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2)

조회 수 6451 추천 수 93 2006.10.30 23:33:06
방언(2)

필자는 앞의 글 “방언 (1)”에서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고전 14:28)라는 바울의 명시적 언급에 기대서 통역 없는 방언은 교회의 공적인 모임에서 지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실제로 방언을 통역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은 간단히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신비한 언어의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끼리 서로 소통되는 길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흡사 무당들의 접신과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의 예를 들겠다. 우리 교회에 만으로 두 살이 갓 넘은 예은이라는 여자 아이가 있는데, 요즘 어린이 집에 다니면서 새로운 말을 많이 배우는 모양이다. 교회에서도 말을 많이 한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그 아이의 엄마는 거의 정확하게 알아듣는다. 예은이 엄마가 예은이의 통역사 노릇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예은이와 함께 하는 생활을 통해서 비슷한 발음만 들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방언 통역도 역시, 내가 직접 그런 현상을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런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어쨌든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방언과 통역의 신학적, 혹은 신앙적, 더 나아가서 선교적 의미는 매우 크다. 우선 방언 행위가 그것이다.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발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방언이라고 한다면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그 진술은 근본적으로 방언이다. 사도신경만 보더라도 그렇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이라는 말은 이 세상에서 방언이나 마찬가지로 들릴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말도 역시 방언이다. 빵과 포도주를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먹고 마신다는 성만찬의 신앙도 역시 방언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과 모든 행위는 이 세상에서 신비한 방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 언어의 신비를 모두 상실해버리고 말았다. 신비가 사라진 예배와 설교가 바로 그것의 단적인 증거이다. 오늘의 예배는 청중들의 종교적 감수성을 만족시키는 데만 도구적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설교는 세상살이의 요령을 전하는 일에만 작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생명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는 신앙언어들이 단지 설교자들의 말장난으로 떨어져 버렸다. 오늘의 설교자들은 성서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지시하고 있는, 또는 존재론적으로 담고 있는 그 궁극적인 세계를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매튜 폭스는 히브리어 “다바르”를 단지 “말씀”이라고 번역하는 것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했다. 다바르가 이렇게 의사소통 수단으로 격하되면 원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폭스에 의하면 다바르는 말씀이 아니라 “창조능력”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창조가 하나님의 다바르에 의해서 일어났다는 창세기의 진술이 이에 대한 증거이다. 요한복음의 “로고스”도 역시 말씀이라기보다는 창조능력으로 번역되는 게 옳을지 모르겠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언어는 그것자체로 궁극적인 의미를 확보하고 있는 게 아니라 창조능력과의 연관성 안에서만 그 능력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언어는 창조의 신비를 열어주는 문이며, 길이어야 한다.
오늘 교회의 언어는 이런 능력을 하루빨리 회복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신자유주의 시대에서 경쟁력을 제고하는 언어만을 발전시키겠지만 그리스도교는 비록 이들에게 방언처럼 들릴지 몰라도 창조능력과 창조신비를 열어내는 언어를 진술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생산과 소비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언어에 머물겠지만 그리스도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담지하고 있는 생명의 언어들을 발설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에게 낯설 수밖에 없는 우리의 언어는 결국 방언이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대로 방언은 통역되어야 한다. 우리가 말하는 바실레이아 투 데우(하나님의 나라)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통역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와 종말은 통역되어야 한다. 이 통역이 곧 신학이고 설교이다. 문제는 오늘 설교자들이 이런 신앙 용어를 통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통역할 생각도 아예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그런 신앙 언어를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서로 알아듣게 대화하지도 못한다. 이런 현상은 통역자 없는 방언행위처럼 말씀의 위반이다. 청중들은 물론이지만 설교자들도 신앙 언어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알려고 노력한다면 그나마 새로워질 가능성이 있지만 모른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이 고쳐질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들이 무엇을 모르는지에 대해서는 여기서 일일이 거론하지 않겠다. 죄 숙명주의, 도덕주의, 이원론적 세계관, 기복적인 가치관, 성공주의 등등, 교회 안에서 작동되고 있는 이런 가르침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생산해해는 신앙의 왜곡이다. 그들은 방언하듯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전하고 있을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런 방언에 매료될 수도 있고, 실제로 서로 통하는 게 있을지 모르지만 훨씬 많은 사람들은 그것 때문에 오히려 소외될 것이다.
바울의 가르침을 다시 확인하자. 방언은 통역되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는 침묵해야 한다. 거꾸로 세상에서 방언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내용들은 진리론적 토대에서 번역, 통역, 해석되어야 한다. 우리 한국교회는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았을까? 골방에 모여서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자신들끼리 방언에 심취하는 공동체인가, 아니면 신비로운 신앙적 언어를 보편적인 지평에서 과감하게 통역하는, 세상과 역사를 향해 개방된 공동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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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10.30 23:43:28

방언에 관한 신학단상은 앞으로 1회 더 게재될 예정입니다.
언어라는 게 기독교 신앙에서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레벨:8]김인범

2006.10.31 12:10:26

설교자가 설교하는 가장 핵심적 목적을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공부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하겠구요.
설교하면서 느끼는 많은 안타까움 중에 가장 심각한것이
바로 이 언어의 문제였는데
지금 우리가 쓰는 언어로 표현해야 하면서도
그 언어로만은 그 뜻이 전달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많이 왜곡된 단어들을 통해서는 뜻이 전달될 수 없는
그 안타까움이 다시 그 의미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간을 쓸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분명하게 정리되는군요.
설교는 일종의 통역이어야 한다는 것으로요.
반대적 개념도 적용되겠군요.

