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의 세계!

조회 수 4404 추천 수 55 2005.06.01 13:17:00
창조의 세계

이 세계를 이해하고 그 세계와 하나 되기 위해서 화두를 붙들었던 동양의 선승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서도 하나님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과 하나 되기 위해서 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신앙적, 신학적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를 구약성서의 첫머리에 배치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말은 곧 그들도 역시 자신들 앞에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힘과 그 신비 앞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 밤하늘의 총총한 별, 태풍, 지진, 화산폭발, 가뭄 등등, 그들의 인식론적 한계를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이 세계를 언급하지 않은 채 하나님을 생각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더 근본적으로 이런 세상의 비밀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에 야훼 하나님의 계시를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창세기의 창조설화만이 아니라 구약성서 전체에는 이런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생각이 면면히 흐르고 있는데,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유대교의 창조신앙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사도신경의 첫 항목이 ‘천지를 창조한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런 사실에 대한 반증이다.
간혹 죽음 이후나 최후심판 이후의 세계를 무조건 이 세상과 상관없이 초월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님의 부활이 가리키고 있는 그런 새로운 생명의 세계는 단순히 이 땅의 삶이 연장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초월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과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세계는 아니다. 차안과 피안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함으로써 결국 이 창조의 세계를 무시하거나 더 나아가 악하게 보는 것은 결코 성서의 가르침이 아니다.
이러한 이원론적인 세계 이해가 기독교 신앙에서 두 가지 오류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하나는 초월적 열광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실존주의이다. 초월적 열광주의는 말 그대로 세상을 초월하는 이데아의 세계만을 지향하며, 극단적 실존주의는 이 세상과 아무런 상관없이 개인의 실존에만 집착함으로써 결국 이 양자는 이 세상, 이 세상의 물(物), 이 세상의 역사를 간과되거나 해체해버린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규범에 묶이는 청교도적인 윤리관과 영적인 부흥운동 유의 신앙에, 더구나 축자영감설을 수호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와 역사에 관한 태도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배타적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신앙의 가장 중요한 토대로 삼는 기독교 신앙은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신학적 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하나는 우리의 몸과 자연의 일치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기에 좋았다고 선언하신 이 세상을 인간이 몸으로 즐긴다는 건 바로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향한 찬양(doxology)이다. 요르크 칭크는 모든 존재하는 것에 관해 모든 감각과 모든 능력으로 지각해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중요한 기독교 신앙의 근거로 설명한다. “저는 숲 가장자리로 걸어갑니다. 저는 나무들 사이의 빈 곳으로 가서 땅을 바라봅니다. 그때는 생명이 약동하는 이른 아침일 때도 있고 만물이 고요해지는 저녁일 때도 있습니다. 들판과 초원, 길과 꽃 그리고 집들이 제 앞에 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 저 홀로.”(Jorg Zink,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32).
또 하나의 다른 신학적 관점은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생태계 파괴이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세계의 파괴 앞에서 무엇을 생각하며, 무슨 실천을 모색해야만 하는가? 우리가 단지 영혼구원에만 몰두하는 소종파가 아니라 세계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하나님을 보편사적 지평에서 믿는 종교라고 한다면 왜곡된 역사와 자연 앞에서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이 창조 문제를 핵심 메시지로 수용하지 않는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몰트만은 오늘 창조론의 문제가 오늘날 새롭게 부각되었다고 설명한다. “오늘날 그 당시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질문이 전면에 나타났다. 요즘처럼 산업화로 인해서 자연이 파괴되고 있는 시점에서 하나님 창조자에 관한 믿음은, 그리고 세상을 창조로 믿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소위 <생태위기>는 인간 환경의 위기만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의 위기와 마찬가지이다. 그 위기는 총체적이고 불가역적이기 때문에 지구라는 혹성에서 벌어지는 생명의 묵시록적 위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위기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위기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전쟁이 시작되었다는 모든 예측이며, 지구에서 벌어지는 창조가 죽음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예측이다.”(J. Moltmann, Gott in der Schöpfung, Vorwort 11).
이런 점에서 볼 때 창조의 세상을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의 주변적인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본질적인 작업이다. 그동안 이 창조문제는 심미적인 차원이나 더 심하게는 인간의 편리한 삶을 위한 도구적인 차원에서 다루어졌는데, 이제 우리는 가능한대로 이 세계를 물리학과 철학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파악해야하며, 생태계의 위기를 몰고 온 이유에 대한 사회과학적인 분석도 필요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성서의 창조 이해와 신학적 개념을 충분하게 따라잡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신학적 창조론의 지평을 심화한다는 것은 곧 종말 이후의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레벨:6]유희탁

2005.06.01 22:07:19

세상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시다는 말씀이겠죠...
세상과 동떨어진 신학적 발상이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바로 그 세계가 우리의 이야기의 출발점이겠지요..
아마도 제가 알기론 본회퍼 목사의 신학의 출발도 바로 현실..그리스도 안에서의 현실...
어쩌면 그가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실이라는 것도 비슷한 의미가 아닐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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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10 16:45:44

창조의 세계?
하나님을 찬양 한다면, 지으신 세계에 대해서 감사와 찬양은 당연한 것이겠지요.
그것을 소홀히 해서 생태계의 파괴와 오염은 인간들이 피할수 없는 재앙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모든 사물 주위 대해 고민과 사랑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의 지으신 아름 다운 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신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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