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삼위일체인가?

조회 수 7195 추천 수 56 2005.05.05 23:31:59
왜 삼위일체인가?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신론인데도 불구하고 교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이 용어가 성서에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간혹 근본주의적 성서관을 따르는 분들 중에는 창조 설화에 묘사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진술을 삼위일체의 근거라고 주장한다.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 1:26). 마태복음에도 이런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진술이 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마 28:19,20). 창세기의 진술이나 마태복음의 진술은 아직 삼위일체론이 기독교 신학에서 충분하게 인식되기 이전의 것들이기 때문에 삼위일체를 집적 가리키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다. 신구약성서에 삼위일체론을 암시하는 진술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삼위일체’라는 용어나 그 개념을 직접 거론하는 텍스트는 한 군데도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어떤 구체적인 신앙생활의 실천이나 성서 텍스트보다는 순전히 신학적 사유에 근거한 개념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삼위일체 교리만 유독 신학적 개념과 연관된다고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다른 도그마에 비해서 그런 성격이 도드라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기독교 신앙의 요약이라 할 수 있는 사도신경도 창조자 하나님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성령을 언급하고 있긴 하지만 단지 각각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뿐이지 삼위일체 개념에서 중요한 세 위격의 관계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처럼 사도신경마저 삼위일체론을 명시적으로 언급하거나 해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국 삼위일체론이 사변적 신학의 요청으로 인한 결과였다는 의미이다.
결국 교회 현장에서 소홀하게 다루어지는 삼위일체 개념은 충분한 신학적 훈련이 없으면 따라잡기 힘들다는 말이 된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인 사물을 경험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는 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르겠다. 간혹 한 인격체가 가정에서 남편의 역할을, 회사에서 직원의 역할을, 교회에서 집사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일종의 역할론으로 삼위일체를 설명하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이런 유비의 방식으로는 충분하게 해명될 수 없다. 조금 신학적인 방식으로 이 용어를 서술한다면 삼위일체 개념은 하나님이 위격으로는 셋으로 구분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이다. 아버지의 인격과 아들의 인격과 영의 인격이 각각 다르다는 말은 일단 크게 어려운 것 같지는 않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전능한 인격이며, 예수는 역사 안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던 우리와 똑같은 인격이며, 영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는 힘으로서의 인격이다. 그러나 이런 세 인격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여기서 인격과 본질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예수는 무슨 이유로 공생애 중에 이런 삼위일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 삼위일체론에 의하면 기독교의 신론은 유일신론이 아니라 삼신론에 가깝다는 말일까? 야훼 하나님은 오직 한 분 하나님인데, 아들과 성령도 하나님이라고 한다면 서로 모순 되는 주장이 아닐까?
삼위일체론에 관한 질문은 거의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포괄적으로 다루기 위해서 두 가지 문제로 집중해보자. 첫째, 삼위일체론은 일자무식의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기독교의 복음으로서는 무의미한 것은 아닐까? 사실 삼위일체만 이해하기 힘든 게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교리는 단순성과 복잡성이라는 양면성이 있다. 예컨대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말은 아주 간단한 교리이지만 과연 믿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매우 복잡해진다. 구원이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 구원의 심층적 의미에서 전개되는 사안들을 알아들을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예수의 설교는 바리새인들의 가르침과 달리 모든 사람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너무 어려워서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불평이 나올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복음이 지나치게 현학적이어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혹은 단지 지성적으로 접근하게 만드는 것도 문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지나치게 단순한 형식논리에 빠져서 신자들의 신앙을 주술화하거나 편이주의에 치우치게 하는 것도 문제이다. 단순성과 복잡성이 적절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만 기독교 교리가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삼위일체는 복음을 훼손하거나 복음의 근본과 무관한 게 아니라 복음의 의미를 심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신학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둘째, 이런 불가해한 교리가 교회 안으로 들어온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우리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가 처음부터, 혹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게 아니라 주변 세계와의 대화 가운데서 ‘변증적’ 필요에 따라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에 관한 정체성을 해명하기 위해서 ‘참된 신이며, 참된 인간’이라는 기독론이 발생했듯이 삼위일체도 역시 유대교와 동일한 야훼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들이 부정한 역사적 인물인 예수를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신학적으로 해명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말이다. 특히 교부들이 신플라토니즘과의 만남에서 이런 삼위일체에 관한 신학적 착상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학의 고유한 활동이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신학은 기독교가 진리라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보편적 학문과의 대화를 진지하고 신중하게 이끌어야 한다. 이런 작업에 투철했던 교부들 덕분에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인식론적 틀에서 훨씬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이길용

2005.05.08 09:20:47

Das trinitarische Bekenntis wurzelt in der Christologie. Ohne Christologie wäre es zu einem trinitarischen Bekenntis nicht gekommen. Nur im Zuge trinitarischen Denkens konnte die Begegnung mit Jesus, dem Christus, als das erfaßt werden, was sie war. Aus der Bewegung mit Jesus als dem Christus erwuchs das trinitarische Bekenntins mit innerer Notwendigkeit.

