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역사비평에 대해

조회 수 7213 추천 수 113 2005.11.04 00:28:28
성서 역사비평에 대해

개신교 신자들은 마틴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 명제를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심지어는 신학교 강의실 안에서도 건전하고 열린 신학적 담론이 형성되기가 힘들다. 그들은 루터의 이 명제가 교회의 권위를 일방적으로 강조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장과 대립적이라는 사실을 외면하고, 또한 야고보서를 지푸라기와 같은 문서라고까지 깎아내린 루터의 언급을 외면한 채 본인들이 원하는 쪽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사람 교황을 우상숭배하고, 개신교 신자들은 종이 교황을 우상숭배 한다는 말이 정확한 지적인 것 같다.
우리 개신교 신자들이 성서를 그렇게 기계적인 차원에서 절대화 하는 것은 단지 루터의 그런 명제만이 아니라 이미 성서가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는 데에 그 근거가 있다. “성경은 전부가 하나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딤후 3:16).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도 이와 비슷한 의미로 이렇게 언급한 적이 있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천지가 없어지는 일이 있더라도 율법은 일 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질 것이다.”(마 5:18). 그러나 엄밀하게 말해서 이 본문들이 말하는 성경과 율법은 구약을 가리키고 있으며, 또한 구약성서가 기원후 70년 얌니야 종교회의에 이르러서야 정경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위의 본문에 근거해서 성서의 권위를 보증하려는 것은 무리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와 구약성서, 그리고 신약성서 사이에 매우 복잡한 역사적 긴장이 놓여 있긴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신구약성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 또는 하나님의 계시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틀린 건 아니다. 다만  성서를 폐쇄적인 규범으로 접근하는 자세는 별로 지혜롭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당하지도 못하다. 지혜롭지 않다는 말은 성서의 절대화는 이단의 발호를 부추긴다는 의미이다. 한국의 수많은 이단들에게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아무리 무모한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성서 구절로 뒷받침하기만 하면 그들은 아주 쉽게 일정한 세력을 얻는다. 정당하지 못하다는 말은 원래 역사적으로 전승된 성서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늘의 독자들에게 전달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역사비평이 그런 폐쇄적인 태도로 인해서 해체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왜 성서를 역사 비평적으로 읽어야만 하는가? 우선 그 이유는 오늘 우리가 대하고 있는 문자로 된 성서 이전에 ‘소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십계명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번갯불을 통해서 돌판에 글씨를 새긴 것처럼 성서가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문자보다 먼저 소리가 있었다. 성서는 하나님이 글씨를 쓰셨다 하지 않고 “말씀하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 무슨 언어로 말씀하셨는지 생각해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에게 말씀하셨으니까 결국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언어이신가? 신약성서가 헬라어로 기록되었다는 말은 결국 하나님의 언어가 헬라어라는 뜻일까? 아무리 근본주의적인 생각에 젖어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성서기자들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신 것뿐이고, 실제로 성서를 기록한 사람은 자기의 모국어로 기록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복잡한 상황 속으로 들어간 셈이다. 성령의 감동, 성서기자, 그의 모국어, 그리고 구체적인 성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이런 정보 앞에서 우리는 성서가 어떻게 기록된 것으로 보아야 할까? 이에 대한 초보적인 대답은 다음과 같다. 성령이 성서 기자를 감동시켰고, 그 감동에 따라서 성서 기자가 성서를 기록했다고 말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런 형식적인 대답으로 성서 형성의 깊이를 모두 찾아내기는 힘들다. 도대체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가? 더 근본적으로는 성서 기자에게 영적인 감동을 준 성령은 누구인지 아는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문서들이, 신약의 경우만 본다 하더라도 수백 년 동안 경전으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즉 신약성서가 기록된 그 시간으로부터 경전이 될 때까지, 최소한 300년이라는 역사는 무엇일까? 이런 대목에서 자꾸 이성적으로 따지지 말고 믿으면 되지 않는가, 하고 윽박지르면 더 말하고 싶은 생각이 없지만, 우리가 성서를 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최대한으로 따져볼 건 따져보아야 한다. 교부들은 이렇게 시시콜콜하게 따지는 방식으로 397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27권의 신약성서를 경전으로 채택했다.  
신약 문서가 처음으로 기록된 그 순간부터 정경으로 결정될 때까지에 해당되는 시간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잡으면 350년, 짧게 잡으면 300년이라는 시간적 간극은 오늘 우리 손에 남아있는 성서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짚어야 할 대목이다. 그 역사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곧 성서의 역사비평이다. 비록 그 작업이 고된 노동을 필요로 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그런 역사활동에 깊이 관여한 덕분으로 오늘 역사적 기독교가 이렇게 자리를 잡았으며, 또한 우리에게 성서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런 작업을 회피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역사비평이 신앙을 세우는 게 아니라 오히려 허무는 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그건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가 감당해온 그런 역사적 무게를 손쉽게 피하거나 거부하려는 일종의 신앙편의주의에 불과하다. 내 생각에 오늘 우리가 이런 역사비평을 성실하게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후손들에게 역사의 하나님에게 철저하게 의존하려고 했던 기독교의 고귀한 전통을 넘겨주는 최소한의 당연한 사명이다.

