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조회 수 7505 추천 수 89 2005.10.21 13:34:02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메일명이 azur인 김 선생에게-

김 선생은 8월17일 저에게 메일을 보내셨습니다.
본인의 생각이 어떤지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그냥 김 선생이라고 부르죠.
김 선생이 보낸 질문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도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였습니다.
신학서적을 많이 읽으셨더군요.
김경재, 오강남 교수의 글을 접하신 걸 보면
이미 나름의 대답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대개 질문하는 사람들은
그 질문 안에 대답을 안고 있습니다.
다만 자신의 대답이 얼마나 확실한지
검증하기 위해서 질문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더 궁극적으로는 원래 대답은 없습니다.
다만 질문만 있을 뿐입니다.
질문을 정확하게 하는 게 곧 대답이기도 합니다.
질문과 대답은 결코 다른 게 아니라 하나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대답이다’라는 말은
바로 진리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발견한 대답은,
그것이 철학이든 물리학이든 아무 상관없이,
또 하나의 질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초기지입니다.
예컨대 황우석 교수의 베아줄기세포 연구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결코 대답이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은 불치, 난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줄기세포를 얻으려고
나름으로 전초기지를 구축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런 일이 절대적이라는 말도 아닙니다.
궁극적인 것은 종말까지 은폐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전까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업은
정확하게 질문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김 선생은 질문할 줄 아는 분이시니까
그것으로 이미 대답에 가깝게 접근한 분이라고 생각됩니다.
굳이 내가 중간에 나서서 이러쿵저러쿵 대답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내가 나름으로 제시하는 대답이라는 것도 역시
김 선생처럼 질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신학적인 질문을 좀 더 많이,
아니면 조금 앞서 던진 사람이니까 약간의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도,
또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이런 질문은 한편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무의미할 정도로 진부합니다.
진부하다는 말은 이미 이런 질문이 수없이 제기되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많은 사람에게 이미 대답이 주어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무겁다는 말은 우리가 이 질문의 의미를 모른다는 뜻입니다.
모른다기보다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무게를 가졌다는 뜻이겠지요.
이 질문에 가까이 다가가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과 구원을 우선 나누어서 생각해야합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 정확한 이해가 전제되지 않으면
이 질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각각 해석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신학대학교에서는 기독론을 한 학기,
또는 여러 학기에 걸쳐서 공부합니다.
이에 관한 책도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를 구원한 자라고 말하면 되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은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오늘 저는 기독론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아마 ‘구원’ 문제만 약간 주마간산 격으로 언급하는 게 좋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곧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의해서 규정됩니다.
아마 김 선생은 ‘대구성서아카데미’ 사이트에서 구원에 관한 글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걸 내가 지금 다시 반복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지금 그 글을 읽었을 다른 독자들도 염두에 두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구원 자체에 관한 언급은 아예 하지 않아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게 뭐꼬?”라는 화두처럼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있는 것 자체가 구원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할까요?
구약 이야기부터 할까요?
아니면 신약인가요?
아니면 구원의 내용이라 할 수 있는 생명에 관한 이야기가 필요할까요?
아니면 사랑의 의미를 찾아가야 할까요?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 이야기는 어떨는지요.
시작의 길은 다양할 수 있습니다.
김 선생 스스로 생각해보면 좋겠지요.
저는 예수에게서 시작할까 합니다.
예수의 공생애 동안 그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구원 사건들이
도대체 어떤 근원과 내용으로 전개되었는가를 살펴보는 작업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많은 관점들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통한 구원 사건들이 고유하기는 하지만
그것도 이스라엘의 역사와 직간접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예수의 사건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의해서 해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안고 있는 ‘삶의 자리’를 훨씬 심층적으로,
다층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는 본격적으로 신학적인 논쟁을 벌일 생각이 없으니까
그냥 직접 몇 가지 사건만 짚어보죠.
예수는 병든 사람들이나 장애인들을 고친 일이 여러 번 있습니다.
그때 본인의 믿음이나 그 주변 사람들의 믿음을 평가하시기도 했지만
그런 것 없이 그냥 불쌍하게 여기신 적도 많았습니다.
산상수훈에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는 걸
찬찬히 생각해보십시오.
여기서 어떤 영적인 가난을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상태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왜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을까요?
가난한 사람들은 현재의 체제가 변화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합니다.
새로운 세계가 오기를 원하는 거죠.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도 기억해보십시오.
나사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조건이 있다면 거지처럼 살았다는 사실만으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으로, 윤리적으로 모범적인 사람보다는
세리와 죄인, 창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먼저 들어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복음서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예수님의 구원은
어떤 종교적인 믿음이나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주장할지 모르겠군요.
그런 건 구원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구원은 영혼구원이고, 천당 가는 것이지
병이 낫는 것이나 절망에서 희망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입니다.
이런 주장은 옳기도 하지만 충분하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궁극적으로 말한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의 실체에 대해서 모릅니다.
병이 낫는 것이 구원 자체는 아닐지 모르지만
구원의 징표임에는 분명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임하게 될 행복도
구원 자체는 아닐지 모르지만 그 징표임에는 분명합니다.
