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세(來世) (1)

조회 수 7537 추천 수 132 2007.01.02 23:59:09
내세(來世) (1)

얼마 전에 미국 교포한 분이 필자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목사님은 내세를 믿습니까?” 국제전화로 자세한 이야기를 전할 수 없어서 일단 “믿지요.” 하는 대답을 했는데, 아무래도 이에 대한 보충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대개의 그리스도인들이 내세에 대해서 가끔 설교도 듣고, 또는 직접 천당을 경험했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접하거나 간증을 담은 책자들을 보았기 때문에 내세가 있긴 있는가보다 하고 생각하면서도 내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대답하라고 하면 대개는 주일학교 어린이처럼 죽어서 가는 천당이라고 대답하거나 우물쭈물하고 말 것이다. 생각이 단순한 사람들은 무조건 믿고 넘어가겠지만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심각한 갈등을 겪는다. 그들은 대개 이런 갈등을 그냥 묻어두거나, 아니면 그리스도교 신앙을 떠나기도 한다. 도대체 내세는 있는가?
일단 성서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내세는 분명한 현실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하는 주기도도 역시 내세와 연결된다.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묘사도(계 21:1 이하) 우리의 내세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단서이다. 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내세 신앙이 아니면 결코 납득될 수 없는 교리이다. 내세 신앙의 가장 결정적인 토대는 부활신앙이다.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부활 신앙에서 살았던 바울은 이 세상에서 자신이 성취한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길 수 있었다.
내세 신앙은 위에서 제시한 성서적, 신학적 관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얽혀 살고 있는 이 삶에 대한 경험으로부터도 요청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과 다음 세상에서 만나지 못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가족이 먼저 세상을 떠났을 때 내세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면 그 슬픔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그것만이 아니다. 만약 내세가 없다면 오늘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이, 특히 이웃과 하나님을 위한 고난이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흑인 영가의 노랫말과 멜로디에서 우리가 경험하듯이 비록 오늘의 삶이 고달프다고 하더라도 내세에서 누리게 될 행복한 삶을 기대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 그것이 비록 순교의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버텨낼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내세를 제거한다면 모든 내용이 부실해진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내세에 대한 희망을 내세주의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현세와 내세의 이원론적 구분으로 인해서 그리스도인들이 현세에 대한 책임감으로부터 도피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성서의 내세와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오늘 이 땅에서 참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정의 실현, 민주화, 생태적 마인드, 남녀평등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이다. 그들은 피안이 아니라 철저하게 차안에 그리스도교적 신앙의 토대를 놓으려고 한다. 이에 대한 성서적 증언들도 적지 않다. 구약성서에는 대체적으로 내세에 대한 표상이 없으며, 예수도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제자들 안에 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예수는 저 세상에 가서 처소를 마련하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이 땅에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의 내세가 결정될 하나님 나라는 저 세상이면서 동시에 이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설명은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 한 마디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이 문제가 우리의 믿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내세가 있는 것으로 믿는다.” 하고 대답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다른 가르침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렇게 궁극적인 문제는 그렇게 단답식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광장에 모여서 “믿습니다.” 하고 고함을 친다고 해서 그게 진리가 되는 건 아니다. 답답하더라도 그런 질문 안에 들어있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씩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
우리는 내세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해서 질문하기에 앞서 세계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그런 게 전제되지 않은 채 벌어지는 내세에 대한 논란은 무의미하다. 현재의 이 세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다음 세상을 말한다는 건 언어도단이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내세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현세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생각하라고 충고하겠다. 현세에 어떤 생명의 힘들이 작용하고 있는지, 여기에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세에 대한 관심이 전혀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니다. 현세를 아는 사람은 현세의 생명이 안고 있는 한계와 허무를 알게 되며, 따라서 내세에 우리가 참여하게 될 궁극적인 생명을 기다리게 된다. 그 생명은 현세의 생명이 생물학적으로 연장되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화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모른다고 해서 답답하게 생각할 건 없다.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죽음에서 살리셔서 부활의 첫 열매로 삼으신 것처럼 그는 우리에게 죽음이 침범할 수 없는 생명을 덧입혀주실 것이다. 씨앗이 꽃으로 변하듯이 내세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는 그런 생명이 가득한 세계이리라. 우리가 내세에 대해서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우로

