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적인 목회

조회 수 4741 추천 수 65 2005.08.13 23:12:48
소극적인 목회

모두가 적극적으로 목회하라는 말을 하는데,
소극적인 목회를 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나는
정말 생뚱맞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적극적으로 하고 싶은 사람은 적극적으로 하시라.
내가 보기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잘된 일은 하나도 없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자기가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적극적인 생각보다는
어떤 힘에 어쩔 수 없이 이끌린 것뿐이다.
물론 지금 적극적으로 목회하는 사람들도
모두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다고 말하겠지만
자신의 욕망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별하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그건 그렇고,
내가 소극적으로 목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언가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어떤 구체적인 일을 하지 않고
무작정 침체한 상태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도 아니다.
훨씬 근원적인 힘에 사로잡히라는 말이다.
그 근원적인 힘은 바로 하나님이다.
다르게 표현한다면
존재(Sein)이며, 도(道)이며, 궁극적인 토대이며, 궁극적인 관심이다.
그런 힘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약간 맛본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는 그런 경험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 자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을 회피하고
그저 자신이 익숙하게 생각하던 그런 삶을 강화하는 쪽에 승부를 건다.
그래서 무언가 성과를 올리는 것으로 삶의 목표를 삼는다.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훨씬 본질적으로 근원적인 힘이 끊임없이 자기를 엄습하는 사람은
결국 모든 삶의 부자연스러운 모습,
본질적이지 않은 것들을 차츰 정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게 다른 사람에게는 소극적인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소극적인 목회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생명의 신비를 놀랍게 경험한 사람들이
더 이상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든지
‘뜨레스 디아스’ 같은 행사를 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을 소비할 뿐이지 아무 것도 창조적인 게 아니다.
이는 흡사 시트콤을 들여다보면서 인생을 보내는 것과 같다.
물론 그렇게 시트콤을 보는 삶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자기의 존재를 가볍게 함으로써
일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유의미할 것이다.
말을 좀 바꾸어,
적극적인 목회를 통해서 교회를 부흥시켰다고 하자.
거기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월급을 많이 받는다는 의미가 있는 것일까?
교회를 부흥시켰다는 성취감이 남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을 구원시킨 것일까?
바로 이 질문이 여기서 핵심이다.
우리가 목회에 그렇게 열정적으로 매달리는 이유는
물론 개인적으로 목회의 성취감이 있기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구원시키겠다는 사명감이 가장 클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게 가장 큰 유혹이자 위험이다.
목회자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내가 과연 신자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는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멀리 떨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목사들은 신자들을 교회 중심으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그를 구원시키는 것이라고 믿는지 모르지만
이건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마지막 심판 때에 목사들은 이런 기준에 따라서 심판받지 않을까 생각한다.
과연 그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에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새벽기도회로부터 교회봉사, 각종 선교단체 활동,
모든 인생을 교회활동에 쏟아 넣게 하는 게
과연 하나님이 보실 때도 바림직한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해야한다.
만약 마지막 때 하나님이 목사들에게
왜 그런 방식으로 그 사람의 삶을 소비하게 만들었는가, 하고 책망하실지 모른다.
나는 많은 평신도들이 자기 삶을 그렇게 ‘소비’하는 것을 자주 보았다.
지금 내가 목회의 모든 행위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성실하게 목회하는 젊은 목회자들의 기를 꺾으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나친 자심감은 조심하라는 말이다.
자기의 목회 행위가 과연 하나님의 구원 섭리에 의존하고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성취욕과 욕망에 치우친 것인지 늘 성찰해야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목회인지,
더 궁극적으로 무엇이 가장 바람직한 삶의 모습인지 잘 모른다.
그렇다면 성령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목사는 뒤로 물러서는 게 최선이다.
이 말을 이해하시는지.
성령의 활동과 목사의 활동이 왜 다른지를 말이다.
내가 보기에 목사가 가족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된다면
그렇게 교회를 크게 늘릴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지혜로울 것 같다.
왜냐하면 나중에 그 많은 영혼들을 자기가 책임지기 힘들기도 하고,
자기 구원에 시간을 쏟기에도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한국 땅도 좁다는 듯,
세계를 누비며 교회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으로 불가사의다.
그들의 영적인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들의 선교적 비전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모슨 근거에서 자신들의 행위에 그렇게도 강한 확신을 갖는 걸까?
그들의 믿음과 용기가 나로서는 부럽다.
지금 나는 남의 잔치에 재를 뿌릴 생각은 전혀 없다.
큰 교회를 부러워하지도 않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다만 연민을 느낄 뿐이다.
본인들이 그게 행복하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다만 자기 구원에 천착하는 것과
교회 성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젊은 목회자들에게
내 나름의 길을 제시할 뿐이다.
굶지만 않는다면 자기 구원에 천착하시라.
여기서 말하는 자기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설명하지 않겠다.
생존의 위기를 안고 있는 목사들에게는
일단 그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굳이 목회를 전담하지 않더라도
일단 생존의 길을 찾는 건 중요하다.
오늘도 역시 내 말에 두서가 없었다.
그래도 행간에서 무언가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으리라 생각하고 자위할 뿐이다.  