구원은 완료된 어떤 사건이 아니라
종말론적으로 열려진 사건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미 소유한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다려야 할 어떤 것,
또는 어떤 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나이를 먹을수록 결정적이고 절대적인 세계를
설명하기가 두렵습니다.
그래서 구원이 “무엇이다.”라고 말하기도 겁이 납니다.
그 이유는 소위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인식의 한계를 절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식의 한계가 곧 믿음이 부족하다는 증거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옳은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에는 인식되지 않은 것을 믿을 수는 없다고 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식‘은
무조건 근대주의적 합리성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믿어야 할 어떤 대상이 믿을만하다는 판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근대주의적 합리성과 어긋나는 것을 모두 배척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가 곧 자연과학의 한계 안에만 놓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믿음이 반드시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원리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합리성이라는 건
늘 과거에 알려진, 또는 증명된 논리를 바탕으로 제시되기 때문에
우리의 인식 행위에서 중요한 잣대로 작동되어야 하겠지만
결코 절대적인 것은 되지 못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그런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인식이 늘 근대적 합리성에 의존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합리적 인식은 그것을 뛰어넘은 세계를 해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유지해야 할 최소한의 진리론적 태도입니다.
즉 성서에 관한 역사비평을 전제해야만
그런 언어를 통해, 언어 너머에서 자기를 계시하는 하나님을 언급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이 옆으로 흘렀군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구원을 규범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규범화 자체가 문제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인간은 규범화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인식하지 못하니까요.
그 규범화는 신학화라는 말과도 통합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다.”라는 명제가 곧 규범화입니다.
이런 건 경우에 따라서 필요합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는 이런 규범화에도 정직하지 못하다는 게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이런 규범화를 훨씬, 근본적으로 뛰어넘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 자체가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규정할 수 없다면
결국 구원을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자체가 구원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은 실체론적으로 존재하시는 게 아니라
구원 사건으로 존재하십니다.
사건이 곧 하나님입니다.
행위가 하나님입니다.
구원은 사건이지요?
그렇다면 결국 구원은 하나님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과 하나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생각을 좀 더 밀고 나가보세요.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경험할 수 없습니다.
간접적으로만 그를 경험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이 아니라 성서의 진술입니다.
인간은 죽어야만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곧 인간은 죽어야만 구원받는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죽어야만 구원받는다.”
내 이야기가 점점 복잡해지는 것 같군요.
이렇게 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요.
줄여야겠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자꾸 문제를 꼬이게 만드느냐 하면,
신학적인 문제, 혹은 신앙적인 문제는
어떤 구체적인 대답을 주는 게 아니라
절대적인 분, 곧 하나님을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운명을 맡길만한 분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
곧 모든 신학과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내가 대답을 줄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건 솔직한 말입니다.
내 대답은 없습니다.
다만 생각하는 방식만 제시할 뿐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계기만 마련하는 게 내 임무입니다.
그게 과연 이루어지고 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군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의미가 있고,
구원만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둘을 연결시킬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중요하고,
구원에 천착하는 것만이 중요하지,
이 둘을 연결시키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과 상관없다는 말인가?”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만약 내 설명을 듣고 그런 질문이 마음에 떠올랐다면
그는 아주 초짜 기독교인입니다.
내가 왜 상관없다고 생각하겠으며, 그렇게 주장하겠습니까?
이미 각각의 개념 안에 상대 개념이 포함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연결시켜서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뿐입니다.
내 생각에,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있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질문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이런 질문으로 서로 다툰다면 그는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제 내 말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뭔가 찜찜한 게 있군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구원받을 이름을 우리에게 주지 않았다거나,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식으로
교회가 구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은 것 같군요.
이런 문제까지 오늘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네요.
그리고 갑자기 이런 논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구요.
이 사이트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이미 이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됐을지 모르고,
앞에서 내가 이야기 한 것만으로도
서로의 이해가 소통됐을 거로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
기독교 열광주의에 빠진 사람들까지 내가 배려하기에는
내 영적인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김 선생,
더 이상 이런 질문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자들과 논쟁하지 마세요.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공부하시고,
구도정진의 자세로 구원문제에 전념해보세요.
우리의 삶 전체가 바로 이런 주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을의 전령인 시원한 한줄기 바람도 역시
우리에게 구원 문제를 새롭게 새길 수 있도록
무언가를 속삭이듯 전하고 있을 겁니다.
예수도 역시 우리에게 풀과 새를 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윗 글은 사랑채 200번에 올려진 것입니다.
뒤로 밀려있어서 새로 들어오시는 손님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것 같아서 여기에 다시 올립니다.)