2007.01.03 00:25:37

정선생님, 항상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조금은 엉뚱한 말일지 모르겠지만, 주일학교에서 어린이들에게 성서와 교리를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레벨:1]박상열

2007.01.03 21:20:30

세상을 떠나게 될때,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변화 되게 될지 정말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정목사님!!!
늘 진솔한 말씀 해석과 깊이 있는 신학을 통해 '하나님과 땅'을 알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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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1.03 23:36:16

박상열 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궁금, 기대..."라는 말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 영성이 본질입니다.
그리고 가능한대로 그 안에 내용을 담아야겠지요.
그렇습니다.
내세까지 포함한 모든 세상은 신비입니다.
그런 세상이 밝혀지는 날 우리는
동굴 안에서 살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의 그런 충격을 받게 될 겁니다.

[레벨:1]팔색조

2007.01.06 10:47:00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궁금, 기대..."라는 말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게 바로 기독교 영성의 본질입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
아니, 기독교 영성만이 아니라 참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구도자들의 마음과 정신이 그러하지 않을까 생각되는군요. 드러나있는 현상에 고정되어 있는 시야가 그 한계 너머의 그 무엇을 포함하는 전체성으로 확장될 때, 목사님 말씀처럼 '동굴 안에서 살다가 밖으로 나왔을 때의 그런 충격'을 받게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이 나를 참된 나되게 할 것이고(목사님 말씀처럼 질적인 변환?), 참된 나되었을 때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그 궁금증과 기대감이 그분을 따르는 구도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레벨:11]권현주

2007.01.06 16:55:33

내세에 까지는 관심을 가질 여력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관심 밖에 두었었는데,
요즘은 뭔가 저의 내용적인 부분, 체화라고 표현될 듯한,
세포 하나하나에 각인되어가는
그런 내면화의 어떤 과정을 겪고있는 것 같읍니다.

이젠 내세에 대해서도 관심의 문을 닫지는 않아야할 것 같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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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민욱

2007.01.07 17:35:36

말씀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어떻게 개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제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 있을까요?
사건들에 대해 큐티같이 은혜받는 차원에서 머무르는 것(그게 정확한지도 모르는 상태로)으로 족해야 할까요?
그 말씀이,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한 실제적인 통찰력을 의미하는 것인지, 역사의 큰 흐름에 대한 믿음의 고백(?)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알려주세요~

[레벨:7]늘오늘

2007.01.07 18:20:06

강릉에 살았는데, 고개 하나만 넘으면 경포대였다는데,
제가 바다를 본 것은 서른 무렵에서의 일입니다.
광주에 살았는데, 무등산에 올라본 경험이 없다가,
오랜 후 영광에서 일하던 어느 날에야 무등산을 올랐죠.
서울에 살고 있는데, 63빌딩 구경 아직 못했습니다.
제주도 구경은, 지리산 산행은,,, 언제 해볼런지.

그렇지만, 천국과 지옥은 나름 경험한 듯 싶구요.
내세라,,,

지금의 요지경 세상을 눈 크게 뜨고 경험하면서,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못 느끼면 이상하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야,
다음 세상에서 할 얘깃거리도 풍성해지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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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1.07 19:01:18