'골방에 모여서 통역하는 사람도 없이 자신들끼리 방언에 심취하는 공동체'
저도 여기서는 예외가 아닌 것 같군요.

'신비로운 신앙적 언어를 보편적인 지평에서 과감하게 통역하는, 세상과 역사를 향해 개방된 공동체'

새로운 눈 뜸에 감사드립니다.

[레벨:0]두지랑

2006.11.07 00:00:00

방언의 통역에 대하여.

신학적 해석이나 설교가 방언의 통역이라고 하시는 목사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제게는 방언으로 들립니다.

신비로운 신앙적 언어는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며 알수 없는 말씀의 뜻(의미)는 인간의 언어적 해석을 초월하는 개별적 삶의 구체적 생명현상을 통하여 구현되어진다고 저는 믿고있습니다.

말(씀)은 speaker(발주인)에게서 listener(수주인)에게로 그 뜻(의미)가 이전되어지는 것을 본질적 속성으로 합니다. 방언은 특수한 개별적 행위이기는 하지만 그 의미는 일반적 언어의 특성을 포괄할 뿐 아니라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방언이라는 특별한 언어행위는 인간의 자의적이고 주관적 의지를 뛰어넘는 주관자의 선택에 따른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되며 이는 하나님이 선택하신자를 행한 구원과 같은 방식이 아닐까 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주어진 뜻이 있으며 뜻은 주인을 찿습니다.
말씀은 행위를 요구하는 것도 있고 깨달음을 주는 것도 있습니다. 말씀은 그 주인의 뜻과 의지의 표현물이며 그 완전한 의미를 안다는 것도 결코 쉽지않으며 그 주인을 알지못하고서야 받아들이는 것 조차도 어렵겠지요. 말씀은 그 내재적 의미로 누구의 것인지 주인을 찿을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고 수많은 선지자들이 천사나 성령님을 통하여 말씀을 받은 것과 같이 오늘도 동일하게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선포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발상이겠지요.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 아닙니까?
말씀을 통하여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며 말씀의 화신되신 예수님을 알고 또 그 역사적 삶을 통해 드러내신 뜻을 바로 알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 아니겠습니까? 오늘 이 하루에도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받기도 하고 또 성취하는 역사가 기독신앙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또한 세상을 행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전도하는 행위 그 자체가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이라고 믿고있습니다.

깨닿지 못하는 말씀의 의미를 캔다는 것도 해석학에서는 중요하겠지요.

말씀과 그 의미의 개별적 특수성이 어떻게 일반적 보편성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주인을 찿지 못하고 헤메이는 말씀들이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입술을 통하여 샘처럼 솟아나는 것이 방언이 아닐까하고 저는 생각해보았습니다.

[레벨:7]늘오늘

2006.11.07 04:08:26

방언은 특별한 말 그래서 뛰어난 말이라기보다는,
다급하고 미숙한 그래서 불완전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말을 알아듣거나, 그 말을 섞어 쓰면서 통변하는 현장.
거기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경책과 위로, 통회와 안심.
나를 향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확신이 달콤하지만,
그것은 과연 의지할 만한 말씀일까요.

하나님의 말씀하심으로까지 격상된 방언,
그리하여 미신으로 전락하는 기독교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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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9]유니스

2008.08.20 18:48:29

방언이라는 주제의 글들에서 개인적으로는 좀 안타까움이 생깁니다.

'경험'자들에게는 '신학'의 중요성을 알 기회가 없거나,
'신학'자들에게는 '경험'을 규명할 언어가 부족하여 서로를 인정하지않는 건가요?

주안에서 다이나믹하게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목사님께서 말미에 말씀하신
'세상에서 방언일 수밖에 없는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 있으면서
또한 이 글에서 다루는 두부류에 속하느라 이중적인 통역이 필요합니다..ㅡㅡ;;

개인적으로 '방언'에 대하여는-
너무 어렵고 낯설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 부모의 인도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는 정도로
성령의 젠틀함에 맡기신다면...
성경에 있는 '방언'을 확대해석할 것도 축소할 것도 없다고 생각해요.

신학에 대하여는....
저는 배운 바가 없지만 오늘의 이 글이 신학적인 글이 아니겠습니까?
정목사님의 설교비평 1권과 3권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역시...배워야하는구나...라는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세상학문의 필요에만 젖어있다가 이런 것이 있구나 라는 생각 해보았죠.
곁길로 나가지만 '조직신학'의 필요성을 정목사님께서 강조하시는 대목에서
평신도인 저로서는 '갈 길이 진짜로 더 멀어지는구나..' 라는 한숨.
언제 '조직진학'책 한번 볼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설교비평'..책 정말 멋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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