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라 피데

조회 수 8817 추천 수 65 2005.10.04 13:21:11
솔라 피데

마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의 입장과 대립되는 명제로서 ‘솔라 피데’(sola fide)를 제기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믿음은 개신교회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도 주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믿음에 대한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의 생각은 상당히 비슷하면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 약간의 차이라는 게 보기에 따라서 근본적일 수도 있고, 별 대수롭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문제에 우리가 실질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문제를 정리해야만 한다. 하나는 ‘오직 믿음’으로 획득되는 ‘의’, 소위 칭의론과 관계된 사태이며, 다른 하나는 믿음과 행위의 근본인 ‘존재와 행위’의 관계이다.
기독교가 ‘의’ 문제를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의로운 존재라는 사실과, 이에 반해 인간은 불의한 존재라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데에 있다. 구약성서도 이런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불의에 관한 대비가 흔하게 등장한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선포한 예언에서 우리는 이러한 대비를 가장 적나라하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대목만 인용하자. “그들이 돈을 받고 의로운 사람을 팔고, 신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힘없는 사람들의 머리를 흙먼지 속에 처넣어서 짓밟고, 힘 약한 사람들의 길을 굽게 하였다.”(암 2:6,7).
이렇게 불의한 인간들이 의로운 삶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것은 성서의 가르침일 뿐만이 아니라 모든 도덕과 윤리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여기서 문제는 ‘어떻게’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가에 있다. 인간의 불의를 막기 위해서 모든 민족은 나름의 미풍양속을 지켜왔으며, 모든 국가는 법을 발전시켜왔다. 아마 이러한 미풍양속과 실정법이 인간의 불의를 제어하고, 의를 활성화하는 역할을 실제로 감당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접어두고, 일단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문명이 발전한 민족이나 국가일수록 이런 법체계가 매우 자세하게, 어떤 점에서는 좀 장황하게 확장되고 있다.
기독교 역시 ‘어떻게’ 인간이 의로워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생각했다. 여기서 바로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의 입장이 약간 구분된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믿음과 행위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개신교회는, 특히 루터의 입장을 지지하는 교회는 ‘오직’ 믿음‘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은 매우 현실적인 입장이다. 인간이 아무리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의 삶으로 의로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건 결코 통전적인 의로움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서 믿음과 행위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되는 경우가 우리의 현실에서 늘 일어난다는 걸 전제한다면,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칭의가 눈에 보이는 칭의로 나타나기 위해서 결국 행위를 통한 의로움이라는 문제도 믿음을 통한 의로움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에 반해서 루터는 인간의 의 문제를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법적인 문제로 보았다. 그가 칭의론을 실질의 문제가 아니라 법적인 문제로 보았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는 여전히 불의하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눈여겨본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simul iustus et peccator”, 즉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고 보았다. 하나님이 법적으로 의롭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인간은 의인이며, 동시에 실제로는 여전히 죄를 짓기 때문에 죄인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루터의 입장은 인간이 자기를 성취하는 데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를 뚫어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미 어거스틴 수도회에서 깊은 영성수련을 쌓고, 가톨릭교회의 사제요 신학자로서 철저하게 금욕적으로 살아가면서 의를 추구했지만 결국 그는 아무런 의도 성취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로마를 방문했을 때 루터는 무릎으로 계단을 기어 올라가는 고행에 참여하면서 ‘이건 아닌데!’하는 깨우침을 얻었다는 일화가 있다. 인간이 의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다면 결국 실제적인 의를 실행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따라서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하는 그 사건 안에서만 의를 획득할 수 있다면, 결국 인간의 행위와 아무런 상관없는 ‘오직 믿음’만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루터가 이렇게 인간의 의 문제 앞에서 행위를 무능력한 것으로 제쳐두고 믿음에만 그 토대를 놓았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존재의 차원에서 접근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마음에 맞도록 행동한다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존재를 하나님에게 걸어둔다는 뜻이다. 이는 흡사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는 예수의 비유와 비슷한 관점이다. 우리가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일치한다면 비록 우리에게 그럴듯한 교양이나 행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자유, 기쁨, 평화의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에게서 볼 수 있듯이 우리가 아무리 윤리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이런 속성으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솔라 피데’는 율법 폐기론인가, 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지금 루터는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인 관계를 언급하고 있을 뿐이라는 점에서 그런 질문은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내가보기에 절대적인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간의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루터의 진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매우 현실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다음 기회에 다루어보자.

[레벨:2]새즈믄

2005.11.04 17:24:51

칭의는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인 관계를 언급 하였다는데 동의합니다. 인간과의 상대적인관계에서는 행위가 필요 하겠지요.지금와서는 칭의만 강조 하다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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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1 12:19:00

솔라 피데?
이제껏 칭의를 받으면, 반드시 그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생각에 집착 했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구원받음을 다시한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로 사유한다는 것이 점점 어려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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