김민욱 군,
좋은 질문을 하셨소이다.
"하나님의 은총... "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나,
또는 그것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나, 하는 질문에 대해서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소이다.
이는 흡사 인간이 뭐냐, 하나님이 누구냐, 사랑이 무언가, 생명이 뭐냐, 등등,
이런 질문처럼 우리에게 열린 질문일 뿐이지
아무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그것에 우리의 마음을 열어야 한다는 의미였소.
그냥 마음을 열기만 하면 된다는 말도 아니오.
구체적인 노력, 혹은 공부가 필요하오.
이미 성서가 그런 은총에 대해서 많은 것을 보도하고 있고,
우리가 이 세상을 조금 열린 눈으로 바라본다면
거기서도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거요.
예컨대 우리는 성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신앙의 신비,
즉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신앙의 신비를
배울 수 있소.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왜 은총인지를 아는 게 중요하오.
그건 단지 세례 받을 때 교리문답하는 것으로 끝난 게 아니라
오늘 현재에도 우리 샆에서 실존적으로 다가오는 사건이란 말이오.
이 세계 안에 내가 지금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는 통로가 될 수 있소.
은총이 어디 이런 것만이겠소.
우리의 영성이 가 닿을 수 있는 만큼
우리는 그의 은총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을 거요.
이 문제는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특수은총과 자연의 보편은총이라는 구도로만
접근해서도 안 되오.
그런 게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 될 수 있는지
그걸 우리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중이오.
그걸 누가 지금 온전히 다 밝혀낼 수 있겠소.
모차르트가 음악의 모든 걸 다 밝혀내지 못했듯이
어떤 신학자도 여기서는 예외가 없소.
다만 모차르트가 우리에게 놀라운 음악의 세계를 경험하게 해 주었듯이
좋은 신학자와 영성가들은 우리에게 그런 일을 해 줄거요.
그 다음 세대의 신학자와 설교자와 영성가들은
그 앞선 세대를 뛰어넘어
훨씬 심층적인 은총의 세계를 풀어내 줄 수 있소.
준비가 되었다면 말이오.
대답이 되었소?
아직도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은총, 그의 계시, 그의 통치에
우리가 직면하기 위해서
신학공부를 철저하게 해야하고,
교회 공동체에 깊이 참여해야하고,
이 세상과 역사를 뚫어볼 수 있어야 하고,
사람에 대한 연대감을 경험하고 등등,
많은 공부가 필요하지 않겠소?
물론 기도와 예배와 성서읽기와 예전과 교회력도
모두 여기에 포함되는 공부요.
더구나 우리는 겸손하게 자기를 배우는 연습도 필요하오.
자신의 신앙경험마저 상대화할 필요가 있소.
필요가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그렇게 해야하오.
신앙의 작은 경험과 정보를 잣대로
은총의 근원인 성령을 재단하는 것보다 더 큰 어리석음을 없소.
그렇다고 그렇게 기가 죽을 거는 없소.
공부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영적인 귀를 열수만 있다면 영은 우리를 돕지 않겠소?
문제는 우리가 교만하다는 거요.
우리가 너무 확신에 차 있다는 거요.
삶의 연륜이 깊어지면 질수록 그걸 허물어내야 하는데,
거꾸로 자기 확신이 강해진다는 게
하나님의 은총에 다가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는지.
두서가 없었소.
앞으로 신학의 여정에 성령의 도우심이 함께 하기를 바라겠소.
profile

[레벨:8]김민욱

2007.01.07 22:36:44

감사합니다. 교수님~ ^^

외람된(?) 말씀이지만, 목사님의 많은 답변과 글들, 메시지들을 읽을 때,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것, 즉, 자기 확신을 경계함, 영적인 귀를 열고자 노력함, 심층적인 세계로의 여행,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놀라움. 등 스스로가 말씀하신 것에 대해 부단히 노력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알고자 할 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 한 모델을 삼을 수 있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기원해주신대로, 지금 제 처지에 할 수 있는 좋은 방법,
즉, 이곳 다비아에 있는 고급 신학정보(?)를 잘 배우고, 기회되는 대로 귀를 기울이고....주님의 은총과 일치하는 삶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영성의 닻을 올려 저 깊은 은혜의 바다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샤마임

2007.01.13 01:57:45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세...기독교의 내세는 정말 천당 지옥은 아닌거 같은데요...교회에서 간증하는 걸 볼 때나 설교시간에 갈등과 고민에 싸일 때가 많아요...그 때가 되어봐야 알겠죠...

[레벨:23]브니엘남

2007.02.13 00:42:55

요한복음 14장 3절의 거처가 바로 새 하늘과 새땅의 새 예루살렘, 즉 내세를 말하고 있는 걸까요.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자이십니다(롬 4:17). 모든 것을 말씀으로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니 거처를 에비하러 가신다고 할 때의 거처는 새 예루살렘이 아니고 14장 전체의 문맥을 보건데 '사람의 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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