[레벨:1]한진영

2005.09.14 15:53:50

한국 교회내에 너무 오랜동안 뿌리 내린 부흥과 선교 성장에 대한 열망은
새롭게 시작하는 많은 신학생들에게도 굽힐줄 모르는 패러다임이 되었습니다
제 주변에도 이런 글을 보여주고 싶은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머릿속에 고무된 달뜬 사명감은 쉽사리 수그러 들것 같지 않습니다

목사님
윗글 중에 생계를 꾸릴 정도가 된다면 교회를 크게
늘릴 생각은 버리는게 좋겠다고 말씀 하셨는데요

궁금한 것은 복음 사역자가
어느 정도 수준이든 교회를 자기 생업을 위한 기반으로서 여기고
기본적인 모양을 갖추려 전도하고 자리를 채우려 노력한다는게
과연 성서적으로 정당한지요?
단 열명 스무명이라도 과연
그들을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인가요
그런 마음이 한국교회 맘모니즘의 숨겨진 씨앗이 될 수 있는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질문드립니다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09.26 13:13:58

한진영 씨,
무얼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생각이 깊은 분 같네요.
목사가 적은 수의 교인을 생계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게 곧 맘모니즘의 씨앗으로 작동할 위험성이 없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한진영 씨도 질문을 하면서도
내 글이 그런 걸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요?
나는 다만 목사의 삶에서도
생존 문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려는 것이지
목회행위가 호구지책으로 이용되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교회가 약해서 생존이 불가능하다면
목사는 다른 방식으로 생존을 해결해야만 할 겁니다.
새벽에 우유를 배달하든지, 그 이외에 파트타임으로 노동을 하든지 말이죠.
더 좋은 해결 방법은 넉넉한 교회가
미자립교회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미자립교회의 목사도 자신의 영성을 심화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습니다.
이건 교회의 단일성이라는 신학적 근거에서도 매우 중요한 제도입니다.
답이 늦었습니다.
내가 여기 사이트를 매일 샅샅이 뒤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1]한진영

