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조회 수 5004 추천 수 63 2004.07.01 15:12:50

죽음  



아무도 살아있는 동안에는 절대 경험해볼 수 없는 죽음을 사유의 주제로 삼는 것만큼 어리석고 무모한 일도 없다. 많은 종교와 철학, 심지어는 물리학이나 의학 전문가들이 죽음에 대해서 나름대로 언급할 수 있긴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죽음 이전의 소견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확한 해명이라 할 수 없다. 간혹 죽음의 세계를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다. 죽음의 세계에 대한 그들의 묘사가 아주 사실적이기 때문에 그럴듯하게 들리기는 하지만 우리는 그런 임사(臨死)체험을 전폭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주장들은 객관적 토대가 너무나 빈약할 뿐만 아니라 정신 분석적인 관점에서 해명이 가능한 하나의 현상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따르면 인간의 무의식에는 평소에 의식하고 있는 않은 무진장한 정보가 숨어 있다고 한다. 어느 순간에 그 무의식이 작동함으로써 자신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죽음 이후의 세계라는 그들의 경험도 역시 이런 무의식이 드러나는 현상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는 입을 닫아두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비록 우리가 실증적인 대답을 발견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성서를 통해서 죽음의 본질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다.

우선 창세기의 선악과 설화에 의하면 처음 인간인 아담과 이브는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다. 하나님은 이미 그것을 먹으면 죽는다고 아담과 이브에게 단단히 일어두신 일이 있었다. 도대체 아담과 이브는 무슨 이유로 죽음을 무릅쓰고 선악과를 먹었을까? 성서는 그것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분별할 줄 알게 된다는 뱀의 꾀임을 그대로 따라간 것뿐이다. 그 결과 인간은 죄의식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처럼 죽어야만 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다.

그런데 성서의 설명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안에서 쫓겨난 이유는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죽지 않게 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의식한 채 죽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면 결국 영원하게 살되 선악을 구분하지 않아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선악의 분별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문제였는데,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이 그것을 소유하게 됨으로써 인간의 본질로부터 벗어나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 영원하게 사는 것은 불행이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설득력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인식한다는 것은 한편으로 인간의 탁월성을 담보하는 능력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영원한 삶과는 도저히 병행될 수 없는 숙명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이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을 기대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사유체계 안에서는 그것이 오히려 고통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런 형식의 생명이 영원하게 지속된다고 생각해보자. 죽음 자체가 두렵기 때문에 영원한 삶을 당연하게 받아들일지 모르지만, 한 걸음만 뒤로 물러나서 생각하면 전혀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원한 삶이라는 사태가 우리의 현실적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삶이 7,80년이라는 시간 속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소중한 것이지 영원하게 반복된다면 참으로 비참한 것이 될 것이다.

정직하게 말해서 우리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도저히 인식할 수 없다. 그저 '순간'과 반대되는 개념으로서의 '영원'이라고 말해서는 그 영원의 깊이를 모두 담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노력해도 그 개념이 우리의 인식에 담기지도 않는다. 선악과 설화의 논리를 따라간다면 영원한 생명은 선악에 관한 의식이 없을 때만 타당한 상태라 할 수 있다. 영원한 존재는 인간의 시시비비가 개입될 수 없는, 즉 오늘의 이런 생명 형식과는 전혀 다른 지평에서만 그 생명력이 보장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서 현실의 삶에 들어오게 된 인간에게 주어진 죽음은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라 은총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인 표현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인간에게 하나님은 '죽음의 은총'을 내리셨다. 이런 죽음이 우리의 현실에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단절되어 있는 이 땅의 지평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죽음으로 인해 인간에게는 이 땅의 삶에서 참된 자유가 주어진 셈이다. 온갖 억측과 불안과 자기 욕망을 부추기는 선악에 대한 의식을 끝장낼 수 있는 순간이 곧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죽음을 예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죽음은 분명히 인간의 죄로 인한 결과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렇게 즐거운 희망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죽음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생명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는 점에서 죽음을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의 의식(儀式) 중에서 가장 핵심이라 할 세례가 곧 이런 죽음의 신비를 가리키고 있다. 비록 우리의 삶을 가장 극단적으로 파괴하는 능력인 죽음이 우리 앞에 버티고 있지만 기독교인은 그런 죽음이야말로 부활의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신비주의자들이다. 우리의 현실인 죽음에서 그 현실 너머의 세계를 인식하고 희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2004.3.29. 정용섭>




profile

[레벨:41]새하늘

2007.08.12 17:36:56

죽음?
생명이 다하여 또다른 생명의 길로 가는 것.
인간이 소유욕으로 채워진 생명의 연장선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원토록 구속됨을 바라봅니다.

[레벨:0]신산배

2008.01.24 21:59:07

선과악을 구분하지 않아야 행복하다. 그러기에 비판하지 않는자가 행복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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