[레벨:0]임영택

2005.12.23 13:54:42

목사님 안녕하십니까
야고보서가 지푸라기 서신이라는 루터의 말은 야고보서는 이신칭의에 반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인지, 무슨 뜻으로 이렇게 말을 한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바울서신의 핵심이 칭의라고 보이는데 저는 칭의에 대하여는 매우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4복음서에는 믿음을 가지라고 했지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는다는 내용은 전혀 없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자라야 아버지께로 간다고 했는데 갑자기 바울이 칭의를 주장하는 바람에 저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참고로 정통교리에 의해 기독교 교리에 심한 의문을 가지고 있다가 스베덴보리에 의해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생각해보게된 사람입니다. 저는 순복음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목사님의 설교 비평이 저에게는 스베덴보리를 발견했을때와 비슷한 충격(의문이 풀리는 충격)을 주었고 지금은 목사님 사이트의 고객이 되었습니다. 답변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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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6.02.20 23:41:01

임영택 님,
이 댓글을 이제야 발견하고 잠시 글을 답니다.
제가 모든 댓글을 확인할 수 없거든요.
얼마전에는 댓글이 초기 화면에 떳기 때문에 그런 문제는 없어졌지요.
요즘 서버 옮기는 중이라 그렇지, 아마 다시 그런 체제로 돌아가지 않을까합니다.
글쎄요.
마틴 루터가 야고보서를 지푸리가와 같다고 주장한 것은
믿음보다 행위를 강조했기 때문일 겁니다.
그 행위는 곧 루터가 극복해보려고 했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업적의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행위는 사실 어려운 문제입니다.
무엇을 강조하는가, 어떤 연관으로 보는가, 하는 게 중요하지
선택의 문제는 아닙니다.
믿음은 당연히 행위가 따라오게 되고,
행위는 당연히 믿음에 존재론적 토대를 놓아야하는 거죠.
이 변증법적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햐는 게 여기서 관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대해서 저는 잘 모릅니다.
정통교회의 교리에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거기에는 2천년 동안 진리를 추구해온 역사의 무게가 담겨 있습니다.
다만 그것을 정확하게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칭의론에 한정해서 말하면
일종의 믿음 일원론으로 떨어져버리게 되겠지요.
늦은 대답, 미안합니다.

[레벨:23]브니엘남

2007.02.15 16:27:20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으로 본 것은 아마 그 문체가 구약적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즉 신약의 냄새가 지극히 적게 나는 율법적인 색채 잠언적인 색채를 띄고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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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7.09.22 21:51:30

성서 역사비평에 대해?
역사비평에서는 어느 것도 자유로워 질 수가 없습니다.
해부학하는 의사가 손에 칼을 들고 철저하게 사람을 해부하는 것처럼 역사비평은 감정이 배제가 됩니다.
성경이 주는 역사적, 시대적 비평을 보면 실망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인 실망일뿐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원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우를 쉽게 범합니다.
성서의 역사비평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섭리가 이해 될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자유로워 진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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