2005.10.04 13:03:31

목사님 답변 감사합니다 저도 질문해 놓고 잠시 잊고 있었네요..
저는 인천에 사는 평신도입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대략은 이해하겠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목사님께서 비평하시는 거물급 주류 목사님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성장제일주의란 공통 분모를 미자립 개척 교회 목사님들 조차도 동일하게 가지고 있음에, 크고 작고를 떠나서 그분들이 갖고 있는 목회에대한 관점이 같은 바에야 큰 교회가 작은 교회를 돕는 일이 진정 의미가 있을까하는 질문이 이어집니다. 복음과 목회와 목사 개인의 생존 문제는 어떤 역학관계에 있는지 궁금합니다. 첫출발의 종이 한장 차이로 걷잡을 수 없는 넓은 길로 미끌어져갈 수도 있기에 작은 것도 크게 보여집니다. 목사님의 칼럼중에 '십일조 제도는 한국 기독교가 지금처럼 성장하게 된 밑거름'이란 말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십일조의 여러면 영향중 긍정적 부분을 언급하신 것으로 읽혀집니다. 그러나 목사님, 한국교회 내에 뿌리내린 십일조의 경향성에대해 온건하게 중심을 잡아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씀 대로라면 돈이 교회 성장의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의미로 받아 들여 집니다. 보통 말하는 교회 성장이 교인수의 양적 증가를 말하는 것이 사실임에야, 이 현상이 복음적으로 확증되려면 교인의 증가를 구원받은 무리의 증가로 볼수 있을 때 가능할텐데요. 그렇다면 결국은 돈이 영혼 구원에 보탬이 되고 있다는 논리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인간 입장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성령의 바람같은 역사, 은폐되어 있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는 상충되는 자본의 힘에 하늘문까지 열리는 듯한 기계적이고 예측 가능한 인본주의적 구원의 논리임에 많은 혼란을 줍니다. 양적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가 내건 복음이라는 간판이 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편에서의 복음과 정말 동일한가요? 한국교회의 가장 큰 핵심 문제점은 진리에서 떠난 것인가요.. 아니면 참 진리에 발을 디뎠지만 능력의 상실로 인한 일시적 세속화인가요? 기복주의와 감상주의등의 왜곡된 신앙관은 가르치고 고쳐야할 표피적 현상인가요. 근본이 다름을 나타내는 병징인가요. 요즘에 옥한흠 목사님이 공석에서 한국교회가 문둥병에 걸렸다며 회개를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하시더군요. 정말 회개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회복을 구해야 하는 것인가요. 한국교회가 과연 기도하고 성서적으로 비평하며 가르치며 새롭게 됨을 추구할 가치가 있는 소망이 있는 곳인가요. 주님이 머리되신 성령의 공동체 교회라면 개혁이란 말 자체도 불필요할텐데요. 이처럼 저의 이러한 산만한 질문의 궁극적 시발점은 결국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복음' 일까 하는 점입니다. 불신자를 만나 구원에 이를수 있게 전할 수 있는 복음은 어디서 어디까지 일까요? 빌립처럼 온 구약을 다 인용하고 설명하여 그리스도를 소개할때 복음이 온전히 전파되는 것 일까요? 대학 선교단체 등에서서 전하는 4영리는 복음의 초보인가요? 한번은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에게 컴퓨터로 '복음적'이고 '수준'높은 설교를 들려 드렸습니다. 어머니 말로는 너무 말씀이 심오해서 너같은 젊은 사람들이나 이해하지 나같은 무지랭이는 잘 모르겠다고 하시더군요. 무지랭이 할머니가 납득 못할 복음이라면 너무 어려워서 이상하고,, 일단 구원받고 예수 힘빌어 욕심을 채워보자는 뭉게지지 않은 자아주체 의식이 하늘을 찌르게 하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식은 죄다 사이비 가짜로 보이니 그 구분이 참 어렵습니다. 목사님의 깊은 글들로 많은 도움을 얻고 있는데 어떤 때는 목사님께서 허를 찌르는 것을 웬지 조심하고 계신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제 생각이 너무 치우친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질문도 중구난방입니다. 목사님께서 혜안으로 그 속내를 간파하시리라 믿습니다. 좋은글과 항상 성의 있는 답변에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05 07:45:09

