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자영감설에 대해

조회 수 13938 추천 수 178 2005.10.13 00:28:41
축자영감설에 대해

어제 성결교회 신학자들 모임에 잠시 참석했는데,
내 후배가 되는 어떤 교회사 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신학대학교에서 성서에 대해서 역사비평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독일의 쉴라터(?)같은 대학자도 역시 축자영감설에 동의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의 말을 듣고 한동안 머리가 띵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축자영감설 운운하고 있는 건지
순간적으로 2백년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거명하고 있는 그 신학자에 대해서 잘 모르겠거니와
그가 말하는 대로 그 신학자가 축자영감설을 주장했는지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가 축자영감설을 떳떳하게 받아들어야 한다는 주장만큼은
매우 신학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상식적이지도 않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축자영감설 운운한 것일까?
사실 한국교회는 교파를 초월해서
성서에 대한 축자영감설이 거의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는 실정이다.
축자영감설은 말 그대로
성서의 한자 한자가 모두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록되었다는 주장이다.
17,18세기에 유럽에서 축자영감설이 횡행했던 적이 있긴 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주장이 왜 나왔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혹은 삶의 자리를 늘 염두에 두고 그런 걸 논의해야 한다.
종교개혁을 거친 다음에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논리를
신학적으로 체계화할 필요를 느꼈다.
그런 시대의 신학사조를 가리켜 우리는 정통주의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해석함으로써
그 정신을 상당 부분에서 놓치고,
도그마에 치중하고 말았다.
그중의 하나가 곧 축자영감설이다.
그들이 성서를 축자영감설로 주장하게 된 이유는
물론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에 닿아있다.
그게 우리의 논의에서 핵심이다.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이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전통과 권위에 대립적인 의미에서
'솔라 스크립투라'를 제창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교회의 전통이 아니라 성서만이 모든 신앙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들은 극단적으로 축자영감성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축자영감설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로마의 교회전통과의 대립개념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신학사적 배경을 무시하고
축자영감설을 무조건 개신교의 성서관으로 도입하려는 것은 넌센스다.
참고적으로 칼빈이 성서를 해석할 때 '성령의 내적 조명'을 언급했다고해서
오늘날 툭하면 성령의 조명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우를 범하는 일이다.
칼빈도 역시 성서 해석의 권위가 교회에만 있다고 하는,
결국 사제와 교황에게만 있다고 하는 로마 가톨릭과 대립적인 차원에서
성령의 해석을 강조하기 위해서 성령의 조명을 언급했다고 보아야 한다.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와 칼빈의 성령의 조명이
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축자영감설로 규합된 게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런 부분은 교리사적인 검토가 좀 더 있어야 한다.
어쨌든지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오랜 신학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무조건 성서에 대해서 축자영감설의 구도로 접근하고 있다.
여기서 벌어지는 문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성서 텍스트에 대한 해석학적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
성서라는 텍스트를 해석학적 토대 없이 해석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이는 흡사 어느 시인의 시를 신문 기사처럼 읽으라는 것과 같다.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보존하려는 것 보다는
오히려 해석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큰 게 아닐까 생각한다.
만약 성서가 진리라고 한다면 이 세상의 보편적 해석에 의해서도 진리로 인정될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해석에 대한 두려움이 앞서니까 결국 그것을 거절하기 위해서
축자영감설이라는 요새 안으로 숨으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성서는 성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일까?
그럴리가 있겠는가?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다.
그는 신출귀몰한 마술이나 주술이 아니라
진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성서기자들에게 활동하셨다.
시인들이 영감을 얻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 성서에 오늘 우리가 접근하는 방식도 역시 이런 진리에 근거해야 한다.
비록 그런 진리론적 해석학이 고단한 길이라고 하더라도,
그런 길을 포기하고
안전한 축자영감설에 숨는다면
기독교 신앙은 자폐증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길용

2005.10.13 05:07:50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분은 성서를 신/앙/하고 있나보군요 ㅡ.ㅡ;;



[레벨:0]이맹영

2005.12.18 05:14:42

정용섭목사님의 명쾌한 해석은 이해가 가는데 이길용님의 답글은 전적이해가 안되는군요.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이시지만 이를 대변하고 있는 성서를 신앙치 않고 하나님을 신앙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있나요? 때론 심오함이 단순한 진리를 어렵게 하지 않을까요? 전도자의 말씀처럼.

[레벨:2]김민철

2006.01.12 23:25:37

가려운 부분을 대신 긁어 주셨습니다...^^

[레벨:7]우익지

2006.01.13 06:03:23

우상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피조물을 신앙하는 것이 우상이 아닐까요?
임영수 목사님의 설교 (어떤 시편 내용) 중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성서의 인물들이 하늘의 해를 보고 해를 신앙의 대상 (원시신앙에서 많이 나오잖아요)으로 삼지 않고 그 뒤에 있는 창조주 하나님을 노래했다면서 시인의 신앙의 깊이를 크게 평가했습니다.
그럼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겠네요. 성경이 하나님 자신이냐? 피보물이냐?

