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의와 성화

조회 수 6915 추천 수 70 2005.08.02 23:39:14
칭의와 성화

요즘 성화를 강조하는 설교와 그런 목회자들이 늘어나는 추세이다. 이는 곧 기독교 신앙이 원초적인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데 머물지 않고 변화된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일단 바람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이 제시하는 성화가 신학적으로 정당한지, 그리고 그것이 실제로 신자들의 삶을 건강하게 끌어가는지에 관해서는 좀 더 진지한 논의가 필요하다. 여기에는 서로 맞물려 있는 몇몇 신학적 혼선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첫째, 요즘 성화를 강조하는 이들의 생각에는 칭의(稱義)와 성화(聖化)가 이원론적으로 구별되는 경향이 강하다. 그들은 늘 입버릇처럼 칭의로만은 충분하지 못하다거나, 혹은 칭의로 구원받기는 하지만 참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더욱 거룩한 삶으로 성화되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런 성화의 과정이 곧 칼빈이 말하는 ‘신자의 견인’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이런 주장이 일견 매우 성서적일 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자들의 근본 가르침인 것처럼 보이지만 한걸음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얼마나 부실한지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성서는 성화를 칭의와 대칭되는 개념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칭의와 성화가 서로 다른 신학적 개념인 것 같지만 실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구원 사건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차원에 속한다. 즉 구원의 실체에 관한 인식론적 한계로 인해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칭의와 성화라는 개념으로 그것을 구분해서 설명하고 있을 뿐이지 그것이 존재론적으로 구별되는 사건은 아니라는 말이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성화 역시 칭의에 포함된 사건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일분의 목회자들이 칭의를 성화와 대칭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의 칭의론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종교개혁자들은 로마가톨릭교회가 인간의 믿음만이 아니라 행위까지 칭의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에 반발해서 ‘오직 믿음’(sola fide)을 주장했다는 기초적인 사실만 알고 있어도 기독교인다운 윤리에 해당되는 성화를 칭의와 대칭되는 것으로 접근하지는 않을 것이다.
둘째,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칭의가 성화를 통해서 보충되어야만 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신생아가 자라는 과정을 예로 든다. 신생아가 태어나면 인간이긴 하지만 완전한 인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아이는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아서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만 사람 구실을 하는 것처럼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해야 한다. 이들의 말은 일리가 있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의 성숙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으며, 실제로 교회 생활에서도 성숙한 기독교인과 그렇지 못한 신자들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믿기는 하지만 사회생활에서는 별로 이렇다 할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걸 보면 성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만 하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칭의의 엄밀성을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이다. 인간은 아무리 성화되어도, 즉 순교자 정도의 신앙적 순수성과 프란체스코처럼 실제의 삶에서도 온전한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칭의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일이 없다면 아무도 자기의 행위(윤리)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칭의 이후에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기보다는 칭의와 성화를 동시적인 사건으로 여긴다. 칭의를 보충하기 위해서 성화가 필요한 게 아니라 칭의가 성화이며, 성화가 곧 칭의라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실존은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이고,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정당하다.
셋째, 성화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가장 결정적인 오류는 성화를 우리가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어떤 것으로 간주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교회 생활에서 본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에서도 본이 되도록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매우 감동적으로 전하고 있다. 나는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한편으로는 매우 순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뭘 모르고 있는 것 같아서 연민을 느낀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삶의 변화는 아예 입에 담을 필요도 없는 당연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역시 자비와 평화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일반 사람들도 그런 삶의 변화를 늘 마음에 두고 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의 훈화에 불과한 이러한 사실을 칭의와 성화라는 구조를 통해서 매우 대단한 가르침인양 떠든다는 게 참으로 우스꽝스럽다.
다른 하나의 이유는 인간 삶의 변화는 이렇게 ‘변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일반 교육에서도 학생들을 책망하거나 잔소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교사가 스스로 모범을 보인다거나, 더 근본적으로 삶과 역사의 본질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게 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를 모색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정직해라.’, ‘착하게 살아라.’, ‘섬기며 살아라.’ 하고 외친다는 건 기독교의 복음을 율법과 윤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 번도 이런 잔소리를 하신 적이 없다. 그는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거기에 철저히 의존해서 행동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왜 오늘의 설교자들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이 아닌 성화로 신자들을 닦달하는지 모르겠다. 선무당이 사람을 잡는다는 말이 있다는데, 공연히 고상한 것처럼 성화 운운하지 말고 최소한 ‘칭의’의 깊이에 들어갈 수 있도록 성서와 신학공부나 다시 철저하게 하는 게 어떨는지.

[레벨:6]유희탁

2005.08.03 12:44:07

어딘가 아파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제 안에도 이원론적으로 생각하는 유아적인 발상이 있었나 봅니다. 귀한 배움을 하나더 얻게 되었습니다. 새로이 신학하는 기분으로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늘 주시는 말씀과 가르침 속에서 날마다 새로워지겠습니다...하나님께서 의롭다 불러주신 한 사람으로 여전히 죄인의 흔적이 있는 사람으로서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야 할 것을 느끼며 돌아섭니다. 오늘도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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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바람

2005.11.20 09:08:55

목사님의 말씀은 늘 신선한 것 같습니다. 뭔지 모르지만 제가 평소에 목말라 하는 내용을 잘 표현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지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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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3.22 12:42:05

예수님처럼 하나님 나라에 의존해서 행동한다는건 어떤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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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13 01:22:40

칭의와 성화?
나는 정말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갈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면 제대로 성화가 되지 못해서 아니면 아둔하고 미련한 자이기게 그런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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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09.13 09:50:39

새하늘 님,
옛날 글을 꼼꼼이 찾아 읽으시는군요.
그 자세가 놀랍습니다.
하나님 존재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러운 겁니다.
거기서 한 단계 앞으로 들어가는 게 필요할 뿐입니다.
그 다음에 또 다른 의문이 생기겠지요.
그러면 또 하나의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 문 여는 작업이 없을 때 우리의 신앙은
율법주의가 되든지
아니면 회의주의로 빠집니다.
좋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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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0 14:57:16

정목사님의 칭찬에 감사를 드립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 다산 정약용 선생님이십니다.
다산 선생님의 여러 글과 사상 등을 조금이나마 공부하면서 학문에 들어가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이해한 부분들을 공부와 삶에 적용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그래서인지 좀더 이해하기 위해 옛날(?) 글들을 읽고, 시덥지 못하지만 읽은 글들을 다시 음미 해보려고 짧게나마 댓글을 답니다.
댓글이 마음이 들지 않으시더라도 이쁘게 봐주시기를 ^^;

[레벨:2]yeosim

2011.01.30 23:04:28

우리는 지금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협동하여 행하고 있는 일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을 구분하여

빈틈없는 간막이 방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마치 두 사람이 함께 일하는 것과 같으므로

"하나님은 이것을 하고 나는 저것을 했다"

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방식은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다.

 

- C.S.루이스 -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 사도 바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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