Das Bekenntins zu Jesus aks dem Christus hat sich nicht vor dem Hintergrund eines abstrakten philosophischen Gottesbegriffs entfaltet, sondern sehr konkret im Kontext des Glaubens Israels, ohne den Gestalt und Botschaft Jesu ja auch gar nicht verständlihc wären.

Die Grundaussage des trinitarische Bekenntnisses lautet: Der dreieine Gott verwirklicht sich mit dem Ziel, als Schöpfer, Erlöser und Vollender heilvolle Beziehung zu gewähren, dies will die Rede von "heilsökonomisch" verstandener Trinität zum Ausdruck bringen. Welche Beziehungsverhältnisse zwischen Gott dem Vater, Jesus Christus und dem Hiligen Geist statthaben, möchte die Rede von "immanent" gedachter Trinität formulieren, entzieht sich aber dem Zugriff spekulativen theologischen Nachdenke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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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5.05.09 00:01:30

웬 독일어 문장이 우리를 놀라게 하는군요.
삼위일체론 개념에 관한 정확한 요약을 내리셨네요.
어디서 본듯도 하고,
이 박사가 직접 쓴 것도 같고...
혹시 바르트로부터?
혹은 어떤 종교학자로부터?
첫 문장에 이렇게 시작되는구료.
삼위일체 고백은 기독론에 뿌리가 있다.
기독론이 없다면 삼위일체 고백은 가능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기독론적인 삼위일체론이라...
그런데 끝문장은 무슨 뜻이오?
대충,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 성령이 어떤 관계인지는
"내재적" 삼위일체가 구성하지만
사변신학적 사유와는 상관없다(?).
맞나?
그런데 여기서 '내재' 개념과 사변신학 개념의 차이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소이다.
삼위일체에서 '내재'는 '경륜'과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사변적인 사유의 영역에 속하니까 말이오.
그건 그렇고
기상 5월호에 실린 이 박사의 아티클을 통해서
종교철학과 종교학의 차이를 잘 알게 되었오.
그런데 종교학은 좀 드라이하게 보이는군요.
어떤 가치판단도 없고, 진리담론도 없고,
그저 모든 종교의 현상들을 가지런히 정리만 한다고 하니...
그래도 그런 '자크리히'한 작업이 선행되어야
그 다음 종교철학과 신학도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건 분명한 것 같소.

엠페쓰리로 녹음한 설교를
이 사이트 설교모음에 올리는 방법은 무엇이오?
이만.