[레벨:0]서우정

2006.01.21 22:25:18

우상의 정의는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상이란 자/신/을/ 위/해/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입니다. 그것이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배우자가 될 수도 있고, 기도의 내용이 될 수도 있죠..... 너희를 위하여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 하늘위에 ...우상숭배금지의 핵심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만약 상자체가 문제라면 기독교인들은 조각가가 되면 안되죠.. 누구에게는 십자가도 우상이 되고 누구에게는 신앙이 됩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닌가가 신앙과 우상을 나누는 것이죠.. 우익지님의 말씀과 이길용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참 저의 의견은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레벨:0]오뉴와근신

2006.04.13 16:34:00

성서를 신앙한다..
뭔 소리인지 원...

성서는 신앙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신앙의 주체인 하나님을 좀 더 깨닫고 느끼고
그 분의 말씀을 듣기 위해
그 곳에 쓰여져 있는 것을 받아 들이는 대상일 뿐이지요.

성서가 곧! 신앙이다.
모순이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4.14 00:05:26

오뉴와근시 님,
반갑습니다.
뭔 소리인지, 하는 호소가 들리는 듯 하네요.
칭의론이 무슨 소리인지, 하고 말한 적도 있으시죠?
그냥 천천히,
시간이 넉넉할 때 천천히 읽어보세요.
재미 없으면 그만두고,
또 심심하면 읽어보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레벨:0]오뉴와근신

2006.04.19 11:37:50

칭의론이 무슨 소리인지...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이신칭의는 제 믿음의 기본이니까요.
누더기 옷을 벗고
새옷을 걸쳤으니
보라 새것이 되엇도다!

저 위엣글은 이맹영님의 글에 대한 느낌이엇습니다.

[레벨:0]이상우

2006.04.21 00:38:35

축자영감설이 잘못되었다면 목사님은 어떤 설을 믿으시는지...우문에 현답을 기대합니다.

민들래

2006.06.16 14:57:24

축자 영감설이 잘못 되였다기 보다 일점 일획 이라도 라는 주장은 시대적 착오다 이 말씀이시겠지요
이 말씀은 학문적으로 이미 밝혀진 해묵은 일인되 또다시 거론하려니 거북하신 질문 같아서
제가 이렇게 올려봅니다.

[레벨:4]봄볕

2006.10.27 11:34:42

'축자 영감설' (verbatim inspiration)과 '언어 영감설' (Verbal inspiration) 은
엄연히 구분해야 하지 않을 까요?
이것은 저희 학교 총장이신 김중은 교수님(구약학)께서
자주 언급하시는 내용인데 (참고로 이분은 영문학 전공하셨습니다

영미 복음 주의 학자들이 자주 쓰는 varbal inspiration이라는 표현을
'축자 영감설'로 그릇되게 번역하기 때문에 오해가 생기는 것같습니다.
성경의 기자들이 마치 기계적으로 글자 한자 한자 '받아적기' 했다는 것이
근본주의자들이 주창하는 축자 영감설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까지 사용하셔서 기록케하신
성경의 '언어적 맥락' 에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었다는 주장이
언어 영감설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는 분명히 구분해야 하지 않을까요?

[레벨:1]똑소리

2006.10.30 11:14:11

<봄볕님께 질문>
봄볕님! 신학생이시군요.
성서축자영감설과 차별화시키기 위해서
"성경의 '언어적 맥락' 에 성령님께서 영감을 불어 넣었다" 표현을 쓰신것 같은데
대충 감은 오지만 확 와닿지 않는군요.
좀 구체적인 설명을 부탁해도 괜찮을까요?
위의 글을 읽고 한참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어적 맥락"에 "성령님"이 영감을 "불어넣는게" 무언지 말입니다.
글을 쓰신 분은 이미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읽는 제게는 모호하고 흐릿하게 느껴지거든요.
"언어적 맥락"이란 말자체를 이해 못하는게 아니라
"언어적 맥락"과 "성령님이 영감을 불어넣는 것"
이 두 문장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언어적 맥락"에 어떻게 성령님이 영감을 불어넣는지 말입니다.
제가 신학생이 아니어서 그런지 설명을 좀 부탁합니다.
말꼬리 잡는 건 아니구요
실제로 제 성미가 좀 그래요.
뭐든지 구체적으로 알아야 직성이 풀리거든요.

[레벨:4]봄볕

2006.11.03 11:48:33

설마 제 글에 댓글이 달려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똑소리' 님의 글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장신대' 대학부 신학과 에서 2년간 공부하고
군복무를 마친뒤 지금 잠시 쉬는 중입니다.
'신학생'이긴 하지만 그 2년간 너무도 부끄러운 시간을 보낸
탓에 님의 질문에 시원하게 답할 실력은 갖추지 못했음을
양해 드립니다.