이렇다니까요.
정말 허를 찔렸네요.
그냥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여청년이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어떤 사안에 파고드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요.
이런 분들이 많아지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밝습니다.
한진영 씨가 제기한 문제들 중에서 핵심적으로 두 가지만 짚으면 되겠네요.
어려운 설교와 쉬우 설교의 난맥상에 대한 것이 첫번째입니다.
소위 불학무식한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든 설교라는 게 무엇일까요?
내용 자체가 현학적이거나 표현이 교언영색에 떨어지는 것이겠지요.
이런 건 문제는 문제입니다.
굳이 멋을 부린다거나 실질이 아니라 개념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설교겠죠.
나도 그럴 경우가 적지 않긴 한데,
이런 건 그렇게 좋은 설교가 아닙니다.
다만 깊이가 있는 설교는 필요합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요?
생명의 신비 안으로 끌어들이는 설교를 말하죠.
소설이나 시도 그런 경향이 있잖아요.
괜찮은 소설은 우리를 삶의 신비로 끌어다줍니다.
그런데 시트콤 같은 건 그냥 재미만 있을 뿐이지 아무런 내용이 없어요.
어떤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기보다는
그런 종교적 감사에 젖거나 기독교 윤리에 머무는 설교는
아무리 재미 있어도 영적인 설교는 결코 아닙니다.
그래도 그런 설교를 듣고 위로 삼아 인생을 사는 것도 괜찮지 않는냐, 할 수 있죠.
그렇긴 합니다.
매일 티브이에 나오는 드라마만 보고 살아갈 수도 있지요.
아마 대개의 민중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자식 사랑이 있고,
삶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다.
여기에 나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시장 바닥에서 좌판을 벌려놓고 과일을 팔아 호수지책을 삼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의 심화가 가능한 설교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런 역할을 내가 설교비평에서 대상을 삼은 대중적 목사님들이
감당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 판단은 내 몫이 아닙니다.
다만 나는 그런 설교가 사람들을 생명의 세계로 이끌어들이는가,
아니면 그 길을 방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에 초점을 두고 있죠.
그 생명의 세계라는 걸 당신이 아냐, 하고 누구 묻는다면
성서와 기독교 2천년 역사의 흔적인 신학과 오늘의 삶을 이해하는 인문학적 소양으로
그것을 인식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라는 게 신비하기 때문에 한 두 마디로 규정할 수가 없네요.
바람과 같아서 우리 손 안에 잡히지가 않네요.
결정적인 대답은 결국 종말론적인 지평에서나 가능하겠고,
역사 안에 살아가고 있는 개체로서의 우리는 그 힘에 휩쓸릴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게
최선 아닐까요?
그게 바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겠지요.
자연스럽게 두번째 질문으로 넘어갔습니다.
도대체 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의 범주는 어떻게 설정될 수 있는가?
정확하게 말한다면 복음의 본질과 비본질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신약의 복음서 기자들이 왜 예수 사건을 복음이라고 불렀을지 생각해보세요.
복음은 늘 율법과 상대적인 개념입니다.
유대교는 율법을 통해서 구원에 접근해보려고 했지만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율법의 완성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실행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칙에서 본다면
교회에서 실행하고 있는 수많은 노력들이 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겠지요.
인간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구원하는지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지요.
(지금 세례 공부도 아닌데, 너무 초보적인 이야기를 하는군요.)
이렇게 구원 사건에서 자기의 노력과 능력을 해체하게 되면
이제 참된 의미에서 무엇을 해야할는지 답이 나오게 되겠지요.
그 답에 따라서 교회 공동체가 운영되면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교회 공동체는 역시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아주 복잡하게 얽히고 섥히는 일이 발생하게 되겠지요.
본질과 비본질이 뒤범벅이 되겠지요.
완전히 복음의 본질만 지배하는 교회 공동체는 역사에서 없었습니다.
신약성서의 공동체도 역시 여기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가 건강할 수 있는 기준은
끊임없이 본질을 향해서 자정, 혹은 개혁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가 '에클레시아 샘퍼 레포만다',
즉 늘 개혁되는 에클레시아를 주장했습니다.
개혁의 역동성은 바로 신학에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곧 신학적 반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신학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일종의 신학무용론이 지배하는 거죠.
그러면 결국 교회 개혁은 물건너갑니다.
꿩잡는 게 매라는 식으로 교회부흥만이 진리의 준거로 작동됩니다.
한진영 씨는 지금 많은 문제가 복잡하게 보이죠?
저건 아닌데, 하면서도
그렇다면 대안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어떤 게 바른 복음인지, 교회 형태인지에 대해서도 그럴 겁니다.
천천히 생각하시고 앞으로 나가세요.
여기서 중요한 건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를 안고 가야 한다는 겁니다.
썩어버린 교회는 내가 알게 뭐야, 가 아니라
그게 바로 우리가 지고 가야할 구체적인 주님의 몸이라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러다 보면 어떤 길이 열리겠지요.
우리가 우리의 예상을 넘어서 활동하는 성령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건,
그리고 그분을 인격체로 믿는다는 건
바로 이런 신앙을 가리킵니다.
이만 줄입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1]한진영

2005.10.05 21:39:41

목사님 말씀대로 천천히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의 교만과 복음의 비밀을 뭔가 알게 되었다는 자기의를 깨닫는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 저 따위가 납득 못한다고 하나님 나라가 변질될 일도 없고 축소될 일도 없고 주께서 자기 백성을 못찾아 낼 일도 없으니까요. 먼저 주님의 철저한 일하심에 경외감을 가지고 감사를 회복해야 함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사슴과 같이 높은 곳을 거니는 즐거움을 좀 되찾고 싶습니다..목사님 답글에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9.20 15:35:25

소극적인 목회?
45번 '어린애 같은 신앙(?)'에 대한 갈무리인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목사님의 소극적인 목회라는 말씀이 노자의 무위와 같은 느낌이 듭니다.
채우려고만 노력하지 말고, 그 속에 담겨진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자라는 것이 맞을런지 모르겠습니다.
대중에 의해 휩싸여 잃어버린 개인의 자아를 찾아 무리를 떠나는것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이것은 단절이 아닌 연속성에 놓여진 우리의 자아를 찾아 그분과의 은밀한 만남이 있어야 한다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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