이길용

2005.05.09 16:59:45

위의 독어 문장은 바르트 교수가 쓴 것이 맞습니다. 근데 바르트는 바르트인데, 칼 바르트가 아니라 한스 마틴 바르트라고 현 마브륵 대학 교의신학/종교철학 주임교수입니다. 한국에는 잘 소개가 되지 않은 분이기도 하죠. 이분은 주로 파울 틸리히의 시각에서 기독교 교의신학을 재구성하고 계신 분입니다. 위의 삼위일체에 관한 이야기는 이분과 제가 한 박사학위 구두 시험의 주제이었기도 했구요. 물론 삼위일체에 곧바로 이어지는 주제는 아니었고, 제 전공에 맞추어 "불교적 관점으로 본 그리스도론"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삼위일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분과 나눈 이야기들의 대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 부분에서 저와 바르트 교수는 의견이 하나로 합치했습니다. 즉 삼위일체론은 이론적 사변적 추론 과정의 부산물은 아니라는 것이죠. 무엇보다 삼위일체론은 그리스도의 정체에 대한 고백에 기초하고 있다고 봅니다. 즉 초대 그리스도교 원시 공동체에서 이루어진 예수=그리스도=하느님 이라고 하는 고백이 삼위일체론의 근간을 이루었다고 봅니다. 즉 그들은 신정론적 논의 속에서 하느님의 인격성과 존재성에 대한 고민을 했다기 보다는, 역사적 존재였던 나사렛 사람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부터 삼위일체가 기독교 신학사에 등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물론 본격적인 삼위일체론은 니케아, 칼켈돈 공의회를 거치면서 지극히 사변적 작업의 하나로 전환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변적 작업이 된 것은, 애초의 고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저와 바르트 교수의 결론이었습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을 사변철학, 혹은 사변신학의 하나로 읽는 다는 것은 잘못된 패러다임의 적용이라는 에러를 발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즉 고백의 영역을 논리의 영역으로 기술하는 과정에 생기게 되는 일종의 존재의 충격이 삼위일체론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따라서 바르트 교수나 저는 삼위일체에 대한 논리적 집착은 설명 불가능한 고백의 영역을 설명과 이해에 담아보려는 무모한 시도들 중의 하나로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의 걸개가 저런류의 문장으로 정리되었습니다.(그리고 바르트 교수의 저 문장은 그의 책 Dogmatik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종교학이 드라이하다는 말씀은 일면 맞습니다. 하지만 드라이 하다기 보다는 면도날 같다고 보는 것이 더 어울릴 수도 있습니다. 정밀한 척도하에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비약하려는 시도를 날카롭게 잘라내려드는 것이 역사비평적인 토대 위에 서있는 검증적 학문으로서의 종교학이니까요. 따라서 가치판단이나 진리담론이 없다기 보다는, 의도적으로 회피하고있다고 봐야겠죠. 종교학의 입장에서는 그것들이 주는 이념적 측면을 우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그 자체에 대한 정밀한 검토 이전에 관찰자에게 이미 선이해로 주어지게 되는 강력한 진리와 가치의 문제가 행여 관찰 대상을 왜곡시킬 수도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대부분의 규범 학문들은 '부분(teil)'을 이야기하면서도 '전체'(Das Ganze)를 이야기 합니다. 쉽게 보편화될 수 없는 것들을 간단하게 일반화시키면서, 그러한 성급한 일반화는 다양한 역사적 차이들과 세밀한 몸적 부산물들을 이념으로 제거해버릴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혹은 학문적) 태도가 될 수 없다고 보는 것이죠. 그 점에서 종교학은 철저히 계몽주의의 라인에 서 있기도 합니다. 물론 낭만주의적 요소까지 수용하여 종교에 있어서 경험적 요소의 가치를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한 연구과 추적의 과정은 여전히 계몽주의적입니다. 그러니 계몽주의의 강을 넘어 고백의 경지에 이르른 바르트같은 고백적 학자와는 많은 점에서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셈이겠지요. 종교학자의 입장에서는 그런대로 계몽의 도구를 적절하게 성서해석학에 사용한 불트만이 오히려 더 친근감이 갈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학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루돌프 오토와 바르트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유지했구요. 그리고 상호 그들의 신학적 사고 형성에 적잖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상호의 사상을 극복하는 차원에서요. 심한 경우 마부륵 신학부에서는 오토의 강의가 있을 때마다, 바르트와 불트만을 따르는 보수주의적 신정통주의 라인의 신학생들이 몰려들어 보편적, 상대주의자였던 오토와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았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재미있게도 한국의 바르트연구자들 가운데에서 그런 저간의 과정과 상호 사상적 영향의 주고받음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사람들은 찾아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여하튼 그러한 차이가 분명 신학과 종교학에는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종교학은 동일한 계몽주의적 세례를 받은 일반 사회과학적 종교연구와도 괘를 달리합니다. 그들이 손쉽게 기능적으로 종교의 역할을 땅위의 것으로 환치시키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바로 그 점에서 종교학은 낭만주의적 라인을 한편으로 수용하고도 있습니다. 바로 그렇게 종교학은 위태위태하게 자신의 존립기반을 찾아가는 곡예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점에서 종교학은 날카로운 면도날과도 같은 학문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해석과 이해에 있어서 거대담론을 포기하는 포스트모던적 역사학과도 일정부분 공유하는 점이 많습니다. 거기서 일정부분 상상력을 동원하는 신학과는 길이 달라집니다. 종교학의 입장에서는 그런 신학분야의 학문적 상상력 사용에 대해서 적잖은 우려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꼼꼼하게 얽히고 섥힌 실타래를 풀듯이 연구자 앞에 놓여진 연구 대상의 역사적 전개 과정과 그것이 지니는 공시적 구조찾기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그리곤 그 과정의 결과물을 아무런 조건없이 학계에 제공합니다. 이제 성과는 철학, 신학자들에게 돌아가겠지요. 그 결과물들에 대한 가치판단은 역시 그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종교학자들의 바램은 그런 가치 판단, 혹은 진리검증 이전에 좀더 세밀한 역사적 검토를 선행해 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직접 하지 못한다면, 하고있는 다양한 인근분야의 연구 업적을 적절하게 수용해 달라는 것이기도 하고요. 여하튼 그러한 분명한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리고 MP3 설교녹음 올리는 방법은 설교게시판을 자료실로 하면 됩니다. 그건 제가 곧바로 수정해놓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다비아가 세든 서버가 업로드 제한을 몇으로 해놨는가입니다. 업로드 제한이 있으면 아무래도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네요. 아마 그것도 교단 서버에서 멀티미디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알고있으니, 제가 알아보도록 하곘습니다. 일단 설교게시판을 자료실로 돌려볼테니 한번 테스트 삼아 MP3파일을 올려보세요~ 그럼 보고 제가 판단해서 수정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길용

2005.05.09 17:08:00

지금 잠깐 테스트를 해봤는데요. 2메가 제한이 걸렸있네요.
아무래도 설교 mp3파일은 멀티미디어 쪽 서버에 올리는 방법을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제가 교단 서버 관리자에게 문의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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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3.20 22:09:21

위의 외국어 말인데요,
해석해서 써주시면 안되나요,
번거롭지 않으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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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13 00:38:32

왜 삼위일체인가?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전능한 인격이며, 예수는 역사 안에 철저하게 의존해 있던 우리와 똑같은 인격이며, 영은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에 관여하는 힘으로서의 인격이다"
이러한 설명이 아둔한 제에게 이해하기가 한결 수월해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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