"언어적 맥락"과 "성령님이 영감을 불어넣는 것"의
상관 관계는 성경이 기록된 고대의 사건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삶속에 구체적으로 임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생각해보시면 조금 이해하시기
쉬울 것 같습니다.

가령 님께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무엇인가 일을 한다고 가정할 때
필연적으로 그 일은 님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충분히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성령님과 함께 하는 일이라서
그 가운데 님의 연약함과 죄성, 그리고 개성과 인격들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죠.
오히려 성령님께서는 그 연약함과 감정들까지도
전 인격적으로 사용하셔서 일을 하십니다.

이와 같은 '반전의 은혜'가 기독교 신앙이 가진
위대한 능력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위의 내용을 이해하신다면 언어적 맥락과
성령님의 영감이 갇는 상관 관계를
충분히 파악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가령 바울 서신을 예로 들어봤을 때
과연 바울이 자신이 쓴 편지들이
훗날 '경전'이 될것이라는 사실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 까요?
결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경전이 될 것이라 가정했을때
극도로 조심했을 흔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죠.
오히려 바울 서신 곳곳에는 분노와 짜증, 심지어
저주까지 나타나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이때 과연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내용들을
글자 하나하나 기계적으로 받아적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보기 어렵겠죠.

대신 바울의 가진 연약함까지도 존중하며
그가 가진 훌륭한 지성들을 포함한 전인격을 통해
편지를 기록하게 하시되 그 글들이
그 오랜 시간이 지나도 신앙의 규범이 되며
오늘날 구체적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살아 나도록 단어와 문장들속에
성령님께서 함께 하셨음을 깨달을 수가 있죠.

이것은 비단 바울 서신에서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과 신약의 다른 여러 곳곳에서도
우리는 쉽게 '흠집'과 '상처'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이것이 '사람의 손'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모험의 흔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흠집'과 '상처'들이 성경 전체를
역동적으로 흐르는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결코 훼손시키지 못하는 것은
그 가운데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죠.

마치 서툰 화가들은 화폭의 묻은 오점으로
작품을 폐기하지만 거장들은 그 오점까지도
사용해서 위대한 걸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이치겠지요.

미흡한 설명으로 원하시는 답을 얻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평신도 (<- 이런 표현 썩 좋아하진 않지만) 로서
다비아의 글들을 읽고 또 신학적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모습을 저는 굉장히 높게 생각합니다.

신학은 결코 목회와 신학의 전유물이 아닌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분투하는 모든 이들이 반드시 훈련해야할
무기이기 때문이지요.

부디 님의 나아갈 모든 길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시길 바랍니다.

[레벨:1]똑소리

2006.11.05 09:54:23

아, 조금전 쪽지를 보낸 후에야 댓글을 찾았습니다.
제가 너무 무거운 주제를 질문한 것 같군요.
아직 제게는 흐릿하지만
댓글에 담긴 님의 정성과 사랑의 흔적을 잊지 않겠습니다.

[레벨:1]진리,자유

2007.01.07 00:51:35

신학과 신앙의 괴리란 말을 예나 지금이나 참 많이 합니다. 구체적인 사항에 해당하는 것이 성서를 바라보는 시각인것 같습니다. 보수신학과 진보신학을 나눔에 있어 이 성서관이 큰 기준이 되는데 고신, 총신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축자영감설을 지지하고 한신, 장신, 감리교 등 진보노선은 축자영감이 아닌 사상영감을 지지합니다.(혹시 이 글을 보고 개인적인 시각으로 기준하거나 또는 세세한 신학논쟁을 끌어들여서 "우리 교단은 그렇지 않다!"며 반박하실 수도 있으나 일단은 보편적인 사항을 말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한국교회의 대부분의 실상황에선 모두가 축자영감을 말합니다. 사상영감을 말하거나 설교하는 것은 신학하는 사람들만의 은밀한 사항이 되어버렸고 실제 교회에선 보수든 진보든 성서영감을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 실상인 듯 합니다.
제가 느끼는 신학과 신앙의 괴리 중 대표적인 경우를 갈무리 해봤습니다.
사실 이외에도 진보노선에서 신학하는 (본인은 감리교임) 사역자들은 내가 배우는 학문을 어느정도 선에서 실제 교회에서 언급하고 기준선을 잡아야 하는지... 난감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
다비안 인들 (특히 사역자들) 은 어떠신지요?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9.21 13:44:26

축자영감설에 대해?
이것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를 하다보면, 성경 구절들만 따로 떼어 놓아서 짜집기 형식으로 텍스트를 만들어서 공부합니다.
성경 구절에만 너무 몰두하고 있는 것이 숲보다는 나무에만 집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구절이 주는 의미가 아니라, 전체적인 장(章)이 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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