 들어왔으며,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도 특별한 방식으로 그들을 도왔고,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카리스마를 제공하고, 인간의 생사여탈권을 갖고 있으며, 젊은이들로 하여금 환상을 보게 한다. 신약성서에 따르면 성령은 교회의 기초이며, 보혜사로서 진리의 영이고, 그리스도교 공동체에게 은사를 주시는 분이시다. 성령에 관한 성서의 매우 다양한 진술에서 공통되는 내용은 곧 ‘생명’이다. 영은 곧 생명의 영이시다. 우리가 영을 받았다는 말은 생명을 받았다는 뜻이며, 이미 생명을 살고 있는 우리는 이런 점에서 모두가 성령을 받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질문은 다시 한 번 더 발전한다. 생명이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담지 못하는 성령론과 영성학은 무의미하다. 생명의 영인 성령과의 소통을 놓치고 싶지 않은 설교자라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화두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며, 하나님이 유지하시고, 하나님이 완성하실 그 생명이, 그리고 예수의 부활에서 선취된 그 생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올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지평을 심화, 확대시켜야 한다.
성령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에 대한 증언인 성서를 해석하고 전달해야 할 설교자들은 청중들을 생명의 신비 안으로 안내하는 사람이다. 안내자는 그 세계를 먼저 잘 알아야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생명의 신비는 한번 구경한 것으로 모든 걸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으로 모든 게 해결되는 게 아니다. 성령에 이끌림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은 관광 가이드처럼 한번 주어진 관광 안내서에만 의존하거나 거기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관광지는 1년 뒤에 가도 그래도 남아있지만 생명의 신비는 다음 날이면 어제와 전혀 달라지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한 마디 하는 것으로 이 글을 끝내자. 내가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이에 근거해서 내가 설교자로 나서는 이유는 생명 자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신비라는 사실을 조금 먼저 인식하고 있기 때문일 뿐이다.

profile

[레벨:4]이상훈

2006.10.22 20:04:06

정 목사님, 건강하신지요? 좋은 말씀...잘 읽었습니다...따로 인쇄해서 곱씹어보면서 생각해볼만한 좋은 글 같아서 제 블로그에 퍼갑니다. http://blog.naver.com/myelvina

[레벨:4]봄볕

2006.11.13 11:59:47

저역시 퍼갑니다. http://blog.naver.com/altar0921

breathe

2007.01.04 09:24:07

안녕하세요, 인사는 처음 드리고 댓글은 두번째로 답니다.^^
우선 좋은 글, 만난 글 읽을 수 있는 것에 하나님과 정용섭 목사님께(호칭도 제겐 모호해서 윗분을 따라 목사님으로) 감사드리며 인사도 함께 드립니다.

저도 성령체험을 했는데요, 성령은 뜻풀이로서도 바람이기 때문에 소유할 수 없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의 성령체험으로 봤을 때 성령은 문자적 성경적 전승적 하나님을 말씀을 토대로 알다가 또는 믿다가
영성 한 가운데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을 보거나(욥이 보는 것처럼)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본 글을 읽는 동안 언뜻 성령을 표현하기에 한 마디로 할 수 없음에 따른 급급함을 느꼈는데요.
언뜻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처럼 열중하여 글을 쓰고 있는데 집 안방에서 누군가
거실로 나오며 '당신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대' 라는 말을 듣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면 어떨까, 생각을 했습니다.
당연히 충격이 있겠지요.

저는 무늬만 크리스찬이었는지는 꽤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50대 접었는데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를
다녔으니까요. 하지만 성령체험을 한 후로는 마치 예수를 처음 안 사람처럼 되더군요. 예를들어서
삶과 사고가 전체적으로 변해버립니다. 급격히 변화 되더군요. 성령체험은 한 순간에 끝나는 것도
아니었고 한번 받은 것으로 ...마치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처럼 고스란히 보관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영성 깊숙히 젖어, 기도를 사모하게 되다보니 새벽기도 발걸음은 늘 즐겁고, 거리에 풀 한 포기,
거리에 지나가시는 노인 한 사람, 눈에 보여지는 사람 사람들 모두 불쌍하게 보이더군요.