조현아

2005.10.21 22:44:05

여러가지 생각들이 제 머릿속에서 엉키는군요

(불로 소금치듯함을 받으리라.
혹은 꺼지지 않는 유황불
한 모금의 물을 구걸하는 부자
구더기도 죽지 않는 지옥)
많은 간증자들과 증언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처참하게.. 당하는 지옥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일까? 회의하게 되는데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는지.. 궁금해집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5.10.21 23:39:26

계몽주의 이후에 정신이 바로 박힌 사람이라고 한다면
아무도 그런 지옥표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시대가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성서의 진리가 부정될 수는 없겠지만
이 문제는 지동설과 진화론이 이미 기정 사실로 자리를 잡을 것처럼
별로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다만 심판의 의미는 좀 다르죠.
진리가 완전히 결정되는 사건을 심판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현재의 이런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세상이
결국 완성될 때를 우리가 기다린다고 한다면
심판 표상은 여전히 효력이 있습니다.
다만 그 심판의 기준을 우리가 전혀 모른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를 다녔으니까, 예수를 믿었으니까
의의 심판을 받고,
그렇지 못했으니까 악의 심판을 받는다는 말은 별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지요.
마지막 심판에서 자기가 왜 선한 사람들의 쪽으로 심판받았는지,
반대로 자기 왜 악한 사람들의 쪽으로 심판받았는지
전혀 모릅니다.
자기의 기대와 반대의 심판이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죠.
이 말은 곧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의 예상과 전혀 다르다는 뜻이기도 하고,
어쩌면 그 심판이라는 사실 자체도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지옥과 천당을 다녀왔다는 사람들의 경험은 무의미합니다.
내가 이렇게 단정하는 게 좀 경솔하기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걸 전제하고,
그렇지만 신학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는 훨씬 많은 논의가 필요하기 때문인데,
어쨌든지 그런 간증들은 거의 정신 치료의 대상이 아닐까요?

[레벨:0]

2005.10.22 00:29:20

정신치료 대상이라니
이번의 대답도 걸작이시네요

하하하

[레벨:0]이맹영

2006.01.06 15:10:15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걸작을 비웃는 것은 졸작의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9.22 21:36:50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예수님을 믿은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먼저 모태신앙으로 시작해서)
타 종교에 대해 그들이 구원의 문제대해 질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의 형제라고 생각합니다.
형제 끼리는 서로 싸우면 안되겠죠.
하나님 아버지가 가슴 아퍼하시니깐?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큰 사랑, 예수님를 우리에게 보내신 큰 사랑에 형제 모두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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