그 사모함에 끌리는 것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게 되더군요.(마치 간증처럼 되었습니다만)
(그래서 호흡조절을 잠시 합니다.^^)

그런데 성경말씀에 기록 되었듯이... 모든 은사와 하나님을 체험한 일들에는 '믿음'에 따라 하나님이
행하신 영적교감이라고 했는데요, 때로는 기도가 대화 하듯이 할 때도 있습니다. 성령 받은 후
제 경우에는 하나님의 마음을 느끼게 해주더군요. 성령께서 인도하심이라고 하는데 불현듯
예언까지 무의식적으로 했던 경험도 있습니다. 교회의 불의한 일들을 (전도사와 사모의 다툼 등등) 놓고
기도하는 중에 (당시의 교회는 통성기도를 주로 했습니다) 당사자들이 들을까 염려되어 기도를
거부하다가 혀가 이상하게 되면서 방언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들로 인해 욕먹을 하나님을 애통해
하다가 나는 그동안 얼마나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는가까지 돌아보게 되니 당연히 눈물 콧물 기도를
하게 되겠지요.

성령받은 후 나타나는 많은 증상들이 있습니다만,
자기 안에서 혁명이 일어난다고 보시면 됩니다. 회개와 감사와 ...
성령을 체험하면 사람이 또라이가 되거나 완전히 다르게 변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 묵상하다가 받은 은혜와는 조금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수많은 체험들을 여기 모두 놓을 수 없는 관계로 이만 줄일까 하는데요, 성령을 받으면 죄가 그 곳에
거하지 못하더라는 것과, 하나님의 동행을 느끼기도 하지만 조그만 죄라도 지었을 때는 하나님 임재가
끊어짐도 체험합니다. 바로 회개하고 내 생각과 구습들, 내 삶을 통째로 하나님께 조정하게 됩니다.
아무튼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이십니다.
모든 분들이 모든 교인들이...모든 가족이 성령체험을 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시기를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아차,
성령받았다고 해서 손에 낀 반지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소멸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4 01:11:11

신약은 성령 충만(in, full)과 성령 충일(upon, be filled with)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 밖에 없었지만 신약에서는 요한복음과 모든 서신서가 성령 충만(in, full)을 말하고 있고 유독 사도행전만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은 사역의 영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사역을 위해서 받아도 되고 안 받아도 되지만 성령 충만(in, full)은 민든 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받아야 됩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대천득 신부님이 지으신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 받았는가"란 책을 꼭 사서 보십시오. 목회자들이 꼭 한 번은 보아야 할 책이라고 평신도가 과감히 권합니다.
자 다시 성령받았느냐에 대해 살펴 봅시다.
사도행전 1장 8절과 19장 6절은 성령충일(upon, be filled with)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위에 성령이 임하는 것은 일시적입니다. 그래서 breathe 님이 손에 낀 반지처럼 가만히 있지 않고 소멸되기도 한다고 한 것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충만하여 라고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속된 말로 "오야 마음대로"입니다. 은사는 주었다 빼었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받았다는 단어를 바울이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일은 은사의 영입니다.
그러나 성령 충만(in, full) 즉 우리 안에 들어와 충만하여 넘쳐 흐르는 생수의 강이신 성령님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이 성령님은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 안에 생명의 영으로 들어 오신 성령님이십니다. 생명의 영(롬 8:2)이시지요. 이 성령의 충만은 우리의 생명 안에서의 성장과 성숙을 위한 영입니다. 그러니 주었다 빼었다 할 수 없는 믿는 이 안에 언제나 거하는(abide: 요 15:4) 성령님이시지요.

싸이먼

2007.06.15 14:03:28

성령받아야한다고.. 성령받았냐고 누가 물어볼 때마다 위축되는 분위기였는데..(음미 기죽어..ㅠ.ㅠ)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니 위로가됩니다.. 알고보니.. 저도 성령받은 사람이군요..
성령님께서 저를 통해 일하시고.. 성령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을 느끼고.. 거기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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